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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스테르담
이언 매큐언 지음, 박경희 옮김 / Media2.0(미디어 2.0) / 2008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나는 그들을 ‘헛똑똑이’라고 부른다. 아내의 표현을 빌리자면 ‘일로써는 확실한 정체성을 형성한 인간. 하지만 일의 세계에서 나오는 순간 텅 비어버린 감수성과 도덕성으로 상대방을 당혹케 만드는 인간’이 바로 헛똑똑이다. 주로 전문가 집단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판사, 검사, 변호사, 의사, 교수, 펀드매니저 등등. 헛똑똑이들은 자신의 전문 분야에 관해서 치열한 탐구열을 보이고, 그렇게 습득한 지식으로 높은 사회적 지위를 누린다. 하지만 비극적이게도, 그들 중 몇몇은 인간에 대한 이해도가 현저하게 떨어진다. 또한 자신의 전문 분야를 벗어나는 순간, 햄스터 수준의 감수성과 상식으로 주변 사람들을 경악시킨다.
헛똑똑이의 부족한 감수성과 도덕성은 사이코패스의 기질과 일맥상통한다고 볼 수 있는데, 실제로 사이코패스의 흉악범죄는 상대방 감정에 대한 몰이해에서 비롯된다고 한다. 게다가 사이코패스 중 일부만이 흉악범죄자가 되며, 대부분은 사이코패스적 기질을 활용해 업무에서 큰 성공을 거두는 경우가 많다. 인간에 대한 이해도가 햄스터 수준이다보니, 연대나 개혁 같은 사회적 의무에 관심이 있을 리 만무하다. 때문에 대부분의 헛똑똑이들은 개인에 대한 성공엔 강한 열망을 나타내면서도, 나와 다른 사람의 행복에 대해선 철저하게 무관심하다. 물론 PD나 기자와 같은 언론인도 예외는 아니다.
얼마 전 KBS에 현 대통령의 언론특보 출신 사장이 임명됐다. KBS는 공영방송으로, 정부 정책을 거침없이 비판할 수 있는 프로그램 자율성이 중요하다. 때문에 KBS 사장에게는 다른 어떤 기관의 수장들 보다 엄격한 정치적 중립성이 요구된다. 하지만 정부는 특보출신 사장 임명을 강행했다. 이에 KBS 구성원들은 강렬 반발하며 총파업으로 맞섰다............
라고 말해야겠지만, 놀랍게도 KBS는 조용했다. 급기야 총파업이 부결되는, KBS 노조 사상 초유의 일이 발생했다. 투표율은 80%가 넘었지만 반대율 역시 40%를 넘어섰다.
언론특보를 받아들이는 이유는 다양했다. ‘KBS가 언제 정치적으로 자유로운 적이 한 번이라도 있었냐’는 자조적 현실파. ‘개떡 같은 전임 사장 보다야 낫지 않겠냐’는 무대책 낙관파. ‘파업 같은 싸움보다는 프로그램과 리포트의 질에 더 집중해야 할 때’라는 모범생적 실리파. 하지만 모든 반대의 밑바탕에는 ‘싸운다고 뭐가 달라지냐’는 패배주의적 정서가 깔려있었다. 결국 KBS는 조용한 길을 택했다. ‘공영방송의 독립이고, 언론 자유고 다 필요 없다. 우린 프로그램만 잘 만들면 된다.’ 내 눈에 비친 KBS의 모습은 이랬다. KBS는 ‘일로써는 확실한 정체성을 형성한 인간. 하지만 일의 세계에서 나오는 순간 텅 비어버린 감수성과 도덕성으로 상대방을 당혹케 만드는 인간’의 전형이었다. 헛똑똑이들에게 언론 자유나 독립적인 공영방송 확립은 남의 문제인 것 같았다.
이언 맥큐언의 <암스테르담>은 두 명의 헛똑똑이에 관한 이야기다. 클라이브는 대중적으로 성공한 작곡가이며, 버넌은 일간지의 편집국장이다. 두 사람 모두 몰리라는 여성을 사랑했으며, 자신의 분야에서 직업적인 성공을 거뒀다. 하지만 두 사람 모두 일의 세계에서 벗어나는 순간, 진공 상태의 도덕성과 감수성을 마주하게 된다. 클리이브는 곡에 대한 영감을 유지하기 위해, 강간당하는 여성을 그냥 지나친다. 버넌 역시 적나라한 사진을 이용해, 자신과 정치적 입장이 다른 외무장관을 끌어내리고자 한다. 결국 이 사건들은 두 사람을 파멸로 이끌게 된다.
이안 맥큐언은 <암스테르담>을 쓰며, 연극을 염두에 뒀다고 말한 바 있다. “원래 이 작품에는 comi-tragedy라는 부제가 달려있었고, 그래서 다섯 장으로 구성되었죠.” 그래서인지 난 <암스테르담>을 읽는 내내 셰익스피어 비극을 떠올렸다. 그리스비극에서 인물들은 신이 부여한 운명을 거스르지 못하고 비극적 상황에 놓이게 된다. 하지만 셰익스피어 비극에서는 주인공의 결함이 비극을 초래하는 원인이 된다. <햄릿>에서는 우유부단함이, <오셀로>에서는 질투심이, <리어왕>에서는 어리석음이, 그리고 <맥베스>에서는 야심이 비극의 원인이 됐다. 그리고 이언 맥큐언은 오늘날 우리를 파멸로 이끌 결점으로 텅 비어버린 감수성과 도덕성을 지목한다. 이는 곧 헛똑똑이들의 부족한 도덕성과 감수성이 이미 현대 사회의 일상이 될 정도로 만연해있으며, 개인과 사회에 파멸을 가져올 만큼 위협적임을 말해준다. 결국 <암스테르담>이 보여주는 비극은 이언 맥큐언이 오늘날의 헛똑똑이들에게 보내는 일종의 경고다.
세상의 급류는 끊임없이 인간의 감수성과 도덕성을 마모시킨다. 자연히 나이가 들수록 감수성은 무뎌지고 도덕성은 모호해질 것이다. 세상과 조금씩 타협하게 된다. 그 때부터 세상은 조용해진다. 감수성과 도덕성의 부재는 곧 내부 에너지의 상실로 이어진다. “오전치고는 드물게 한가한 시간을 보내던 버넌 핼러데이는 문득 자신이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는 <암스테르담>의 문장처럼, 극단적으로는 모든 사람이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역설적인 상황에 놓일지도 모른다. 외부 사물을 보고도 느끼지 못하고, 외부 자극에도 분노하지 않는 사람이라면, 그 순간부터 존재하지 않는다고 봐도 무방하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시학에서 “비극은 연민(eleos)과 공포(phobos)를 환기시키는 사건을 통해 감정(pathema/pathos)의 카타르시스(katharsis, 정화)를 행한다.”고 이야기했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그리스 시대에나 통용될법한 이야기일 뿐, 현대인에게는 먼 나라 이야기다. 감수성이 무딘 헛똑똑이들의 연민과 공포는 어지간한 사건으로 꿈쩍하지 않기 때문이다. 다만 감수성이 완전히 퇴화된 사람이 아닌 사람에게 <암스테르담>을 권한다. 이언 맥큐언의 소설을 읽고 부족한 감수성과 도덕성이 가져오는 비극을 통해 감정의 정화를 경험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