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는 법을 배우다
뤽 페리 지음, 임왕준 옮김 / 기파랑(기파랑에크리)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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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가슴이 착잡하고 먹먹한 한 주였습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죽음은 예상보다 큰 충격으로 다가왔습니다. 그의 죽음은 정치로 대변되는 민주주의의 이상이 효율성을 강조하는 경제 현실 앞에 무릎 꿇은 상징적인 사건이었거든요. 슬픔과 충격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커졌습니다. 정치인을 비롯하여, 일부 보수인사들의 과격한 주장이 연일 이어졌고, 정부 역시 시청 광장을 차단하며 분향 열기를 눌렀습니다. 가슴 한편에 슬픔은 커져갔지만, 세상은 그 슬픔을 함께 해주지 않는 것 같았습니다. 며칠 전 만난 한 기자는 현 상황을 이렇게 표현하더군요. “우리나라 사람들은 분명 큰 상처를 입었어요. 근데 그 큰 상처를 어루만져주는 사람이 우리나라엔 현재 없어요. 전직 대통령의 죽음은 분명 한국인의 집단적 기억에 큰 흉터로 남을 텐데, 현 정부는 그 슬픔을 도대체 보듬어 주지 않네요.” 맞습니다. 우리가 겪은 집단의식의 상처는 서서히 가슴 속 깊은 곳에 응어리지고 있었습니다. 격한 감정의 덩어리는 갈 곳을 찾지 못하고 내부에서 방황했습니다. 저 역시 지난 주말 느꼈던 슬픔은 좌절과 분노를 넘어 절망과 무력으로 치닫고 있었다. 그래서 영화 대신 책을 집어들었습니다. 가슴의 무력감과 답답함에 대한 출구가 책에 숨어 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뤽페리의 <사는 법을 배우다>를 선택했습니다. 정말 궁금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 지 말이죠.

한 보수 논객은 “노 전 대통령의 장례식에 세금을 하나도 쓰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후 쏟아지는 감정적 질책에 대해 그는 자신의 주장에 대한 논리적 반박은 없고 비난만 쏟아진다며 정정당당한 논쟁을 요구했습니다. 그는 논리를 요구한 것입니다. 이성으로 부딪혀 누구의 주장이 더 옳은 지 결판내고 싶어 했습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세상은 논리의 기반위에 세워진 왕국이 아니니다. 이성은 비논리와 우연 위에 세워진 왕국을 지탱하는 무기일 뿐이죠. 때문에 각자 다른 진실과 진리를 위해 저마다의 논리를 갈고 닦습니다. 싸움은 처절하게 이성적이고 논리적입니다. 하지만 그 이면엔 권력을 향한 의지만이 남아있을 뿐입니다. 논리로 이겼다고 해서, 그것이 세상의 진리를 명확히 드러내는 것은 분명 아니란 말이죠. 실제로 그 보수 논객의 논리는 명확했습니다. 또한 논리적으로 그와 일합을 겨뤄볼 수도 있겠죠. 하지만 머리가 아닌 가슴은 분명 ‘이건 아니다’를 외치고 있었습니다. 이는 분명 노 전 대통령의 죽음을 신격화하려는 움직임에서 나온 이야긴 아닙니다. 대통령의 죽음 앞에서도 누구나 어떤 얘기도 할 수 있는 자유가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분명 그의 발언은 슬픔을 겪고 있는 수많은 국민들의 가슴에 비수를 꽂는 폭력적인 언행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뤽페리의 <사는 법을 배우다>는 상당히 깊이 있는 서적이었습니다. 책에서 루소는 인간과 동물을 구분하고, 인간의 두드러진 특징으로 ‘완성가능성’을 제시합니다. 동물은 자연이 프로그래밍 한 상태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습니다. 반면 인간은 상식적으로 납득가지 않는 악행을 저지를 수도, 또한 상대의 자유를 보호하기 위해 자신의 자유를 희생할 수도 있는, 변화 가능한 운명을 지니고 있습니다. 루소는 인간의 이러한 특성을 ‘완성가능성’이라고 표현한 것이죠. 루소의 사상 위에 칸트는 독자적인 휴머니즘적 사고를 발전시킵니다. 이성을 가진 인간은 모든 인간을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 대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목적의 왕국을 주장한 것이죠. 칸트는 서로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단계로써 민주주의가 큰 의미를 지님은 물론, 민주주의를 더욱 발전시키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봤습니다. 하지만 칸트나 루소는 인간을 낙관적으로 바라봤습니다. 민주주의가 잘 실현되고 있다고 알려진 한국의 상황만 봐도 목적의 왕국은 너무나 먼 얘기 같거든요. 추모 열기를 보듬기 보다는, 슬픔의 열기를 두려워 해 서울 광장을 차단하는 정부의 모습을 보면, 마치 주인인 국민은 슬퍼서 펑펑 울고 싶은 데 정부는 마음껏 울 장소를 열어주지 않는, 오히려 우는 주인 옆에 와서 화를 돋우는 실없는 말을 꺼내기도 하는 우스운 상황이 벌어지는 것 같습니다. 민주주의는 이룩됐지만 과연 칸트나 루소의 시대에 비해 우리가 얼마나 더 이상향에 가깝게 다가가 완성됐는지는 의문입니다. 여전히 우린 주인이 아니고, 인간의 ‘완성가능성’은 요원해 보인다는 의미죠.

