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옛날에, 이 땅에는 거대한 공허함이 있었어요. 무엇가를 기다리고 있었죠.
채워지길 기다리며, 사랑을 줄 수 있는 누군가를...

아주 멋진 카피라는 생각을 한다. 공허함이 있었고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이야기..
태초의 카오스도 아니고 너무도 지극한 그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는 듯한 느낌을 강하게 받는다. 무엇일까? 족장의 혈통으로 태어났으나 족장이 될수 없다. 족장으로서의 영민함과 자질을 충분히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족장의 후계자로 키워지지 못한다. 그러나 무언가 되어야만 한다고, 무언가 할 수 있을거라고 믿는 그 커다란 생각속에서 자라나는 파이키아.
고래등을 타고 왔다는 부족의 선조 이름이 파이키아였기에 아버지는 그 아이에게 억지로라도 파이키아라는 이름을 지어준 채 떠났는지도 모를 일이지만 어쩌면 자기 자신이 받아들이지 못했던 책임과 의무에서 해방되고 싶었던 이유일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마을의 족장이었던 할아버지만큼은 파이키아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다. 여자라서, 여자이기 때문에 결단코 마을의 족장이 될 수 없었고 또한 지도자로서의 길을 갈 수 없다는  아주 단순한 전통에 의한 관념때문이다. 왜 안될까? 여자는 왜 안되는걸까?

자연을 소재로 한 영화이거나 동물 혹은 곤충들의 세계를 그려내는 영화속에는 작은 감동들이 하나씩은 자리를 차고 앉아 나 여기 있소~ 하고 말하고 있는 듯 하다. 이 영화속에서는 어린 소녀 파이키아와 고래의 의사소통이 감동을 전해주고 있다. 아무도 인정해주지 않는 아니 인정해 줄 수 없는 지도자로서의 의무를 선조가 타고 왔다던 고래만이 인정해 주고 또한 받아들이는 것은 아니러니다. 어쩌면 그리도 고집스러운지 우리의 유교적인 관습에 젖어 여자가 어딜 감히? 라고 호통을 치던  우리네 할아버지들과 아주 똑같다. 은근슬쩍 짜증과 화가 밀려온다.  족장으로서의 길, 지도자로서의 길을 원하지 않았음에도 그렇게 되야만 하는 운명을 지녔던 파이키아. 아버지의 차를 타고 떠나던 그 소녀에게 바닷속의 고래가 말을 한다. 떠나면 안된다고.  차를 세워요! 집으로 돌아가겠어요... 그러나 소녀의 귀환은 환영받지 못한다.

  


짜여진듯한 각본이지만 늘 그렇다.  배역과 배우가 얼만큼의 혼연일체가 되느냐에 따라 영화를 보는 재미가 한결 좋아지던가  아니면 별것 아닌것으로 전락하게 된다. 파이키아 역을 소화해내던 소녀 배우의 모습은 정말 가녀리다.  아마도 소녀가 소화해내야 할 배역의 의미를 더 커보일 수 있게 하기 위해서였는지도 모를 일이지만 고래등에 올라 타고 발을 차며 '가자'고 말하던 소녀는 이미 맑은 영혼의 파이키라와 닮아 있었던 듯 싶다.
자연속의 모든 것들은 우리와 동화되지 못하면 소통을 원하지 않는 듯 하다. 하나가 된다는 것은 그만큼 위대하다는 뜻일까? 그만큼 맑고 순수해야 한다는 뜻일까?  영화한편속에서 참으로 많은 것들을 찾아낸다.  죽어가는 자연을 살리고 싶어하는 이미지와 여자와 남자의 차별에 대한 말없는 항변과  어찌보면 인종적인 그 무엇까지도 담아내고 싶었던 듯 하다. 고집스럽던 할아버지의 그 무표정과 눈물을 흘리며 할아버지에게 바치는 웅변과 노래를 하던 소녀의 가녀린 이미지가 오버랩되어 온다.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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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학
이청준 지음, 전갑배 그림 / 열림원 / 2007년 3월
평점 :
절판


