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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소년 22 - 정의의 시작, 완결
우라사와 나오키 지음, 서현아 옮김 / 학산문화사(만화) / 2007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20세기 소년>을 중간에 멈출 수 있는 사람이라면, 앞으로 자제력을 본인의 장점이라고 생각해도 무방하다. 동시에 8년이란 기간 동안 야금야금 나오던 <20세기 소년>의 단행본을 꾸준히 읽고 기다린 사람이라면, 고통을 인내하는 본인의 능력이 탁월함을 믿어 의심치 않아도 된다. <20세기 소년>은 중독성 강한 마약 같은 만화책이기 때문이다. ‘과연 친구는 누구일까’ 중독의 한 가운데에는 ‘친구’가 있다. 우라사와 나오키는 친구의 정체에 대한 궁금증을 극한으로 몰고간다. 때문에 멈추기가 어렵다. ‘친구’는 우라사와 나오키가 이야기를 전개해가는 핵심이며 독자의 흥미를 사로잡는 핵심 장치다. 때론 ‘친구’의 정체가 워낙 중요했기에 ‘친구는 OO다!’란 스포일이 퍼지기도 했는데, 온화하기로치면 으뜸가는 한 친구는 이러한 스포일에 대해 “내가 ‘범인은 절름발이다’, ‘브루스윌리스는 귀신이다’를 듣고도 웃은 사람이지만 ‘친구’의 정체에 대해선 절대 참을 수 없을 것 같아”라고 이야기하기도 했다.
하지만 <20세기 소년>을 완독한 후의 반응은 대부분이 ‘허망하다’다. 물론 우라사와 나오키의 잘못만은 아니다. 집착의 댓가다. 사실 ‘친구’의 정체는 일종의 추동장치다. 엄밀히 말해 나오키는 ‘친구’의 정체를 따라오면서, 독자들이 그가 펼쳐놓은 주변의 풍경들을 천천히 음미하길 바랐을 것이다. 그것이 <20세기 소년>의 올바른 독해법(이런게 있겠냐만은)이다.(라고 생각한다.) 때문에 마찬가지로 허망함을 느낀 나는 다시 <20세기 소년>의 1권을 집어들었다. 그리고 ‘친구’를 쫒다 놓친 주변 풍경을 다시 한 번 살펴보기로 결심했다. 결과는 놀라웠다. 우라사와 나오키가 만들어낸 풍경의 깊이는 심오했으며 크기는 웅장했다. 많은 사상가들의 생각이 응축되어 있는 고전에서나 발견할법한 장대한 광경이었다. <20세기 소년>은 니체에서 시작, 실존주의 철학가들을 거쳐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학자들이 경고해온 이성에 대한 맹종이 가져올 수 있는 디스토피아에 대한 이야기였다.
<20세기 소년>의 키워드는 두 가지다. 하나는 만박이라 불리는 만국박람회. 또 하나는 친구로 대표되는 우민당. 만화에는 끊임없이 오사카에서 열렸던 1970년 만국박람회(EXPO)가 등장한다. 오사카 만박은 선진국 진입에 대한 일본의 열망과 단기간 내에 급성장한 자국경제에 대한 과시의 표현이었다. 동시에 박람회엔 세계의 무한한 발전과 신세계 개척에 대한 인류의 파우스트적 욕망이 그대로 담겨있는 상징적인 공간이었다. 특히 전후 급격한 성장을 경험한 일본인들에게 이성은 서구에게 다가갈 수 있는 중요한 요소였고, 성장과 발전의 가치는 어떠한 비판 없이 숭상할 가치로 여겨졌다. 실제로 당시 6개월간 만박 방문자는 6,400만명에 달했다. 성장과 발전에 대한 일본인의 열망이 얼마나 강렬했음을 보여주는 한 단면이다. 하지만 나오키는 이 시기 일본을 휩쓸던 발전에 대한 열망에서 20세기 초 서구에서 불었던 이성광풍의 어두운 그림자를 발견했다. 아도르노가 “완전히 계몽된 지구에는 재앙만이 승리를 구가하고 있다”고 말했듯, 실제로 유럽에선 이성이 뒷받침된 과학의 발전이 엄청난 살상무기의 탄생을 가져왔고, 사회를 계몽하던 이성은 인종대학살이란 광기로 변모했다. <20세기 소년>의 ‘친구’는 어두운 이성의 대변자다. 1970년 만박에 사로잡힌 ‘친구’는 자신의 이성을 어떠한 백신도 막아낼 수 없는 완벽한 질병 바이러스 개발에 사용한다. 가치판단이 완전히 사라진 도구화된 이성이 불러온 재앙의 모습이 <20세기 소년>에 등장한 암울한 ‘친구’의 세상이다.