때문에 니체는 칸트나 루소가 세워놓은 민주주의의 이상향이 결국 중세의 신과 같은, 인간의 자유를 억압하는 또 다른 초월이자 허상이라고 주장합니다. 니체의 세계에 진리는 없습니다. 오직 무엇이 더 옳고 그른지에 대한 권력의 투쟁만 있을 뿐입니다. 논리는 그 투쟁의 무기이자 외연에 불과합닏. 휴머니즘 시대에 이성은 우리의 악을 억제하고 더 나은 세상을 만들어 줄 만병통치약으로 여겨졌지만, 니체는 이성의 허구성을 꿰뚫어보고 이성의 세계를 허물어버립니다. 분명 논리와 이성은 세계를 이루는 커다란 한 축에 불과할 뿐, 세상의 전부는 아닙니다. 때문에 니체는 아폴로로 대변되는 이성의 대척점에 디오니소스로 대변되는 감성의 지위를 복권시킵니다. 이성으로 설득시키는 작업은 분명 한계가 존재합니다. 오히려 감성적인 작업은 설득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때문에 니체는 논쟁이나 수사학보다는 음악 같은 예술이 더 우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실제로 우리 주변에서 말보다 강한 이미지를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업적을 논리적으로 풀어 쓴 기사보다, 그가 생전 불렀던 ‘사랑으로’라는 노래가 사람들의 마음에 큰 변화를 가져다주고요. 논리적으로 담배의 문제점을 파고 든 다큐멘터리에 무심한 흡연가도 감성적인 드라마 한 편에 행동의 변화를 주기도 합니다. 결국 세상을 완전히 이해하기 위해선 감성의 영역이 세상의 절반임을 알아야 합니다. 물론 그렇다고 팩트와 논리가 중시되는 언론의 영역에 감성과 주관이 넘실돼야 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논리와 이성에 대한 맹신, 더 나아가 논리적으로 정당하고 옳기만 하다면 전혀 문제가 없다는 식의 생각은 위험함을 주장하고 싶은 겁니다. 분명 국민들은 노무현 전 대통령의 죽음을 보며 감성적인 울분과 슬픔을 경험했습니다. 그 사람에게 논리적으로 ‘국민 세금을 쓰지 말자’란 주장은 설득이라는 효용 면에서 봐도 비효율적입니다. 보수 논객의 주장대로 대통령이 죽었다고 해서 하고픈 말을 하지 말아야 하는 법은 없습니다. 다만 감성과 이성이 어우러진 세상의 속성을 이해한다면, 때와 장소에 맞는 발언이 존재함을 알아야 합니다. 그게 세상을 사는 법입니다.

<사는 법을 배우다>의 저자 뤽페리는 니체가 허물어버린 세계에 새로운 이상향이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물론 칸트나 루소가 주장했던 막연한 낙관의 세계로 돌아갈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고 이상향이 없어진 상태에서 ‘아모르파티(운명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는)’를 외치며 현실의 비극을 그대로 받아들이기도 힘듭니다. 여기서 뤽페리는 새로운 휴머니즘을 언급합니다. 진정한 상대의 이해를 통해 소통이 원활하게 이뤄지는 세상. 칸트가 주장했던 목적의 세계에 비하면 초라한 휴머니즘 왕국이지만, 분명 소통의 세계는 현세의 새로운 초월이 될 수 있습니다. 새로운 휴머니즘 이상향을 보며, 자연스레 장자를 떠올립니다. 이해를 통한 소통의 첫 단계는 낯섦과 차이를 받아들이는 일입니다. 때론 굳건하게 형성된 자신의 세계를 뒤로 미루고 다른 세계와 공존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소통의 왕국을 건설할 수 있습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죽음을 보고 아무렇지 않은 사람도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건 너무나 많은 사람들의 가슴 속에 노 전 대통령의 죽음이 상처가 됐다는 사실입니다. 수많은 사람이 눈물을 쏟았습니다. 그들의 눈물을 보듬어 주고, 그들의 기억 속에 오래 남을 상처를 쓰다듬는 과정이야 말로, 울고 있는 그들에게 다가가 삿대질을 하며 그들의 잘못을 지적하는 일보다 선행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제가 뤽페리의 <사는 법을 배우다>를 통해 배운 사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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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9-27 19:4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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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 - 경제학 최대의 변수는 '애정'이다
존 러스킨 지음, 김석희 옮김 / 느린걸음 / 200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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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밤 늦은 시간, 친구 L이 전화를 걸었다. L은 많이 취해있었다. 녀석은 다짜고짜 내이름을 부르며 하소연을 시작했다. “야, 우리 회사 고발 좀 해줘.” “야, 내가 기자도 아닌 데 어떻게 고발을 하냐.” “그럼 니 친구들한테 고발 좀 하라고 그래, 이 놈의 회사.” “무슨 일인데?” “내 참. 월급을 안 준다. 고발 좀 해줘” 속으로 ‘그런 회사는 넘치고 넘친다’라고 생각했지만 어쨌든 보도해주겠다고 친구를 달래고 전화를 끊었다. L은 웃고있었지만 목소리엔 아스라한 분노와 슬픔이 뒤섞여 있었다. 다음 날, 친구를 만났다. “어젠 내가 좀 실수했다. 잊어라”라고 말을 꺼낸 L은 자초지정을 설명했다. 알고 보니 회사에서 성과급을 돌연 지급하지 않겠다고 한 것이었다. 처음부터 회사는 성과급을 줄 생각이 없어보였다고 한다. 처음 세운 달성 목표가 거의 불가능해 보였기 때문. 하지만 그와 팀원들은 죽어라고 일했고, 불가능해 보이던 목표를 초과 달성하게 됐다. 그 때 회사의 태도는 돌변했다. 경기가 갑자기 어려워졌기 때문에 성과급을 지급할 수 없다고. 하필이면 성과급을 달성한 직후에 그런 통보가 오다니. L과 팀원들은 허탈해졌다. 하지만 ‘회사가 어려우니’로 시작해서 ‘모두가 어려움을 분담하자 어쩌고 저쩌고’로 끝나는 회사의 말을 거부할 수 없었다. 결국 그 날 팀원들이 술을 먹고 만취한 L이 내게 전화를 걸었던 것이다.