미리 알았던 정보가 너무 많았던 탓이었을게다. 이미 다가와 있던 느낌들이 너무 많았던 탓이었을게다.
진즉부터 읽고 싶었던 책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쉽게 손이 가질 않았다. 차일피일 미루기를 며칠인지...
이제는 읽어야지 하면서 책꽂이에서 뽑아들었을 때조차도 나는 별다른 감흥이 일지 않았다.
작가서문에 이어 서편제, 소리의 빛, 선학동 나그네라고 세편의 작은 분류가 있었지만 나는 왠지
그 옆줄에 붙어 있었던 남도 사람1, 남도 사람2, 남도 사람3 이란 제목이 더 눈에 들어왔다. 남도 사람이라...

오래전에 이미 영화로 만들어져 우리의 가슴속에 흔적을 남겼던 서편제에 대해서는 미리 겁부터 먹었다.
영화를 보지 않았던 까닭이기도 했지만 미리 알아버린 느낌때문에 책이 주는 감흥을 놓치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앞섰던 까닭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tv라는 매체를 통해서 보았던 영화의 한장면들이
자꾸만 눈앞에 아른거렸다. 오버랩되어오는 배우의 소리하는 모습이 책속에서 늘 나를 따라왔다.
남도 사람1 에서는 소리꾼이 생겨나는 과정을, 남도 사람2 에서는 소리꾼이 되어가는 과정을,
남도 사람3 에서는 소리꾼으로서 생을 마감하는 한사람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것 같았다.
서편제라는 영화는 단순하게 전체적인 이미지를 모티브로 빌려왔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랬구나..

소리꾼으로 키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누군가가 자신의 곁을 떠나간다는 사실을 받아 들일 수 없었던 아버지..
그렇게 곁에 두고 싶어하던 딸아이의 눈을 빌어 자신의 서글픔을 말하고 싶어했던 아버지는
끝내 그 아픔을 제대로 표현하지도 못한 채 떠나가버리고, 그 아픔을 고스란히 빛을 잃어버린 두 눈속에
간직해 두어야 했던 딸아이는 끝내 소리로서 그 고통을 잊으려 한다.
허리에 끈이 묶인채 무덤가에서 뜨거운 태양볕을 이불삼아 자라야 했던 소년의 서러움을 나는 알지 못하겠다.
멀어졌다 가까워지곤 하던 엄마의  웅웅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엄마의 존재감을 느껴야 했던 어린 아이의 뜨거운 그 무엇...
햇덩이를 빌어 보여주고 싶어했던 것은 아마도 가슴속에서 자라지 못한 채
하나의 응어리로 남아야 했던 사랑이 아니었을까?
손을 뻗으면 달려와 주어야했던 엄마의 그 마음에 대한, 혹은 울음울면 달려와 안아주겠지 했던
엄마의 그 따뜻함이 그리웠던 건지도 모를일이다...
끝없이 갈구했으나 끝내는 채워지지 못한 사랑의 한자락이 아닐까도 싶은데...
나는 왠일인지 의붓아버지를 처치하고 싶던 살해욕구를 머금은 그 뜨거운 햇덩이를 받아들일수가 없었다.

