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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징가 계보학 ㅣ 창비시선 254
권혁웅 지음 / 창비 / 2005년 9월
평점 :
우리 삶은 복잡하다. 여기에 ‘단순명료’는 없다. 사소한 사건 하나도 구차한 여러 행동들이 누적되어 발생한 결과물이다. 사람들은 묻는다. ‘넌 왜 술집에서 일하니?’ ‘넌 왜 갑자기 떠난 거니?’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니’ 단답형으로 대답할 수 있으면 좋으련만, 인생은 대서사시의 파노라마 속에 펼쳐진다. 술집에서 일하는 이유를 얘기하기 위해 이틀 밤을 샐 수도 있으며, 갑자기 떠날 수밖에 없는 연유를 밝히기 위해 목이 쉬어라 떠들 수 있는 것이 복잡하면서도 구질구질한 우리네 인생의 모습이다. 인생 속 이야기엔 논리적 비약이 발생하기도, 소설의 작법으로 치면 고전 소설의 특징으로 치부되던 사건의 우연성이 남발되기도 한다. 때문에 가끔은 인생의 복잡함을 구구절절 풀어내는 일이 무의미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순이가 술 마시는 아버지를 피해, 매 맞는 엄마가 보기 싫어, 서울로 무작정 상경해, 며칠간을 굶주리다가, 이상한 아저씨들을 따라 밥을 얻어먹고, 잠을 자다 보니, 어느새 술집에 있었더라고 하는 것과 영희가 어렸을 적 욕정의 사고로 아이를 갖고, 집에서 내쳐진 채, 아이의 아버지에게도 버림을 받고, 돈을 벌기 위해 이것저것 하다가, 급전이 필요해 따라간 곳이, 술집이더라라고 하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을까. 그저 자신의 의지에 반해, 원치 않는 곳에서, 전혀 논리적이지 않은 이유로, 슬픈 인생을 살아야 하는 비극은 매한가지다. 그래서 가끔은 싹둑 잘라버리고 싶다. 인생의 구구절절함을, 복잡함을 잘라내고 단순명료하게 이야기하고 싶다.
누군가에게 이야기를 전달하다보면, 강박관념이 발생한다. 저 사람이 내 말을 이해하고 있을까. 혹 내 말에 논리적 비약은 없을까. 강박관념이 커질 때마다, ‘그래서’와 ‘때문에’가 첨가되고 이야기는 점점 길어진다. 우리네 인생이 복잡한 탓이다. ‘그래서’와 ‘때문에’가 난무하는 이야기는 지루하다. 그 때 과감한 압축이 시도된다. 압축의 과정은 얇은 외줄을 타는 과정이다. 너무 압축해버리면, 이야기의 흐름이 끊어지고, 압축이 약하면 지루함이 어느새 끼어든다. 압축에 능하면 능할수록, 흐름을 방해하지 않는 선에서 큰 감정의 울림을 가져올 수 있다. 특히 삶을 이야기할 때 사용되는 압축은 비루하고 구차한 삶의 과정들을 긴 세월의 시간 속에 가둬버린다. 상대방은 압축된 이야기를 듣고 긴 세월 속에 들어있는 삶의 비극을 직접 꺼낸다. 그 과정에서 예측하지 못한 다양한 화학반응이 발생한다. 자신의 삶에 묻어있는 회한과 슬픔이 함께 녹아들어가기도 하며, 예전에 읽었던 소설의 한 자락이 살며시 오버랩 되기도 한다. 드라마 작가 지망생인 친구가 이야기해준 드라마 <모래시계>의 한 장면. 우석(박상원)은 태수(최민수)를 돕다가 시험시간에 늦어 사법고시를 못 치르게 되고, 결국 군에 입대한다. 시간이 한 참 흐른 뒤, 두 사람은 광주에서 재회한다. 자신 때문에 친구가 시험을 못 봤단 사실을 알게 된 태수가 우석에게 묻는다. ‘왜 그랬냐?’ 그에 대한 우석의 답. ‘밥은 먹었냐?’ 일상적이고 무덤덤한 답엔 두 사람 사이에 오갈 수 있는 모든 감정이 압축되어 있다. 구차한 다른 말은 적어도 그 순간엔 필요 없다. 그래서 가끔은 압축해버리고 싶다. 인생의 구구절절함과 명료함을 작은 상자 속에 넣어버리고 덤덤하게 얘기하고 싶다.