성장과 발전에 대한 열망, 그리고 이성에 대한 무비판적 수용엔 광기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19세기 중반 일본에선 서구화(합리적 이성을 토대로 한 서구의 발전을 답습하는)에 대한 강렬한 열망으로 메이지유신이 이뤄진다. 하지만 당시 메이지유신의 결과, 국가는 급격하게 성장했지만 일본 노동자들은 더욱 궁핍한 삶을 살게 된다. 서구의 발전을 모델로 삼은 일본에게 서양의 제국주의 역시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여졌고, 이성에 내재해있던 팽창에 대한 욕구는 일본 군국주의에 대한 파시즘으로 이어지게 됐다. 만국박람회에서 우라사와 나오키가 이성에 대한 맹종의 어두움을 발견했다면, 우민당은 그 어두움이 어떻게 구체화되는지를 보여준다. <20세기 소년>을 보면 ‘친구’는 새로운 바이러스로 전 세계를 공포에 몰아넣는다. 하지만 곧이어 그는 자신이 만든 백신을 이용 바이러스를 퇴치한다. 합리적 이성에 비춰봤을 때, ‘친구’는 이성이 가진 힘을 극명하게 보여준 존재였다. (이성의 힘으로 세계 멸망을 막은) 때문에 이성을 맹종하는 대중은 ‘친구’에게 열광하게 된다. ‘친구’는 자신에 대한 대중의 자발적 지지를 바탕으로 세계정복이라는 팽창주의적 야망을 드러낸다. 물론 세계 정복을 진행하는 부분에서는 사실적 정교함이 조금 떨어진다. 하지만 ‘친구’와 우민당이 세계를 지배하는 과정은 이성에 대한 맹종이 가져온 파시즘의 얼굴과 놀랍게도 닮아있다. 결국 우라사와 나오키가 그린 암울한 미래는 성장과 발전이라는 맹목적인 이성적 가치의 추구가 가져온 최악의 시나리오의 결과다.
우라사와 나오키는 만박의 대척점에 우드스탁을 놓는다. 윗도리를 벗어던지고 모두가 진흙바닥에서 한 몸이 되어 뒹구는 열기의 축제. 록이라는 이름으로 이성의 가운을 벗어던진 우드스탁의 공간은 고대 그리스 디오니소스 축제의 현대판이다. 이성에 억눌린 감성의 분출이야말로 이성에 대한 맹종이 가져온 어두운 미래를 밝게 만들 치유책이라고 나오키는 생각한 것이다. 모두가 기계적/아폴론적 인간으로 전락한 인류에게 그리스적 디오니소스의 힘을 불어넣어야 한다고 주장한 니체의 목소리와 맥이 닿아있다. 결국 ‘친구’를 치유한 것은 음악이었다. 논리적 설득이 아니었다. 때문에 ‘20세기 소년’, 켄지는 아직 디오니소스적 감성을 지닌 균형적 인간이었고, 나오키가 생각한 이상적인 인간상이었다. 물론 이러한 해석은 나오키가 펼쳐놓은 장대한 풍경의 일부분을 바라본 것에 불과하다. 나오키가 ‘친구’의 정체를 찾아가는 24권의 여정에서 워낙 많은 이야기를 곳곳에 숨겨놓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처음으로 돌아가보자. 처음이라면 누구나 ‘친구’의 단맛에 빠져들 수밖에 없다. 때문에 풍경을 놓칠 확률도 높다. 그러나 풍경을 놓쳤다면 다시 읽어야한다. ‘친구’를 둘러싼 미스테리는 <20세기 소년>이 보여줄 매력의 10%도 되지 않는다. 이제 온화하기로치면 으뜸가는 친구에게 다시 전해야 한다. “친구의 정체를 알게 된다 하더라도 네 온화함을 절대 잃지말길. 오히려 ‘친구’의 정체를 잃게되면 더 많은 것이 보이나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