아버지가 다른 동생이 태어나고 그토록 다가오길 원하던 엄마의 존재는 사라져 버린채
자신의 의지와는 아무 상관도 없이 소리로써 유랑하는 유랑객이 되어버린 소년.
그 소년의 가슴속에서 자라던 증오와 아무런 힘도 없이 소리꾼으로 키워져야만 했던 소녀의 삶은
차라리 무채색으로 다가왔다.
사람의 한이라는 건 그런 식으로 누구한테 받아지닐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인생살이 한평생을 살아가면서 긴긴 세월 동안 먼지처럼 쌓여 생기는 것이라네.
어떤 사람들한텐 사는 것이 한을 쌓는 일이고 한을 쌓는 것이 사는 것이 되듯이 말이네....
자조적으로 내뱉듯 하는 사내의 그 말속에는 이미 한이 되지도 못한 사내와 누이의 삶이 들어 있었다.
누이를 향한 마음을 사랑이었다고 감히 말하지 못하겠다.
그것은 사랑과는 다른 그 어떤 의미를 이미 보여주고 있는 것 같았기에...
자기의 속내를 숨긴채로 서로가 마주했었던 시간들이 어쩌면
그들에게는 한으로 남았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지막으로 찾아갔던 선학동. 이미 예전의 모습을 잃어버린 선학동을 바라보면서
무너질듯한 사내의 발걸음이 못내 안스러웠다.
선학동 하늘에 떠도는 한마리 학으로 여기 그냥 남겠다고 말하던 누이나
그 누이의 행적이 분명코 머물렀을 것을 알았던 사내의 마음은
어쩌면 하나였을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사내는 진정 누이를 보낼 수 있었을까?


책장을 덮으면서 나는 궁금했다. 과연 영화를 통해서 보여주고 싶어했던 건 무엇이었을까?
소리라는 것을 빌어 한국적인 그 어떤 의미를 찾아주고 싶어했을까?
아니면 함께 할 수 없었으나 함께 하고 싶었던 한 사내와 누이의 같은 마음을 보여주고 싶어했을까?
하지만 나는 그 영화를 보고 싶지는 않다.
아직은 책속에 남아 있을 내가 느끼지 못했고 찾아내지 못했던 그 어떤 것들이 너무도 많은 것 같기에.
얇은 책 한권속에서 나는 너무 많은 시간동안 멈춰 있었던 것 같다.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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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엄마 어디 계세요?"
봄핀아이들 글, 최숙자 엮음 / 사분쉼표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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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날 아침 침대에서 눈을 뜬 나는 깜짝 놀란다. 내 몸에 뭔가 변화가 온 것임에 틀림없다. 그런데 이게 뭐지? 팔다리가 내 맘대로 움직이지 않아. 으악!.... 카프카의 <변신>이다.  열심히 살았는데 그야말로 가족을 위해 꼭 필요한 사람이었는데 어느날 문득 벌레로 변해버린 자신에게 돌아온 것은 차라리 없어졌으면 좋겠다는 가족의 냉대다.  그때 그때 달라요~하고 말하던 광고카피를 문득 떠올린다.  산다는 건 그야말로 그때 그때 달라질 수 밖에는 없는 것이리라.

내가 학창시절에 주변 어르신들께서 툭하면 하시던 말씀이 있다. 그래도 가방들고 학교 댕길때가 가장 좋은거이다. 아 느그덜이 무신 걱정이 있겄냐아.. 그때는 그 말씀이 얼마나 듣기 싫었는지 모른다. 맨날 새벽같이 일어나 콩나물시루같은 버스에 몸을 구겨넣으며 시작되는 하루들이 좋긴 뭐가 좋다고?  그놈의 시험은 왜그리도 자주 있는지 툭하면 시험공부를 해야하고 쯧쯧쯧.... 그랬던 내가 지금은 이렇게 말한다. 그래도 학교 다닐때가 가장 좋은거란다. 아니 너희들이 지금 뭘 고민하면서 사니? 그저 한가지 오로지 공부만 하면 되는거야. 아무 생각없이 그저 공부하나만 하면 되는데 그것도 싫으냐? 한다.  그 옛날의 어르신들께서 나에게 주셨던 말씀을 내가 지금 똑같이 하고 있다는 것은 무슨 이유에서일까? 그만큼의 세월이 그만큼의 인생을 깨닫게 해주신 스승이 되어버렸다는 말일게다. 아마도.

