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 - 경제학 최대의 변수는 '애정'이다
존 러스킨 지음, 김석희 옮김 / 느린걸음 / 2007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밤 늦은 시간, 친구 L이 전화를 걸었다. L은 많이 취해있었다. 녀석은 다짜고짜 내이름을 부르며 하소연을 시작했다. “야, 우리 회사 고발 좀 해줘.” “야, 내가 기자도 아닌 데 어떻게 고발을 하냐.” “그럼 니 친구들한테 고발 좀 하라고 그래, 이 놈의 회사.” “무슨 일인데?” “내 참. 월급을 안 준다. 고발 좀 해줘” 속으로 ‘그런 회사는 넘치고 넘친다’라고 생각했지만 어쨌든 보도해주겠다고 친구를 달래고 전화를 끊었다. L은 웃고있었지만 목소리엔 아스라한 분노와 슬픔이 뒤섞여 있었다. 다음 날, 친구를 만났다. “어젠 내가 좀 실수했다. 잊어라”라고 말을 꺼낸 L은 자초지정을 설명했다. 알고 보니 회사에서 성과급을 돌연 지급하지 않겠다고 한 것이었다. 처음부터 회사는 성과급을 줄 생각이 없어보였다고 한다. 처음 세운 달성 목표가 거의 불가능해 보였기 때문. 하지만 그와 팀원들은 죽어라고 일했고, 불가능해 보이던 목표를 초과 달성하게 됐다. 그 때 회사의 태도는 돌변했다. 경기가 갑자기 어려워졌기 때문에 성과급을 지급할 수 없다고. 하필이면 성과급을 달성한 직후에 그런 통보가 오다니. L과 팀원들은 허탈해졌다. 하지만 ‘회사가 어려우니’로 시작해서 ‘모두가 어려움을 분담하자 어쩌고 저쩌고’로 끝나는 회사의 말을 거부할 수 없었다. 결국 그 날 팀원들이 술을 먹고 만취한 L이 내게 전화를 걸었던 것이다.

성과급이 한 400만원 정도였다고 한다. L은 한 마디를 덧붙였다. “난 회사가 어렵고 하면 어쩔 수 없다고 생각은 해. 근데 우리 회사 회장 지난 해 수익이 80억이래. 난 80억 있으면 10억 정도 줄어도 괜찮을 것 같은데 80억 가진 사람들 마음은 그렇지 않은가 보더라. 80억에서 조금만 떼어주면 우리 팀원들한테 성과급 줄 수 있는거 아니냐?” L은 한숨을 내쉬었다. 길고 진했다. 난 실제 L의 회장이 80억원을 버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너무나 익숙한 이야기였다. 자본가와 노동자의 임금 격차는 모든 사람에게 당연한 이야기가 되어버렸다. 노동자가 월급 조금 올리려고 집단행동하면, 곧바로 해사행위, 이기적인 행동으로 낙인찍힌다. 경영자에겐 높은 위험부담이 있으니, 또 그가 애초 자산을 투자했으니 더 많은 월급을 받는다고 치자. 하지만 이를 고려한다해도 현재의 분배구조는 쉽게 납득되지 않는다. 크루그먼의 <미래를 말한다>를 보면, 경기호황이 끝나가던 시절 GM의 CEO였던 찰스 존슨이 현재의 화폐가치로 환산하면 약 430만불의 연봉을 받았다는 내용이 나온다. 당시 찰스 존슨의 월급은 여론의 강력한 비판을 받게 됐다. 하지만 현재 월마트의 리스콧 회장의 연봉은 2000만불이 넘는다. 물론 다른 CEO와 비슷한 수준이다. 그렇다면 노동자의 월급은 얼마나 변했을까. 자본주의는 모두의 이기심으로 인해 다 같이 발전할 수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자본주의 논리가 절대명제가 되어가는 지금, 어째 속은 기분이 든다. 시장도 커지고, 사회도 발전하는데, 왜 내 지갑은 점점 가벼워지기만 하는 것인가? 시장의 성장은 도대체 누굴 위한 성장인가?

얼마 전 존러스킨의 <나중에온 이사람에게도>를 읽었다. 기존의 자유주의 경제학을 비판하는 내용이었다. 자유주의 경제학이 누구던가. 양극화를 가져온 자본주의를 논리적으로 무장시켜 주던 지지자 아니던가. 이들은 항상 주장한다. 자본주의 시스템 아래라면, 어떠한 개입없이 최대한의 자유만 허용하면 논리적으로 모두가 발전할 것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러스킨은 경제학이 논리의 출발부터 잘못된 학문이라며 강력하게 비판한다. 감정의 영역은 엄정한 학문의 논리에선 철저히 배제된다. 경제학도 마찬가지다. 경제학은 말한다. 애정은 우발적이고 교란적인 요소지만, 진보에 대한 욕망은 한결같은 요소다. 그러므로 인간의 변덕스런 요소를 배제하고 인간을 욕심만 가득찬 사람으로 생각할 때, 올바른 법칙을 도출할 수 있다. 하지만 러스킨은 경제학의 출발에 딴지를 건다. 러스킨의 눈에 애정의 요소는 법칙에서 배제시키기엔 너무나 중요한 변수다. “사회문제에서 교란적인 요소는 한결같은 요소와 결코 같은 성질의 것이 아니다. 그 요소들이 추가된 순간 고찰대상인 생물은 본질적으로 완전히 바뀌어버린다. (중략) 영혼이라는 이 특수한 힘은 경제학자들이 모르는 사이에 그들의 모든 방정식 속에 하나의 미지수로 들어와 그들의 계산 결과를 모조리 그르쳐버린다.” 다시말해 러스킨은 경제학자들이 인간의 애정을 고려하지 않았기 때문에 잘못된 경제법칙만을 도출할 수밖에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실제로 구조조정이 한창이던 지난 IMF위기 때, 일본 기업의 사례들이 소개된 적있다. 합리적으로 고용의 탄력성이 높아야 회사는 더 높은 수익을 올릴 수 있다라는 신자유주의자들의 주장과 달리, 일본의 종신고용 시스템은 오히려 사원들의 충성도 진작, 업무의 다양화 등을 가져와 더 큰 이득을 가져왔다는 내용이었다. 여기엔 애정(감정)이란 요소가 중요한 변수로 작용한다. 나를 믿고 영원히 고용해준 회사, 그 회사를 위해 노동자는 평소보다 더 뛰어난 노동을 제공하게 된다. 러스킨이 평생 고용을 주장한 것은 물론 아니다. 다만 그는 애정이 어떤 방식으로든 경제학의 법칙에 중요한 영향을 끼침을 강조는 것이다.

