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는 법을 배우다
뤽 페리 지음, 임왕준 옮김 / 기파랑(기파랑에크리) / 2008년 1월
평점 :
절판


가슴이 착잡하고 먹먹한 한 주였습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죽음은 예상보다 큰 충격으로 다가왔습니다. 그의 죽음은 정치로 대변되는 민주주의의 이상이 효율성을 강조하는 경제 현실 앞에 무릎 꿇은 상징적인 사건이었거든요. 슬픔과 충격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커졌습니다. 정치인을 비롯하여, 일부 보수인사들의 과격한 주장이 연일 이어졌고, 정부 역시 시청 광장을 차단하며 분향 열기를 눌렀습니다. 가슴 한편에 슬픔은 커져갔지만, 세상은 그 슬픔을 함께 해주지 않는 것 같았습니다. 며칠 전 만난 한 기자는 현 상황을 이렇게 표현하더군요. “우리나라 사람들은 분명 큰 상처를 입었어요. 근데 그 큰 상처를 어루만져주는 사람이 우리나라엔 현재 없어요. 전직 대통령의 죽음은 분명 한국인의 집단적 기억에 큰 흉터로 남을 텐데, 현 정부는 그 슬픔을 도대체 보듬어 주지 않네요.” 맞습니다. 우리가 겪은 집단의식의 상처는 서서히 가슴 속 깊은 곳에 응어리지고 있었습니다. 격한 감정의 덩어리는 갈 곳을 찾지 못하고 내부에서 방황했습니다. 저 역시 지난 주말 느꼈던 슬픔은 좌절과 분노를 넘어 절망과 무력으로 치닫고 있었다. 그래서 영화 대신 책을 집어들었습니다. 가슴의 무력감과 답답함에 대한 출구가 책에 숨어 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뤽페리의 <사는 법을 배우다>를 선택했습니다. 정말 궁금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 지 말이죠.

한 보수 논객은 “노 전 대통령의 장례식에 세금을 하나도 쓰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후 쏟아지는 감정적 질책에 대해 그는 자신의 주장에 대한 논리적 반박은 없고 비난만 쏟아진다며 정정당당한 논쟁을 요구했습니다. 그는 논리를 요구한 것입니다. 이성으로 부딪혀 누구의 주장이 더 옳은 지 결판내고 싶어 했습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세상은 논리의 기반위에 세워진 왕국이 아니니다. 이성은 비논리와 우연 위에 세워진 왕국을 지탱하는 무기일 뿐이죠. 때문에 각자 다른 진실과 진리를 위해 저마다의 논리를 갈고 닦습니다. 싸움은 처절하게 이성적이고 논리적입니다. 하지만 그 이면엔 권력을 향한 의지만이 남아있을 뿐입니다. 논리로 이겼다고 해서, 그것이 세상의 진리를 명확히 드러내는 것은 분명 아니란 말이죠. 실제로 그 보수 논객의 논리는 명확했습니다. 또한 논리적으로 그와 일합을 겨뤄볼 수도 있겠죠. 하지만 머리가 아닌 가슴은 분명 ‘이건 아니다’를 외치고 있었습니다. 이는 분명 노 전 대통령의 죽음을 신격화하려는 움직임에서 나온 이야긴 아닙니다. 대통령의 죽음 앞에서도 누구나 어떤 얘기도 할 수 있는 자유가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분명 그의 발언은 슬픔을 겪고 있는 수많은 국민들의 가슴에 비수를 꽂는 폭력적인 언행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뤽페리의 <사는 법을 배우다>는 상당히 깊이 있는 서적이었습니다. 책에서 루소는 인간과 동물을 구분하고, 인간의 두드러진 특징으로 ‘완성가능성’을 제시합니다. 동물은 자연이 프로그래밍 한 상태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습니다. 반면 인간은 상식적으로 납득가지 않는 악행을 저지를 수도, 또한 상대의 자유를 보호하기 위해 자신의 자유를 희생할 수도 있는, 변화 가능한 운명을 지니고 있습니다. 루소는 인간의 이러한 특성을 ‘완성가능성’이라고 표현한 것이죠. 루소의 사상 위에 칸트는 독자적인 휴머니즘적 사고를 발전시킵니다. 이성을 가진 인간은 모든 인간을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 대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목적의 왕국을 주장한 것이죠. 칸트는 서로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단계로써 민주주의가 큰 의미를 지님은 물론, 민주주의를 더욱 발전시키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봤습니다. 하지만 칸트나 루소는 인간을 낙관적으로 바라봤습니다. 민주주의가 잘 실현되고 있다고 알려진 한국의 상황만 봐도 목적의 왕국은 너무나 먼 얘기 같거든요. 추모 열기를 보듬기 보다는, 슬픔의 열기를 두려워 해 서울 광장을 차단하는 정부의 모습을 보면, 마치 주인인 국민은 슬퍼서 펑펑 울고 싶은 데 정부는 마음껏 울 장소를 열어주지 않는, 오히려 우는 주인 옆에 와서 화를 돋우는 실없는 말을 꺼내기도 하는 우스운 상황이 벌어지는 것 같습니다. 민주주의는 이룩됐지만 과연 칸트나 루소의 시대에 비해 우리가 얼마나 더 이상향에 가깝게 다가가 완성됐는지는 의문입니다. 여전히 우린 주인이 아니고, 인간의 ‘완성가능성’은 요원해 보인다는 의미죠.