처음 "우리 엄마 어디 계세요?" 라는 책제목을 보았을 때 내가 생각했던 이미지와 책을 읽으며 느꼈던 이미지는 전혀 상반된 모습이었다. 아하! 그렇구나. 부모는 저편에 밀어두고서 오로지 자신들만을 생각하며 살아가고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나의 생각은 그야말로 부모세대다운 발상에 불과했던 거였다.
abracadabra... abracadabra.. abracadabra.... 신화속에 등장하는 하나의 신이지만 마술을 부리는 악마로 표현되어진다는 아프락사스의 신비로운 주문을 외어서라도 아이들은 처해진 지금의 쳇바퀴같은 현실속에서 벗어나고 싶어하는 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책속에 존재하는 수많은 아이들의 생각속으로 들어가고 싶어하는지도 모르겠다는..

그리스신화속에서 만났던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 이야기가 떠오른다. 케피소스 강가에 살면서 지나가는 나그네를 집에 초대한다고 데려와 쇠침대에 눕히고는 침대 길이보다 짧으면 다리를 잡아 늘이고 길면 잘라 버렸다던 프로크루스테스.. 이 이야기는 곧잘 회자된다. 언제? 자기가 세운 일방적인 기준에 다른 사람들의 생각을 억지로 맞추려는 아집과 편견을 비유할 때에.. 결국 아테네의 영웅 테세우스에게 자신도 똑같은 상태로 죽임을 당하게 되지만 우리는 어떤가? 지금 살아가고 있는 현실속에서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와 같은 생각과 행동을 스스럼없이 저지르고 있지는 않은가?

아이들은 말하고 있다. 자신들이 마치도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에 묶여 있는 것 같다고. 자신의 이상과 꿈은 저멀리로 내던져둔채 부모가 원하는 것, 혹은 우리의 교육현실이 원하는 길로만 가야하는 자신들의 모습을 그렇게 표현하고 싶어한다는 것을 책속의 아이들은 말하고 있음이다. 그래서 나는 뜨끔했었다. 우리 엄마 어디 계세요? 하면서 묻고 있는 것은 자신이 그렇게 힘겨운 시간속을 걸어가고 있을 때 함께 있어주지 못하는 엄마를 부르는 소리가 아니라, 자신을 위해 엄마의 모든 것을 버려야 하는 엄마의 존재성에 대하여 묻고 있었던 것이었기에..

책속에서 아이들은 묻고 있었다. 엄마, 우리들의 꿈은 모두 어디로 갔나요? 라고.
다시한번 생각하게 되는 우리의 교육현실이 안타까웠다. TV를 보지 못해서 아이들과 의사소통이 되지 않는다는 아들녀석의 말이 생각났다. 아직 어린 녀석임에도 불구하고 소통의 부재를 호소하는 것을 보고 이건 아니지 싶어서 TV보는 것을 허락했던 날이 있었던 까닭이다. 아이들이 좋아하는 거야 뻔하다. 게그나 코미디 프로그램...하지만 엄마들은 어떤가? 봐도 꼭 저같은 것만 본다고,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하나도 도움이 되지 않는 것만 본다고 잔소리에 또 잔소리를 하지 않는가 말이다.  그 많은 시간중에 단 한시간만, 컴퓨터를 하며 단지 한시간 머리를 식혔을 뿐인데.... 지겹다는 의미로밖에는 다가서지 못하는 엄마의 잔소리가 내포하고 있는 것은 진정 무엇일까 생각하게 된다. 나 역시도 잔소리꾼인 엄마이기에.. 오죽하면 엄마의 필살기는 잔소리라고 아들녀석이 말할까?