권혁웅의 시집 <마징가 계보학>을 읽었다. 웃기고 슬펐다. 시 안엔 소시민들의 슬픈 삶이 웃기게 표현되어 있었고, 웃으면 웃을수록 슬펐다. 권혁웅은 성북구 삼선동에 사는 달동네 사람들의 인생을 이야기한다. 인생이 힘들어 조금씩 위로 올라온 달동네 주민들, 그들의 인생은 또 얼마나 파란만장한 희비극으로 가득할까. 하지만 권혁웅은 파란만장을 잘라낸다. 논리적으로 달동네 인생이 슬픈 이유를 풀어낸 들 달라지는 건 없고, 풀어낼 수도 없다. 담담한 어조로, 아니 재밌는 어투로 결과만 이야기한다. 잘라내고 압축한 공간엔 남루해서 슬픈 삶의 이야기가 숨어있다.
‘누나는 자주 엄마에게 대들었다 엄마는 왜 그렇게 곰같이 살아! 나는 그렇게 안 살아! 눈알을 박아넣는 엄마 손이 가늘게 떨렸다 누나 손은 미싱을 돌리기에는 너무 우아했다 누나는 술잔을 집었다’ (독수리 오형제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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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중 나온 막내, 엄마! 하며 뛰어가다가
넓은 마당에서 회차하는 마을 버스,
뒷바퀴 밑에 들어갔습니다
기도하는 자세 그대로 들어갔습니다
첫눈이 왈랑왈랑
어지럽게 내리는 날이었습니다
바퀴 밑에서 떨리는 어린 딸, 눈처럼 고왔습니다
어린 막내딸, 김 집사님보다도 먼저
하나님 만나러 첫차를 타고 떠났습니다 (첫눈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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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주 아줌마는 20년 만에 집에 돌아와 자궁암으로 아기집을 들어냈다 요람이 무덤으로 변했다 그마저 도굴당했으므로 아줌마는 가출한 아들의 동가식서가숙을 수습할 수 없었다 서울역에서 을지로까지 아들은 깨진 도자기처럼 뒹굴었다 (무덤의 역사 중)
얼마 전 브레이크가 고장 난 버스에 깔려 사람이 죽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교직원들이 밥을 먹고 차를 마시기 위해 이동하는 중이었다. 사고 직전까지 7명이 한 차에 모여 도란도란 수다를 떨었을 게다. 너 때문에 너무 좁다며 엉덩이 살 좀 빼라고 서로 놀려댔을 게다. 하지만 아무런 이유 없이 자연은 그들의 삶을 거두어갔다. 아니, 정비 안 한 브레이크가 7명을 죽였다. 하지만 브레이크 정비에 소홀했던 정비사도 누굴 죽이려고 한 건 아니었다. 인생이 만들어낸 비극이다. 어이없는 사건엔 슬픔보다 조소가 먼저 나온다. 우리 인생은 두 세 시간 떠들며 하소연하기엔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너무 많다. 피눈물 토하며 얘기하기엔 더 슬프고 억울한 일들이 넘쳐난다. 때문에 길게 얘기하면 힘이 빠지고, 엉엉 목 놓아 울어도 큰 슬픔을 표현할 수 없다. 그럴 땐 다 잘라버리고 싶다. 그냥 덤덤하게 얘기하고 싶다. 그게 부조리신이 내린 형벌에 우리가 대항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수단이 아닐까 싶다. 그리고 <마징가계보학>은 그 수단에 대한 좋은 지침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