성과급이 한 400만원 정도였다고 한다. L은 한 마디를 덧붙였다. “난 회사가 어렵고 하면 어쩔 수 없다고 생각은 해. 근데 우리 회사 회장 지난 해 수익이 80억이래. 난 80억 있으면 10억 정도 줄어도 괜찮을 것 같은데 80억 가진 사람들 마음은 그렇지 않은가 보더라. 80억에서 조금만 떼어주면 우리 팀원들한테 성과급 줄 수 있는거 아니냐?” L은 한숨을 내쉬었다. 길고 진했다. 난 실제 L의 회장이 80억원을 버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너무나 익숙한 이야기였다. 자본가와 노동자의 임금 격차는 모든 사람에게 당연한 이야기가 되어버렸다. 노동자가 월급 조금 올리려고 집단행동하면, 곧바로 해사행위, 이기적인 행동으로 낙인찍힌다. 경영자에겐 높은 위험부담이 있으니, 또 그가 애초 자산을 투자했으니 더 많은 월급을 받는다고 치자. 하지만 이를 고려한다해도 현재의 분배구조는 쉽게 납득되지 않는다. 크루그먼의 <미래를 말한다>를 보면, 경기호황이 끝나가던 시절 GM의 CEO였던 찰스 존슨이 현재의 화폐가치로 환산하면 약 430만불의 연봉을 받았다는 내용이 나온다. 당시 찰스 존슨의 월급은 여론의 강력한 비판을 받게 됐다. 하지만 현재 월마트의 리스콧 회장의 연봉은 2000만불이 넘는다. 물론 다른 CEO와 비슷한 수준이다. 그렇다면 노동자의 월급은 얼마나 변했을까. 자본주의는 모두의 이기심으로 인해 다 같이 발전할 수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자본주의 논리가 절대명제가 되어가는 지금, 어째 속은 기분이 든다. 시장도 커지고, 사회도 발전하는데, 왜 내 지갑은 점점 가벼워지기만 하는 것인가? 시장의 성장은 도대체 누굴 위한 성장인가?

얼마 전 존러스킨의 <나중에온 이사람에게도>를 읽었다. 기존의 자유주의 경제학을 비판하는 내용이었다. 자유주의 경제학이 누구던가. 양극화를 가져온 자본주의를 논리적으로 무장시켜 주던 지지자 아니던가. 이들은 항상 주장한다. 자본주의 시스템 아래라면, 어떠한 개입없이 최대한의 자유만 허용하면 논리적으로 모두가 발전할 것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러스킨은 경제학이 논리의 출발부터 잘못된 학문이라며 강력하게 비판한다. 감정의 영역은 엄정한 학문의 논리에선 철저히 배제된다. 경제학도 마찬가지다. 경제학은 말한다. 애정은 우발적이고 교란적인 요소지만, 진보에 대한 욕망은 한결같은 요소다. 그러므로 인간의 변덕스런 요소를 배제하고 인간을 욕심만 가득찬 사람으로 생각할 때, 올바른 법칙을 도출할 수 있다. 하지만 러스킨은 경제학의 출발에 딴지를 건다. 러스킨의 눈에 애정의 요소는 법칙에서 배제시키기엔 너무나 중요한 변수다. “사회문제에서 교란적인 요소는 한결같은 요소와 결코 같은 성질의 것이 아니다. 그 요소들이 추가된 순간 고찰대상인 생물은 본질적으로 완전히 바뀌어버린다. (중략) 영혼이라는 이 특수한 힘은 경제학자들이 모르는 사이에 그들의 모든 방정식 속에 하나의 미지수로 들어와 그들의 계산 결과를 모조리 그르쳐버린다.” 다시말해 러스킨은 경제학자들이 인간의 애정을 고려하지 않았기 때문에 잘못된 경제법칙만을 도출할 수밖에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실제로 구조조정이 한창이던 지난 IMF위기 때, 일본 기업의 사례들이 소개된 적있다. 합리적으로 고용의 탄력성이 높아야 회사는 더 높은 수익을 올릴 수 있다라는 신자유주의자들의 주장과 달리, 일본의 종신고용 시스템은 오히려 사원들의 충성도 진작, 업무의 다양화 등을 가져와 더 큰 이득을 가져왔다는 내용이었다. 여기엔 애정(감정)이란 요소가 중요한 변수로 작용한다. 나를 믿고 영원히 고용해준 회사, 그 회사를 위해 노동자는 평소보다 더 뛰어난 노동을 제공하게 된다. 러스킨이 평생 고용을 주장한 것은 물론 아니다. 다만 그는 애정이 어떤 방식으로든 경제학의 법칙에 중요한 영향을 끼침을 강조는 것이다.