창공의 섬, 라퓨타에서 나는 지금 살고 있다고 말하던 아이가 책속에 있었다. 땅 위에 떠 있긴 하지만 해와 바람을 절대 보고 느낄 수 없는 곳. 라퓨타가 과학의 신비한 힘의 결정체였다면 내가 사는 이곳은 어른들의 작품이라면 작품이라고 아이는 말하고 있다. 잠시라도 해를 보고 싶어하는 우리의 마음을 어른들은 절대로 모를것이라고 아이는 말하고 있다. 그래서 탈출하고 싶다고.. 하지만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나 자신에게 떳떳해질 수 없다는 걸 용남할 수 없기에 그럴수 없다고 책속의 아이는 말하고 있다.  그야말로 서글픈 현실!  어찌 하겠는가? 그런 길을 가야 하는 아이들도, 그런 길을 걷게 해야만 하는 어른들도 모두 같은 배를 탔다는 것은 분명한 일이니 서로가 조금씩 양보를 해가면서 마음을 한데 모으는 방법밖에는 없을 듯 싶다.  이 아이들의 글이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 것일까,를 고민하기보다 그저 아이들의 이야기에 잠시 귀 기울여주는 어른의 입장에서 읽어도 좋을 듯하다던 엮은이의 말로 한가닥 위안을 삼아본다. 모쪼록 아이들의 마음이 그대로 어른들의 세상에 닿을 수 있기를 바란다던 엮은이의 바램에 나도 마음으로나마 힘을 실어주고 싶은 것이다. /아이비생각

아이들은 할 말이 많았다. 자신에 대해, 사회에 대해, 세상에 대해 그리고 어른들에 대해 해야만 하는 말들이 태산처럼 쌓여만 갔다. 그들은 우리와는 전혀 다른 별에서 온 아이들이었다. 금지된 장난에 대한 유혹과 세상의 어른들에 대한 편견은 서로의 간극을 더욱 멀어지게 만들기도 했다.

아이들의 생각은 무한궤도를 달려야만 하는 협궤열차처럼 위태로워 보였다. 그러나 나는 알고 있었다. 다만 그렇게 보일 뿐이었다. 우리 아이들은 그렇게 자신을 가혹하게 채찍질하면서 '학원'의 벽 앞에서 한없는 절망을 느끼면서도 스스로를 정화시켜나갈 줄을 알았다. <9쪽 엮은이의 글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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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를 이끈 아름다운 여인들
해리스 로젠블라트 지음, 최진성 옮김 / 눈과마음(스쿨타운)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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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처음에 이 책을 보았을 때 어쩌면 성경에 관한 색다른 맛을 느껴볼수도 있겠구나 싶었다. 성경속에 나오는 여인들의 이야기가 어디 하나, 둘뿐이겠는가 말이다. 이미 널리 알려져 있는 여인네들의 이야기가 색다른 모습으로 나를 맞이해주려니 생각했었다. 책을 받자마자 작가의 이력을 먼저 살펴 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심리치료사로서 지속적인 성경연구를 하는 사람이라고 나왔다. 왠지 흥미로울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어떤 것들을 보여주고 싶어하는지 마음이 급해지기 시작했다.

이 책속에서 만나지는 것은 그야말로 여자들의 이야기, 여자들의 삶, 여자이기에 겪어야 했던 것들, 그리고 여자였기에 가능했었던 것들을 보여주고 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여자의 일생이란 말에 담긴 의미는 거기서 거기처럼 느껴지는 건 왜일까? 같은 인간으로 태어나 여자와 남자라는 아주 단순한 분류기준 앞에서 왜 여자들은 그토록 가혹한 삶의 여정속에 자신을 버려야만 했을까?

굳이 종교적인 의미를 부여하지 않아도 될 성경속의 여인들 이야기. 그 많은 일화들 앞에서 문득 가슴이 답답해짐을 느낀다. 우리는 가끔 이런 말을 하게 된다. 이브가 선악과를 따먹던 그 순간부터 여자라는 원죄의 업보를 어찌할 수 없게 된 것이라고... 과연 그럴까? 이 책속에서는 의외로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여자의 모습으로 이브를 그려주고 있다. 뱀이 이브를 꼬여 선악과를 따먹게 하던 그때에 이브가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고 순간의 선택을 했었던 건 아니었다고 당당하게 비추어주고 있다. 많은 생각, 그 행위로 인하여 생겨날 문제들에 대해 곱씹어 본 후에야 선악과를 먹게 되었다는 해석과 이브가 주는 선악과를 아무 생각없이 덥석 먹어버리는 아담의 행위에 대한 해석은 나름대로 멋진 설명이란 생각이 들었다. 한가지 문제를 앞에 두고서 세심하게 생각하고 또 생각하는 여자의 특성과 그렇지 못한 남자의 특성을 비교해주고 있음이다. 여자들의 어머니이자 아브라함의 아내였던 사라의 선택은 자식을 낳지 못하는 여자의 힘겨운 마음속 고통을 대변해주고 있는듯 하다. 자손을 이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바로 옆 남편의 천막안으로 자신의 여종을 들여보낼때의 서러운 아픔을 남자들은 알까? 이미 오래전 우리네 생활속에서 만나지던 여인들의 고통과 무관하지 않음이다. 아마도 지금과 같은 시대였다면 어림없는 이야기이리라.

