성석제의 농담하는 카메라
성석제 지음 / 문학동네 / 2008년 6월
평점 :
품절



소설가는 가슴이 뜨거워야 한다고 믿었다. 용암과 같은 열기가 몸 안의 좁은 공간을 견디지 못하고 밖으로 폭발하듯 쏟아질 때, 그 더운 에너지가 이야기의 형식으로 완성된다고 생각했다. 그 열기는 천성일 수도 있고 살면서 겪은 고통의 산물일 수도 있다. 박래부의 <작가의 방>에 등장한 공지영의 모습은 천성적으로 뜨거운 사람이란 인상을 받았다. 내부의 열기를 식히기 위해서 글을 밖으로 토해내지 않을 수 없는 사람. 반면 얼마 전 타계한 박경리 선생은 고통의 인고가 만들어놓은 사리를 가슴 속에 아로 새긴 사람이었다. 한국 전쟁 과정에서 남편과 아들을 잃은 박경리 선생. 그의 외동딸은 실제로 그 시절의 고통이 어머니를 소설가로 만들었다고 밝혔으며, 선생 역시 이를 인정하기도 했다. 극심한 궁핍 속에 <주홍글자>라는 역작을 완성한 미국의 소설가 나다니엘 호손. 그도 외교관 생활을 통해 삶이 안정되어 가면서 예전과 같은 작품을 쓰지 못했다. 개인적으로 고통이 공급하던 내부의 열기가 외부의 안정화와 함께 식은 것이 아닐까 싶다.


하지만 이런 내 생각을 뒤흔드는 사람이 있으니 그가 바로 성석제다. 그를 보면 치열함, 뜨거움과는 거리가 있어 보인다. 난 성석제를 생각하면 중국 길거리에서 파는 웃통을 훌훌 풀어 제치고 천진난만하게 웃는 스님상이 떠오른다. 인간사의 시름일랑 속세에 묻어놓고 이백과 함께 숲속의 정자에서 달을 안주 삼아 술을 마시고 시를 읊을 것만 같은 사람. 글을 통해 내가 받은 성석제의 인상이다. 예전 블로그에 그를 이빨 센 동네 구라 농사꾼으로 비유한 적이 있다. 분명 그는 가슴 속의 고통이나 뜨거움이 아닌, 낙천과 긍정의 에너지로 이야기를 풀어내는 사람이다. 그에겐 특별한 이야기 소재는 필요 없다. 단지 고개를 돌려 눈에 들어오는 사물이면 모든 그에게 소재가 될 수 있다. 그것이 버스에 붙은 안내문이건, 산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왕파리이건 간에 말이다. 일단 소재가 눈에 포착되면 그의 예리한 관찰력이 작동하기 시작한다. 곧 이어 화려한 말발로 어떤 소재든 흥미로운 이야기로 바꿔놓는다. 마치 그의 산문을 읽고 있자니, 동네 주민의 이야기에 잠시 걸음을 멈춘 나그네가 된 기분이다.


그의 산문집 <농담하는 카메라>엔 성석제의 특성이 고스란히 잘 나타나있다. 세 개의 챕터로 구성되어 있지만, 구분의 큰 의미는 없다. 그냥 그가 보고 겪은 사소한 일들이 과거 우리 조상들의 해학과 함께 녹아져 있을 뿐이다. 제주도에서 그가 한 표지 여행은 그의 해학을 가장 잘 보여준다. 문자중독증에 걸린 환자답게(자신이 스스로를 칭한 표현) 여행지에서 찾아볼 수 있는 표지를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는데, 그 집요함이 참으로 유쾌하다. ‘약진하는 제주시가 한눈에 내려다보이고 멀리 펄쳐진 검푸른 바다와 수평선은 매우 아름다우며 비록 해발 148m에 불과한 봉우리지만......’이라고 적혀있는 사라봉 정상의 표지판을 보고 그는 이렇게 궁시렁거린다. ‘굳이 트집을 잡자면 제주시는 언제나 약진만 하는지, 바다는 늘 검푸르고 수평선은 애무 아름답기만 한 것인지 묻고 싶다. 또 해발 148m에 ’불과한‘이란 표현이 마음에 걸린다. 해벌 몇 미터가 되어야 ’불과한‘이라는 겸손한 표현에서 해방이 될지 궁금하다.’ 산행 도중 김밥과 라면을 먹던 성석제는 자신 주변에 있는 한 무리의 파리떼를 만났던 이야기도 참으로 재미나다. ‘“어이 친구. 김밥이나 라면 중 하나는 양보하는 게 좋을 거야. 둘 다 먹는 건 너무 탐욕스러운 거 아니겠어? 남들도 생각해야지.” 그 파리들 중 어느 녀석에게 발성기관이 있다면 그런 말을 했을 법했다.’ 정말이지 그를 직접 만나보면 얼마나 더 많은 유머를 접할 수 있을지 궁금하다. 동시에 그는 식도락가다. 책에는 음식에 관한 이야기가 상당히 많다. 막국수, 생맥주, 햇쌀밥, 복숭아, 동파육, 중국술, 자장면 등등. 구수하게 풀어내는 그의 음식 이야기를 듣고 있자면 금세 입이 심심해지고 배는 허기져온다. 농사꾼 이미지는 여기서 발견한 것 같다.


아내는 성석제의 글을 이렇게 평했다. “이상하게도 성석제의 산문은 재밌는데도 중독성은 없는 것 같아.” 실제로 나도 <농담하는 카메라>를 읽는 데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물론 자기 전 침대에서 그의 책을 펼친 이유도 있겠지만, 그 보다는 그의 글에 자극적 양념이 적다는 것이 더 큰 이유가 아닐까 싶다. 도시 이야기꾼이 아닌 시골 이야기꾼을 떠올린 것도 이 때문일테다. 그래서 더욱 난 성석제가 좋다. 잠들기 직전 책을 펴고 있는 순간 만큼은 시골의 어느 마을에선 나그네가 되어 그의 이야기를 편안한 마음으로 듣는다. 책을 덮는 순간 이야기세계의 나그네는 현실 세계로 돌아오지만, 그 속에서 느꼈던 편안한 마음은 고스란히 간직한 채 잠에 빠져든다. 참으로 유쾌한 하루의 마무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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