애정을 강조하는 러스킨이 경제학에 도입하려는 요소는 바로 도덕이다. 그 동안 정부와 경제학은 상인의 가장 큰 목적은 자기가 최대한 많이 갖고 이웃(고객)에겐 되도록 조금 남겨주는 것(이윤추구)라고 말한다. 하지만 러스킨은 오히려 상인의 목적은 국민들에게 물자를 공급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때문에 러스킨은 주장한다. “상인은 자기가 파는 물건의 품질과 그것을 획득하거나 생산하는 수단을 철저히 이해하고, 물건을 완벽한 상태로 생산하거나 획득하여 그것을 가장 필요로 하는 곳에 가장 싼 가격으로 분배하기 위해 모든 지혜와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어차피 무수한 변수가 작용하는 경제 현실에서 어떤 행동 방침이 어떤 결과를 초래할 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하지만 어떤 행동이 올바르고 올바르지 않은 행동인지는 알 수 있다. 러스킨은 경제학에 도덕적 요소를 가미해야, 모두가 함께 부자가 되는 법을 알려주는 학문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가끔 500원짜리 배추를 파는 시장, 무를 300원에 파는 시장 등이 TV에 화제로 소개되는 경우가 있다. 소비자 입장에서야 행복한 일이지만, 난 그런 방송을 볼 때마다 그 배추와 무를 짓기 위해 땀흘린 농부들의 눈물이 어른거린다. 결국 농부도 소비자도 만족할 수 있는 정도의 가격을 매기기 위해 노력을 해야 하는 것, 이것이 바로 도덕이 가미된 경제학일 것이다. 분배의 문제도 마찬가지다. 분배의 정의는 절대적인 교환에서 시작된다. 내가 1파운드의 노동력을 제공했으면 난 1파운드를 받아야 하는 것이다. 이는 1파운드의 빵을 50파운드의 빵과 교환하는 것은 정의롭지 못한 것처럼 당연한 말이다. 문제는 노동의 정확한 가치를 평가하는 일. 물론 애매하다. 하지만 러스킨이 위에서 언급했듯, 무조건 싸게 사서 비싸게 파는 것이 도덕적으로 정당한 행위는 아니라고 이야기한 것처럼, 분배의 액수(임금) 역시 최대한 정당한 액수에 도달하기 위해 모두 애써야 한다.

경제학이 소개한 자본주의는 요술같은 존재였다. 모두가 이기적으로 행동해도, 모두가 더 잘 살 수 있다는 획기적 원칙은 경제학과 자본주의의 위상을 높여주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자본주의와 경제학이 더 커진 지금, 도덕이 완전히 배제된 현실은 냉혹하다. 모두가 이기적으로 행동했더니, 좀 더 강하고, 영악하고, 재빠른 사람이 더 부자가 됐고, 경쟁에서 도태된 사람은 가난해졌다. 모두가 이기적으로 행동한 결과, 사회와 시장이 성장했는지는 몰라도 모두가 부유해지지 않은 것은 분명해보인다. 러스킨이 <나중에 온 이사람에게도>를 쓸 당시 영국은 산업혁명과 함께 엄청난 경제적 성장을 이뤄내고 있었다. 자본주의는 절대적인 선이었다. 하지만 자본주의의 이면에는 영국 시인 블레이크의 시에 나와있듯, 어린이들에 대한 노동 착취와 엄청난 부자와 극심한 빈자들의 양산이 있었다. 때문에 러스킨은 경제학이 결여한 도덕의 문제를 <나중에 온 이사람에게도>를 통해 제시했다. 결국 자본주의의 부도덕을 견디지 못한 사람들이 마르크스주의를 주창하고 등장했다. 그리고 신자유주의가 절대선인 지금, 또 다시 산업혁명 당시의 영국이 전 세계 도처에서 목격되고 있다. 한국도 예외는 아니다. 극단적인 양극화는 절대 자본주의를 지탱해주지 못한다. 가난에 대한 불만은 자연히 자본주의를 좀먹게 될 것이다. 난 자본주의가 더욱 건전하게 발전하길 진심으로 바란다. 무조건적인 평등주의나 공산주의의 도래는 더더욱 바라지 않는다. 러스킨은 ‘악마의 경제학’ 대신 ‘인간의 경제학’을 주장했다. 신자유주의가 절대 진리가 되버린 지금, 러스킨의 주장이 현실과 너무 동떨어진 것처럼 보일지도 모르지만, 오히려 지금 인간의 경제학을 주장한 그의 잔소리에 더욱 귀기울일 때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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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9-27 20:4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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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소년 22 - 정의의 시작, 완결
우라사와 나오키 지음, 서현아 옮김 / 학산문화사(만화) / 200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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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세기 소년>을 중간에 멈출 수 있는 사람이라면, 앞으로 자제력을 본인의 장점이라고 생각해도 무방하다. 동시에 8년이란 기간 동안 야금야금 나오던 <20세기 소년>의 단행본을 꾸준히 읽고 기다린 사람이라면, 고통을 인내하는 본인의 능력이 탁월함을 믿어 의심치 않아도 된다. <20세기 소년>은 중독성 강한 마약 같은 만화책이기 때문이다. ‘과연 친구는 누구일까’ 중독의 한 가운데에는 ‘친구’가 있다. 우라사와 나오키는 친구의 정체에 대한 궁금증을 극한으로 몰고간다. 때문에 멈추기가 어렵다. ‘친구’는 우라사와 나오키가 이야기를 전개해가는 핵심이며 독자의 흥미를 사로잡는 핵심 장치다. 때론 ‘친구’의 정체가 워낙 중요했기에 ‘친구는 OO다!’란 스포일이 퍼지기도 했는데, 온화하기로치면 으뜸가는 한 친구는 이러한 스포일에 대해 “내가 ‘범인은 절름발이다’, ‘브루스윌리스는 귀신이다’를 듣고도 웃은 사람이지만 ‘친구’의 정체에 대해선 절대 참을 수 없을 것 같아”라고 이야기하기도 했다. 
 