이 책속에서 만날 수 있는 많은 여자들의 이름이 낯설지는 않았다. 종교적인 의미를 떠나서 성경에 관한 혹은 성서를 이끈 사람들에 대한 궁금증으로 한때 성경이야기를 파고 들었던 적이 있었던 까닭에 대부분의 이야기들은 이미 알고 있어 새롭게 다가오지 않았으나 작가가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겉으로 들어나는 여인의 단순한 이야기가 아니었다. 강인했고 또한 용감했으며 모든 역경을 빠르게 극복해 나갔던 여인들의 숨은 공로를 파헤쳐주고 있었던 거다. 당시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세상이 아마도 남성 중심의 사회였을 것이다. 그런 남성중심의 사회속에서도 항상 자신의 의견을 솔직하게 표현하며 자신의 의지대로 살아갈 수 있었던 여인들의 이야기를 그려내고 싶었던 것 같다.

이삭을 만나기 위해 자신이 살던 곳에서 과감하게 따라나섰던 여인 리브가가  나이차이와 성격차이를 극복하기 위해 애를 쓰던 모습, 장자우선 원칙에 의하여 에서가 받아야 했을 이삭의 축복조차도 자신이 사랑하는 야곱에게 주어버린 그녀의 모습속에서 대리만족이랄까? 뭐 그런 상태를 살짝 엿보기도 한다. 그리고 그 야곱이 사랑했던 여인 라헬의 이야기를 통해 작가는 마음속의 사랑과 육체적인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되묻고 있다. 진정 사랑했으나 장인의 속임수로 인하여 라헬의 언니 레아를 본부인으로 맞아들이는 야곱이 자신이 진정 마음속 깊이 사랑했던 여인 라헬을 위하여 다시 7년이란 세월을 참고 인내하여 결국은 결혼을 하게 되는..... 라헬과 레아, 두 자매를 통하여 보여주고 있는 진정한 사랑에 대한 정의는 다시한번 생각해 볼만 하다. 과연 우리는 마음하나만 믿으며 얼만큼의 사랑을 줄 수 있는것인지... 하지만 나는 현실을 무시한 사랑이란 관념을 그리 좋아하지는 않는다. 서글프게도..

다말이나 다윗의 아내 아비가일, 밧세바, 세바 여왕등 처지를 비관하지 않고 지혜와 미모로써 스스로 자신의 인생길을 바꿔 자신이 원하는 삶의 길을 걸어가는 여자들의 모습을 이야기할 때는 시대를 초월한 여인들의 당당함을 볼 수 있어서 좋았다. 하지만 이 책속에는 그토록 당차고 멋진 여자들의 이야기만 있는 것은 아니다. 삼손을 유혹하여 처참하게 망가뜨리는 여자 들릴라의 이야기나 욕망의 끈을 잡고 끝도없이 못된 짓을 저지르는 악녀 이세벨의 이야기도 있다. 허황된 한순간의 욕망을 위해 자신을 버린 사람들의 이야기가 겹쳐져 안타깝기도 했던 대목이 아니었나 싶다.