때문에 니체는 칸트나 루소가 세워놓은 민주주의의 이상향이 결국 중세의 신과 같은, 인간의 자유를 억압하는 또 다른 초월이자 허상이라고 주장합니다. 니체의 세계에 진리는 없습니다. 오직 무엇이 더 옳고 그른지에 대한 권력의 투쟁만 있을 뿐입니다. 논리는 그 투쟁의 무기이자 외연에 불과합닏. 휴머니즘 시대에 이성은 우리의 악을 억제하고 더 나은 세상을 만들어 줄 만병통치약으로 여겨졌지만, 니체는 이성의 허구성을 꿰뚫어보고 이성의 세계를 허물어버립니다. 분명 논리와 이성은 세계를 이루는 커다란 한 축에 불과할 뿐, 세상의 전부는 아닙니다. 때문에 니체는 아폴로로 대변되는 이성의 대척점에 디오니소스로 대변되는 감성의 지위를 복권시킵니다. 이성으로 설득시키는 작업은 분명 한계가 존재합니다. 오히려 감성적인 작업은 설득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때문에 니체는 논쟁이나 수사학보다는 음악 같은 예술이 더 우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실제로 우리 주변에서 말보다 강한 이미지를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업적을 논리적으로 풀어 쓴 기사보다, 그가 생전 불렀던 ‘사랑으로’라는 노래가 사람들의 마음에 큰 변화를 가져다주고요. 논리적으로 담배의 문제점을 파고 든 다큐멘터리에 무심한 흡연가도 감성적인 드라마 한 편에 행동의 변화를 주기도 합니다. 결국 세상을 완전히 이해하기 위해선 감성의 영역이 세상의 절반임을 알아야 합니다. 물론 그렇다고 팩트와 논리가 중시되는 언론의 영역에 감성과 주관이 넘실돼야 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논리와 이성에 대한 맹신, 더 나아가 논리적으로 정당하고 옳기만 하다면 전혀 문제가 없다는 식의 생각은 위험함을 주장하고 싶은 겁니다. 분명 국민들은 노무현 전 대통령의 죽음을 보며 감성적인 울분과 슬픔을 경험했습니다. 그 사람에게 논리적으로 ‘국민 세금을 쓰지 말자’란 주장은 설득이라는 효용 면에서 봐도 비효율적입니다. 보수 논객의 주장대로 대통령이 죽었다고 해서 하고픈 말을 하지 말아야 하는 법은 없습니다. 다만 감성과 이성이 어우러진 세상의 속성을 이해한다면, 때와 장소에 맞는 발언이 존재함을 알아야 합니다. 그게 세상을 사는 법입니다.

<사는 법을 배우다>의 저자 뤽페리는 니체가 허물어버린 세계에 새로운 이상향이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물론 칸트나 루소가 주장했던 막연한 낙관의 세계로 돌아갈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고 이상향이 없어진 상태에서 ‘아모르파티(운명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는)’를 외치며 현실의 비극을 그대로 받아들이기도 힘듭니다. 여기서 뤽페리는 새로운 휴머니즘을 언급합니다. 진정한 상대의 이해를 통해 소통이 원활하게 이뤄지는 세상. 칸트가 주장했던 목적의 세계에 비하면 초라한 휴머니즘 왕국이지만, 분명 소통의 세계는 현세의 새로운 초월이 될 수 있습니다. 새로운 휴머니즘 이상향을 보며, 자연스레 장자를 떠올립니다. 이해를 통한 소통의 첫 단계는 낯섦과 차이를 받아들이는 일입니다. 때론 굳건하게 형성된 자신의 세계를 뒤로 미루고 다른 세계와 공존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소통의 왕국을 건설할 수 있습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죽음을 보고 아무렇지 않은 사람도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건 너무나 많은 사람들의 가슴 속에 노 전 대통령의 죽음이 상처가 됐다는 사실입니다. 수많은 사람이 눈물을 쏟았습니다. 그들의 눈물을 보듬어 주고, 그들의 기억 속에 오래 남을 상처를 쓰다듬는 과정이야 말로, 울고 있는 그들에게 다가가 삿대질을 하며 그들의 잘못을 지적하는 일보다 선행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제가 뤽페리의 <사는 법을 배우다>를 통해 배운 사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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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9-27 19:4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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