 하지만 <20세기 소년>을 완독한 후의 반응은 대부분이 ‘허망하다’다. 물론 우라사와 나오키의 잘못만은 아니다. 집착의 댓가다. 사실 ‘친구’의 정체는 일종의 추동장치다. 엄밀히 말해 나오키는 ‘친구’의 정체를 따라오면서, 독자들이 그가 펼쳐놓은 주변의 풍경들을 천천히 음미하길 바랐을 것이다. 그것이 <20세기 소년>의 올바른 독해법(이런게 있겠냐만은)이다.(라고 생각한다.) 때문에 마찬가지로 허망함을 느낀 나는 다시 <20세기 소년>의 1권을 집어들었다. 그리고 ‘친구’를 쫒다 놓친 주변 풍경을 다시 한 번 살펴보기로 결심했다. 결과는 놀라웠다. 우라사와 나오키가 만들어낸 풍경의 깊이는 심오했으며 크기는 웅장했다. 많은 사상가들의 생각이 응축되어 있는 고전에서나 발견할법한 장대한 광경이었다. <20세기 소년>은 니체에서 시작, 실존주의 철학가들을 거쳐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학자들이 경고해온 이성에 대한 맹종이 가져올 수 있는 디스토피아에 대한 이야기였다. 



 <20세기 소년>의 키워드는 두 가지다. 하나는 만박이라 불리는 만국박람회. 또 하나는 친구로 대표되는 우민당. 만화에는 끊임없이 오사카에서 열렸던 1970년 만국박람회(EXPO)가 등장한다. 오사카 만박은 선진국 진입에 대한 일본의 열망과 단기간 내에 급성장한 자국경제에 대한 과시의 표현이었다. 동시에 박람회엔 세계의 무한한 발전과 신세계 개척에 대한 인류의 파우스트적 욕망이 그대로 담겨있는 상징적인 공간이었다. 특히 전후 급격한 성장을 경험한 일본인들에게 이성은 서구에게 다가갈 수 있는 중요한 요소였고, 성장과 발전의 가치는 어떠한 비판 없이 숭상할 가치로 여겨졌다. 실제로 당시 6개월간 만박 방문자는 6,400만명에 달했다. 성장과 발전에 대한 일본인의 열망이 얼마나 강렬했음을 보여주는 한 단면이다. 하지만 나오키는 이 시기 일본을 휩쓸던 발전에 대한 열망에서 20세기 초 서구에서 불었던 이성광풍의 어두운 그림자를 발견했다. 아도르노가 “완전히 계몽된 지구에는 재앙만이 승리를 구가하고 있다”고 말했듯, 실제로 유럽에선 이성이 뒷받침된 과학의 발전이 엄청난 살상무기의 탄생을 가져왔고, 사회를 계몽하던 이성은 인종대학살이란 광기로 변모했다. <20세기 소년>의 ‘친구’는 어두운 이성의 대변자다. 1970년 만박에 사로잡힌 ‘친구’는 자신의 이성을 어떠한 백신도 막아낼 수 없는 완벽한 질병 바이러스 개발에 사용한다. 가치판단이 완전히 사라진 도구화된 이성이 불러온 재앙의 모습이 <20세기 소년>에 등장한 암울한 ‘친구’의 세상이다. 



 성장과 발전에 대한 열망, 그리고 이성에 대한 무비판적 수용엔 광기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19세기 중반 일본에선 서구화(합리적 이성을 토대로 한 서구의 발전을 답습하는)에 대한 강렬한 열망으로 메이지유신이 이뤄진다. 하지만 당시 메이지유신의 결과, 국가는 급격하게 성장했지만 일본 노동자들은 더욱 궁핍한 삶을 살게 된다. 서구의 발전을 모델로 삼은 일본에게 서양의 제국주의 역시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여졌고, 이성에 내재해있던 팽창에 대한 욕구는 일본 군국주의에 대한 파시즘으로 이어지게 됐다. 만국박람회에서 우라사와 나오키가 이성에 대한 맹종의 어두움을 발견했다면, 우민당은 그 어두움이 어떻게 구체화되는지를 보여준다. <20세기 소년>을 보면 ‘친구’는 새로운 바이러스로 전 세계를 공포에 몰아넣는다. 하지만 곧이어 그는 자신이 만든 백신을 이용 바이러스를 퇴치한다. 합리적 이성에 비춰봤을 때, ‘친구’는 이성이 가진 힘을 극명하게 보여준 존재였다. (이성의 힘으로 세계 멸망을 막은) 때문에 이성을 맹종하는 대중은 ‘친구’에게 열광하게 된다. ‘친구’는 자신에 대한 대중의 자발적 지지를 바탕으로 세계정복이라는 팽창주의적 야망을 드러낸다. 물론 세계 정복을 진행하는 부분에서는 사실적 정교함이 조금 떨어진다. 하지만 ‘친구’와 우민당이 세계를 지배하는 과정은 이성에 대한 맹종이 가져온 파시즘의 얼굴과 놀랍게도 닮아있다. 결국 우라사와 나오키가 그린 암울한 미래는 성장과 발전이라는 맹목적인 이성적 가치의 추구가 가져온 최악의 시나리오의 결과다. 
 