등장인물들이 모두 성경속의 여인들이지만 작가는 성경을 단지 모티브로 삼았을 뿐이다. 그 성경속의 여인들을 빌려와 지금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의 모습과 아주 철저하게 분석하고 비교하여 주고 있다. 시대적인 배경을 떠나서 그야말로 자신의 정체성을 잃지않고 살았던 여인들의 모습을 만날 수 있었던 책이었다. 어쩌면 여자이기에 더없이 가깝게 느껴질 수 있었던 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해보게 된다. 개인적으로는 가장 먼저 다루었던 이브의 이야기에 많은 공감을 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어디에 있느냐.. 너희가 그 나무의 열매를 따 먹었느냐? 하고 신께서 물었을 때 아담이 대답했다. 여자가 그 열매를 주기에 먹었습니다. 이브도 대답했다. 뱀이 저를 꾀어서 따먹었습니다 하고.. 서로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모습에서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세상속에서 벌어지는 일들과 다를게 무엇이 있을까  작가는 말하고 있다. 결국 선택은 자신의 몫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잘못을 타인에게 뒤집어 씌우는 문제는 우리네 인간사회에서 끊임없이 발생하지만 사회나 개인이나 너 나 할 것 없이 모두 상대에게 책임을 전가하고 자신의 결정과 선택은 없었던 것인양 하는 우리들의 모습을 작가는 뼈아프게 힐책하고 있는것인지도 모르겠다. 일시적인 평화보다는 본질적인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나오미와 룻의 일화속에 보여지는 고부간의 사랑과 믿음은 지금 우리에게도 지극히 필요한 것들이 아닐까 싶다. 서로가 서로를 믿고 의지하며 따스한 마음을 주고 받을 때 진정한 평안의 시간을 나눌 수 있다고 작가는 말하고 있음이다. 알고 있다고 생각했었던 성서이야기들을 새롭게 만날 수 있어서 좋았다. 이런 관점으로 보며 생각할 수도 있는거구나 싶어 좋았다. 눈앞에 보여지는 하나의 단면만 보고 생각하기 보다는 그 속내까지 들춰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하지만 어디 그렇게 하기가 쉬운일인가 말이다. 그러니 너무 쉽게 말하고 너무 쉽게 판단할 일은 아니다. 책속에서 만났던 사랑과 그 사랑에 대한 질투, 유혹과 욕망에 갇혀버린 인간의 모습은 인정하고 싶지않은 우리들의 모습이기도 했다. 작가가 보여주었던 여인들의 삶을 통해 힘겨운 세상을 살아낼 수 있는 지혜를 배워볼 일이다.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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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을 찾아 떠난 소년
마티외 리카르 지음, 권명희 옮김 / 샘터사 / 2007년 5월
평점 :
절판


어른들이 읽는 동화쯤으로 생각했었다. 제목부터가 그랬고 소개글도 우화라고 써있었던 까닭이었지만 정말 그랬으면 하는 바램도 있었던게 솔직한 내 심정이기도 했다. 그런 장르라면 깊이 있는 이야기를 다룬다해도 어느정도는 무겁지 않게 받아들일 수 있는 때문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 책을 읽는 내내 책의 무게가 전해져와 힘겨운 느낌이 들었다. 단순히 소년에 비유되어진 모습을 한 어떤 존재에게서 얼핏 구도자의 모습을 발견하기도 했고, 혹은 귀의하기 위한 목적으로 길을 떠난 사람의 뒷모습이 보이기도 했다.

우리의 영원한 화두이기도 한 행복... 행복은 무엇일까? 도대체 행복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행복은 모습이 있기나 한 걸까? 행복은 우리가 만질 수 있는 그 어떤 물질로 만나지는 것일까? 아니면 형체도 없이 그저 바람같은 걸 찾아내기 위해 애를 쓰는 것은 아닐까? ... 어쩌면 영원한 화두가 될지도 모를 행복을 찾아서 길을 떠난 소년. 하지만 이 책에서 이야기하고 싶은 행복은 좀 더 깊은 의미의 행복인 것 같다. 세상속에 얽매인 행복이 아니라, 물질로써 만나지는 행복이 아니라 정신적으로, 우리 마음속에서 만나지는 행복을 이야기 하고 싶어하는 것 같다. 그래서 너무 무겁게 가라앉을 것만 같았던 책의 무게를 어찌하지 못한채 헉헉거리며 한장 한장을 넘겨가야 했다.