애정을 강조하는 러스킨이 경제학에 도입하려는 요소는 바로 도덕이다. 그 동안 정부와 경제학은 상인의 가장 큰 목적은 자기가 최대한 많이 갖고 이웃(고객)에겐 되도록 조금 남겨주는 것(이윤추구)라고 말한다. 하지만 러스킨은 오히려 상인의 목적은 국민들에게 물자를 공급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때문에 러스킨은 주장한다. “상인은 자기가 파는 물건의 품질과 그것을 획득하거나 생산하는 수단을 철저히 이해하고, 물건을 완벽한 상태로 생산하거나 획득하여 그것을 가장 필요로 하는 곳에 가장 싼 가격으로 분배하기 위해 모든 지혜와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어차피 무수한 변수가 작용하는 경제 현실에서 어떤 행동 방침이 어떤 결과를 초래할 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하지만 어떤 행동이 올바르고 올바르지 않은 행동인지는 알 수 있다. 러스킨은 경제학에 도덕적 요소를 가미해야, 모두가 함께 부자가 되는 법을 알려주는 학문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가끔 500원짜리 배추를 파는 시장, 무를 300원에 파는 시장 등이 TV에 화제로 소개되는 경우가 있다. 소비자 입장에서야 행복한 일이지만, 난 그런 방송을 볼 때마다 그 배추와 무를 짓기 위해 땀흘린 농부들의 눈물이 어른거린다. 결국 농부도 소비자도 만족할 수 있는 정도의 가격을 매기기 위해 노력을 해야 하는 것, 이것이 바로 도덕이 가미된 경제학일 것이다. 분배의 문제도 마찬가지다. 분배의 정의는 절대적인 교환에서 시작된다. 내가 1파운드의 노동력을 제공했으면 난 1파운드를 받아야 하는 것이다. 이는 1파운드의 빵을 50파운드의 빵과 교환하는 것은 정의롭지 못한 것처럼 당연한 말이다. 문제는 노동의 정확한 가치를 평가하는 일. 물론 애매하다. 하지만 러스킨이 위에서 언급했듯, 무조건 싸게 사서 비싸게 파는 것이 도덕적으로 정당한 행위는 아니라고 이야기한 것처럼, 분배의 액수(임금) 역시 최대한 정당한 액수에 도달하기 위해 모두 애써야 한다.

경제학이 소개한 자본주의는 요술같은 존재였다. 모두가 이기적으로 행동해도, 모두가 더 잘 살 수 있다는 획기적 원칙은 경제학과 자본주의의 위상을 높여주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자본주의와 경제학이 더 커진 지금, 도덕이 완전히 배제된 현실은 냉혹하다. 모두가 이기적으로 행동했더니, 좀 더 강하고, 영악하고, 재빠른 사람이 더 부자가 됐고, 경쟁에서 도태된 사람은 가난해졌다. 모두가 이기적으로 행동한 결과, 사회와 시장이 성장했는지는 몰라도 모두가 부유해지지 않은 것은 분명해보인다. 러스킨이 <나중에 온 이사람에게도>를 쓸 당시 영국은 산업혁명과 함께 엄청난 경제적 성장을 이뤄내고 있었다. 자본주의는 절대적인 선이었다. 하지만 자본주의의 이면에는 영국 시인 블레이크의 시에 나와있듯, 어린이들에 대한 노동 착취와 엄청난 부자와 극심한 빈자들의 양산이 있었다. 때문에 러스킨은 경제학이 결여한 도덕의 문제를 <나중에 온 이사람에게도>를 통해 제시했다. 결국 자본주의의 부도덕을 견디지 못한 사람들이 마르크스주의를 주창하고 등장했다. 그리고 신자유주의가 절대선인 지금, 또 다시 산업혁명 당시의 영국이 전 세계 도처에서 목격되고 있다. 한국도 예외는 아니다. 극단적인 양극화는 절대 자본주의를 지탱해주지 못한다. 가난에 대한 불만은 자연히 자본주의를 좀먹게 될 것이다. 난 자본주의가 더욱 건전하게 발전하길 진심으로 바란다. 무조건적인 평등주의나 공산주의의 도래는 더더욱 바라지 않는다. 러스킨은 ‘악마의 경제학’ 대신 ‘인간의 경제학’을 주장했다. 신자유주의가 절대 진리가 되버린 지금, 러스킨의 주장이 현실과 너무 동떨어진 것처럼 보일지도 모르지만, 오히려 지금 인간의 경제학을 주장한 그의 잔소리에 더욱 귀기울일 때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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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9-27 20:4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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