 우라사와 나오키는 만박의 대척점에 우드스탁을 놓는다. 윗도리를 벗어던지고 모두가 진흙바닥에서 한 몸이 되어 뒹구는 열기의 축제. 록이라는 이름으로 이성의 가운을 벗어던진 우드스탁의 공간은 고대 그리스 디오니소스 축제의 현대판이다. 이성에 억눌린 감성의 분출이야말로 이성에 대한 맹종이 가져온 어두운 미래를 밝게 만들 치유책이라고 나오키는 생각한 것이다. 모두가 기계적/아폴론적 인간으로 전락한 인류에게 그리스적 디오니소스의 힘을 불어넣어야 한다고 주장한 니체의 목소리와 맥이 닿아있다. 결국 ‘친구’를 치유한 것은 음악이었다. 논리적 설득이 아니었다. 때문에 ‘20세기 소년’, 켄지는 아직 디오니소스적 감성을 지닌 균형적 인간이었고, 나오키가 생각한 이상적인 인간상이었다. 물론 이러한 해석은 나오키가 펼쳐놓은 장대한 풍경의 일부분을 바라본 것에 불과하다. 나오키가 ‘친구’의 정체를 찾아가는 24권의 여정에서 워낙 많은 이야기를 곳곳에 숨겨놓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처음으로 돌아가보자. 처음이라면 누구나 ‘친구’의 단맛에 빠져들 수밖에 없다. 때문에 풍경을 놓칠 확률도 높다. 그러나 풍경을 놓쳤다면 다시 읽어야한다. ‘친구’를 둘러싼 미스테리는 <20세기 소년>이 보여줄 매력의 10%도 되지 않는다. 이제 온화하기로치면 으뜸가는 친구에게 다시 전해야 한다. “친구의 정체를 알게 된다 하더라도 네 온화함을 절대 잃지말길. 오히려 ‘친구’의 정체를 잃게되면 더 많은 것이 보이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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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징가 계보학 창비시선 254
권혁웅 지음 / 창비 / 200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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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삶은 복잡하다. 여기에 ‘단순명료’는 없다. 사소한 사건 하나도 구차한 여러 행동들이 누적되어 발생한 결과물이다. 사람들은 묻는다. ‘넌 왜 술집에서 일하니?’ ‘넌 왜 갑자기 떠난 거니?’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니’ 단답형으로 대답할 수 있으면 좋으련만, 인생은 대서사시의 파노라마 속에 펼쳐진다. 술집에서 일하는 이유를 얘기하기 위해 이틀 밤을 샐 수도 있으며, 갑자기 떠날 수밖에 없는 연유를 밝히기 위해 목이 쉬어라 떠들 수 있는 것이 복잡하면서도 구질구질한 우리네 인생의 모습이다. 인생 속 이야기엔 논리적 비약이 발생하기도, 소설의 작법으로 치면 고전 소설의 특징으로 치부되던 사건의 우연성이 남발되기도 한다. 때문에 가끔은 인생의 복잡함을 구구절절 풀어내는 일이 무의미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순이가 술 마시는 아버지를 피해, 매 맞는 엄마가 보기 싫어, 서울로 무작정 상경해, 며칠간을 굶주리다가, 이상한 아저씨들을 따라 밥을 얻어먹고, 잠을 자다 보니, 어느새 술집에 있었더라고 하는 것과 영희가 어렸을 적 욕정의 사고로 아이를 갖고, 집에서 내쳐진 채, 아이의 아버지에게도 버림을 받고, 돈을 벌기 위해 이것저것 하다가, 급전이 필요해 따라간 곳이, 술집이더라라고 하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을까. 그저 자신의 의지에 반해, 원치 않는 곳에서, 전혀 논리적이지 않은 이유로, 슬픈 인생을 살아야 하는 비극은 매한가지다. 그래서 가끔은 싹둑 잘라버리고 싶다. 인생의 구구절절함을, 복잡함을 잘라내고 단순명료하게 이야기하고 싶다.  



누군가에게 이야기를 전달하다보면, 강박관념이 발생한다. 저 사람이 내 말을 이해하고 있을까. 혹 내 말에 논리적 비약은 없을까. 강박관념이 커질 때마다, ‘그래서’와 ‘때문에’가 첨가되고 이야기는 점점 길어진다. 우리네 인생이 복잡한 탓이다. ‘그래서’와 ‘때문에’가 난무하는 이야기는 지루하다. 그 때 과감한 압축이 시도된다. 압축의 과정은 얇은 외줄을 타는 과정이다. 너무 압축해버리면, 이야기의 흐름이 끊어지고, 압축이 약하면 지루함이 어느새 끼어든다. 압축에 능하면 능할수록, 흐름을 방해하지 않는 선에서 큰 감정의 울림을 가져올 수 있다. 특히 삶을 이야기할 때 사용되는 압축은 비루하고 구차한 삶의 과정들을 긴 세월의 시간 속에 가둬버린다. 상대방은 압축된 이야기를 듣고 긴 세월 속에 들어있는 삶의 비극을 직접 꺼낸다. 그 과정에서 예측하지 못한 다양한 화학반응이 발생한다. 자신의 삶에 묻어있는 회한과 슬픔이 함께 녹아들어가기도 하며, 예전에 읽었던 소설의 한 자락이 살며시 오버랩 되기도 한다. 드라마 작가 지망생인 친구가 이야기해준 드라마 <모래시계>의 한 장면. 우석(박상원)은 태수(최민수)를 돕다가 시험시간에 늦어 사법고시를 못 치르게 되고, 결국 군에 입대한다. 시간이 한 참 흐른 뒤, 두 사람은 광주에서 재회한다. 자신 때문에 친구가 시험을 못 봤단 사실을 알게 된 태수가 우석에게 묻는다. ‘왜 그랬냐?’ 그에 대한 우석의 답. ‘밥은 먹었냐?’ 일상적이고 무덤덤한 답엔 두 사람 사이에 오갈 수 있는 모든 감정이 압축되어 있다. 구차한 다른 말은 적어도 그 순간엔 필요 없다. 그래서 가끔은 압축해버리고 싶다. 인생의 구구절절함과 명료함을 작은 상자 속에 넣어버리고 덤덤하게 얘기하고 싶다.  



권혁웅의 시집 <마징가 계보학>을 읽었다. 웃기고 슬펐다. 시 안엔 소시민들의 슬픈 삶이 웃기게 표현되어 있었고, 웃으면 웃을수록 슬펐다. 권혁웅은 성북구 삼선동에 사는 달동네 사람들의 인생을 이야기한다. 인생이 힘들어 조금씩 위로 올라온 달동네 주민들, 그들의 인생은 또 얼마나 파란만장한 희비극으로 가득할까. 하지만 권혁웅은 파란만장을 잘라낸다. 논리적으로 달동네 인생이 슬픈 이유를 풀어낸 들 달라지는 건 없고, 풀어낼 수도 없다. 담담한 어조로, 아니 재밌는 어투로 결과만 이야기한다. 잘라내고 압축한 공간엔 남루해서 슬픈 삶의 이야기가 숨어있다. 
 


‘누나는 자주 엄마에게 대들었다 엄마는 왜 그렇게 곰같이 살아! 나는 그렇게 안 살아! 눈알을 박아넣는 엄마 손이 가늘게 떨렸다 누나 손은 미싱을 돌리기에는 너무 우아했다 누나는 술잔을 집었다’ (독수리 오형제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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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중 나온 막내, 엄마! 하며 뛰어가다가

넓은 마당에서 회차하는 마을 버스,

뒷바퀴 밑에 들어갔습니다

기도하는 자세 그대로 들어갔습니다


첫눈이 왈랑왈랑

어지럽게 내리는 날이었습니다

바퀴 밑에서 떨리는 어린 딸, 눈처럼 고왔습니다

어린 막내딸, 김 집사님보다도 먼저

하나님 만나러 첫차를 타고 떠났습니다 (첫눈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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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주 아줌마는 20년 만에 집에 돌아와 자궁암으로 아기집을 들어냈다 요람이 무덤으로 변했다 그마저 도굴당했으므로 아줌마는 가출한 아들의 동가식서가숙을 수습할 수 없었다 서울역에서 을지로까지 아들은 깨진 도자기처럼 뒹굴었다 (무덤의 역사 중)  



얼마 전 브레이크가 고장 난 버스에 깔려 사람이 죽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교직원들이 밥을 먹고 차를 마시기 위해 이동하는 중이었다. 사고 직전까지 7명이 한 차에 모여 도란도란 수다를 떨었을 게다. 너 때문에 너무 좁다며 엉덩이 살 좀 빼라고 서로 놀려댔을 게다. 하지만 아무런 이유 없이 자연은 그들의 삶을 거두어갔다. 아니, 정비 안 한 브레이크가 7명을 죽였다. 하지만 브레이크 정비에 소홀했던 정비사도 누굴 죽이려고 한 건 아니었다. 인생이 만들어낸 비극이다. 어이없는 사건엔 슬픔보다 조소가 먼저 나온다. 우리 인생은 두 세 시간 떠들며 하소연하기엔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너무 많다. 피눈물 토하며 얘기하기엔 더 슬프고 억울한 일들이 넘쳐난다. 때문에 길게 얘기하면 힘이 빠지고, 엉엉 목 놓아 울어도 큰 슬픔을 표현할 수 없다. 그럴 땐 다 잘라버리고 싶다. 그냥 덤덤하게 얘기하고 싶다. 그게 부조리신이 내린 형벌에 우리가 대항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수단이 아닐까 싶다. 그리고 <마징가계보학>은 그 수단에 대한 좋은 지침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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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구의 추억 - 가슴 뛰는 그라운드의 영웅들
김은식 지음 / 이상미디어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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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때는 전국이 월드컵 열풍으로 뒤덮여 있던 2002년. 친구는 월드컵 열풍을 비판했다. 광기의 표출이란 것이었다. 친구는 광기가 안 좋은 힘과 결합할 때 벌어질 상황을 우려했다. 논리적으로 일리 있는 비판이었다. 하지만 친구의 말을 듣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반박을 할 수도 없었지만, 하고 싶지도 않았다. 얼마 전, 그 친구를 또 만났다. 우연히 야구 얘기가 나왔다. ‘야구에 관심도 없던 형이 어쩐 일이야?’ ‘야, 나도 이제 야구 잘 알아. <야구란 무엇인가>란 책도 읽었어’ ‘난 요즘 삼성이 잘 못해서 별로 관심없어’ ‘야, 삼성 야구는 재미없어. 전략이 없잖아’ 삼성팬으로 잠깐 발끈했다. ‘전략이 없다니, 뭐가 없어?’ ‘난 sk가 좋아. 한국에서 전략 있는 팀이 sk정도 밖에 더 있냐?’ 그 때 생각했다. ‘아~ 이 친구랑은 스포츠에 관한 얘긴 하지 말아야겠네’ 친구는 스포츠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야구를 좋아하는 것과 야구란 무엇인가를 아는 거는 전혀 다른 문제다. 야구, 더 나아가 스포츠는 논리적 이성의 영역이 아니다. 열광과 분노를 담고 있는 감정의 영역이다. 아무리 약하고, 재미없고, 더티한 경기를 한다고 하더라도, 그 팀이 내가 응원하는 팀이라면 가슴으로 무한한 애정을 쏟게 되는 비논리의 공간, 그곳이 스포츠의 장이다. 친구는 내가 생각하는 스포츠의 본질을 이해하지 못했고, 그래서 광기와 전략을 운운하고 있었다.  



내가 가장 비논리적인 감정의 동물로 변할 때는 야구 경기를 볼 때다. 한글을 간신히 깨우치던 시절, 이만수와 김봉연의 100호 홈런 경쟁을 보며 야구의 세계에 입문했다. 사자가 좋아, 삼성의 팬이 됐다. 그 때부터 시작된 야구사랑. 하지만 야구는 내게 즐거움보다는 분노를, 웃음보다는 눈물을 훨씬 많이 안겨줬다. 삼성은 최강 전력을 갖추고도 번번이 우승 문턱에서 좌절해야 했고, 삼성이 좌절하는 횟수에 비례해, 소년 야구팬의 상심을 날로 커져갔다. (야구팬의 분노와 슬픔은 박민규의 <삼미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에 가장 적확히 나타나있다.) 물론 인천 야구팬들에 비하면 내 좌절은 별거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삼성의 이미지는 묘했다. 전형적인 악역의 포스를 지닌 팀이었다. 막강한 자금력을 바탕으로 좋은 선수들을 휩쓸고, 우승을 위해 승부를 조작하기도 하는(일부러 져주고), 그러면서도 권선징악 드라마의 마지막 결말처럼 우승엔 실패하는 악역, 그게 바로 삼성라이온즈였다. 문제는 내가 악역을 사랑했다는 점. 때문에 인천 야구팬들과 같은 동정표도 얻을 수 없는, 그러면서도 페이소스를 가슴에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삼성 팬들이었다. 그렇게 야구에 매달린 지 20년이 넘었고, 꽤 긴 시간 동안 야구의 추억은 꽤 두꺼워졌다. 
 


강은식이 쓴 <야구의 추억>은 적어도 내겐 모르는 정보를 알려주는 책이 아니다. 오히려 옛 추억을 안주 삼아 술잔을 기울여주는 오랜 친구 같은 책이다. 책엔 82년부터 기록된 무수한 그라운드의 드라마들이 담겨있다. 물론 대부분의 드라마는 슬픈 결말이었다. (사실 해태 타이거즈의 팬이 아니고서야, 대부분 슬픈 결말이 아니었을까) 더블헤더에서 9개의 안타를 몰아치던 타격 천재가 현대로 트레이드 돼 초라하게 은퇴했다는 강기웅의 이야기, 강속구 투수로 데뷔 전부터 주목을 받았지만 불안한 제구력으로 온갖 비난을 받았다는 박동희의 이야기, 94년 인천 팬들의 눈물을 흘리게 만들었던 김홍집의 이야기, 선동열을 상대로 181구의 투혼을 보여줬던 박충식의 이야기까지. 강은식은 스포츠팬의 가슴 속에 담겨있는 응어리를 절묘하게 흔들어대며 야구의 추억에 담겨있는 이야기를 풀어낸다. 옳고 그름을 따지는 논리가 아닌, 좋고 싫고를 따지는 감정의 영역을 절묘하게 파고든다. 그래서 그는 기록 뒤에 숨어 있는 선수들의 드라마에 집중하고, 때로는 화려하지 않던 데드볼왕 김인식이나 전문 대타였던 김영직에게 애정을 쏟는다. 논리적으로 납득이 안 갈 수 있어도, 스포츠에 눈물을 흘려본 사람이라면 강은식이 쏟아내는 애정에 마음이 흔들린다. 물론 현재의 이야기가 없다는 점은 조금 아쉽다. 그 때 우리를 울렸던 선수들은 지금 어떻게 살고 있으며, 그 때를 어떻게 회상할까 궁금하다. 발로 뛴 취재가 좀 더 곁들어 졌다면, 그가 솜씨 좋게 풀어내는 감정적 이야기는 더 큰 힘을 발휘하지 않았을까 싶다. 전체적인 글들이 비슷한 패턴으로 반복된다는 점도 칼럼으로 볼 때와는 달리 아쉬웠다. 
 


아내는 내게 지금도 묻는다. 그렇게 괴로워 할 거면 왜 야구를 보냐고. 욕하면서, 화내면서 삼성을 좋아하는 이유를 모르겠다고. 답은 나도 모른다. 지금도 욕하면서 삼성을 응원하고, 경기에 질 때면 스포츠 기사 근처에 얼씬도 하기 싫다. 하지만 스포츠의 매력은 거기에 있다. 화내고 울고 하는 시간이 길면 길수록, 한 번의 승리가 주는 맛은 달콤하고 우승의 성취감은 크다. 침대 밑에서 엉엉 울었던 시간이 쌓이면 쌓일수록, 야구에 대한 열광이 커져갔던 것이다. 경기만 하면 이기고, 언제나 내 뜻대로 되는 공간이 스포츠였다면 그 누구도 지금처럼 열광하지 않았을 게다.(그런점에서 2002년의 우승이 두산을 4승 무패로 이긴 2005년의 우승보다 감격적이었다.) 1994년, 대학교 1학년이던 선배는 한국시리즈 경기를 보던 친구를 평소처럼 놀려대며 장난을 쳤다. 그 때 친구는 TV를 보며 눈물을 흘렸다. ‘OO야. 미안한데 오늘 만큼은 좀 혼자 가만히 있게 해줄 수 있겠니. 아니면 함께 조용히 TV 보던가’ TV에선 엘지와 태평양의 한국시리즈가 펼쳐지고 있었다. 10년이 넘는 세월동안 꼴찌를 전전하던 인천야구팀이 처음으로 한국시리즈에 올라간 순간. 분명 선배의 친구가 흘린 눈물은 10년 넘게 슬퍼하며 커져갔던 야구에 대한 열광의 결과물이었을 게다. 그래서 지금도 난 욕하고 화내고 슬퍼하며 야구를 본다. 그게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것이 야구의 영역이다. 내가 지금 화내고 슬퍼했던 감정의 순간은 그라운드에서 선수들이 펼친 동작 하나하나에 새겨져, 또 하나의 추억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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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0-02-19 11: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프로야구 개막 카운트다운에 해가 뜨고 지는 2월입니다!
야구 관련 도서를 즐겨 읽으시는 분들을 찾아다니다 들어왔습니다.:)
찌질하고 부조리한 삶은 이제 모두 삼진 아웃! 국내최초의 문인야구단 구인회에서 우익수로 뛰고 있는 박상 작가가 야구장편소설 <말이 되냐>로 야구무한애정선언을 시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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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구는 감정의 영역. 좋은 글에 동감하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