프랑스에서 태어난 작가 마티외 리카르는 원래부터 불교에 귀의한 사람은 아니었다. 분자 생물학 박사 학위를 받고 파스퇴르 연구소의 연구원으로 일했던 경력이 있었을만큼 그야말로 과학적인 지식의 소유자였다는 것이 나의 짧은 생각으로는 참으로 놀랍기도 했고, 왜? 라는 물음표를 갖게 만들었다. 하지만 그의 아버지가 철학자라는 소개글을 보면서 아하! 그럴수도 있는 일이었군, 했다. 참 신기하게도 불교를 생각하면서 파란눈의 스님을 연관짓는다는게 어렵기도 하거니와 흔하게 마주칠 수 있는 얼굴도 아닌 까닭이다. 그것도 물론 지독한 편견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렇다면 이 책에서 말하고 싶어하는 내면의 행복은 어떤 것일까? 소년을 한번 따라가보기로 했다.

히말라야 산맥에 있는 부탄왕국의 작은 마을에 데첸이란 소년이 살았고, 어느날 산악지대에서 은자로 지내던 외삼촌을 따라 눈의 왕국으로 길을 떠나게 된다. 소년이 길을 떠나게 된데에는 물론 구도자가 되기 위한 내성도 갖추어져 있었지만 그저그렇게 하루 하루를 살아가야 하는 현실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까닭도 있었음이다. 현실에 만족하지 못하고 늘 무엇인가를 갈구하고 찾아헤매이는 우리의 모습이 바로 그러하다는 말처럼 들리기도 했다. '금강석처럼 천복을 누리라'는 뜻을 가진 소년의 이름 데첸 도르체에서조차 우리네 욕심이 덕지덕지 묻어있는 것만 같았다.

글의 배경을 알고 싶어서 부탄왕국을 찾아보았더니 남부 아시아의 중국과 인도 사이 히말라야산맥 동쪽에 있는 나라라고 나온다. 정식명칭이 부탄왕국인데 북쪽은 히말라야산맥의 높은 산으로 중국의 티베트와 접하고, 동쪽에서 남쪽은 인도의 아삼지방, 서쪽은 네팔과...국토의 대부분이 산악지대로 평야가 거의 없다고 한다. 최근까지 인도의 보호 아래 있었으며, 티베트 문화권에 속하고 티베트와 같이 쇄국정책을 써왔다고 하니 글의 배경이 될만한 요소는 충분히 가지고 있음이다. 그야말로 순수하다는 말로써 표현되어져도 부담스럽지 않을 그런 나라일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한다.

외삼촌 잠양을 따라 나섰던 험난한 여행길을 마치고 드디어 은둔자들이 머물고 있는 눈의 왕국에 도착한 소년은 스승이 될 독덴 린포체를 만나게 된다. 린포체라는 건 아마도 고도의 수행끝에 어느정도의 단계에 오른 수행자를 이르는 말인듯 하다. 그리고 소년은 명상하는 것을 배운다. 드디어 수행의 길로 들어서는 것이다. 오직 끈기를 갖고서 수행하고 또 수행하라는 스승의 말을 가슴속에 새겨둔채로 혼자 산으로 들어가 은거를 하며 수행에 정진하게 된다. 동굴속에 홀로 남은 소년이 수행을 하는 과정은 좀 무리하게 보여지기도 하지만 이 과정에서 나는 혹시 책속의 소년이 작자의 모습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말처럼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었을테지만 책속에서 너무나도 많은 것을 한꺼번에 보여주려고 하는 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들었던 까닭이다.

집착을 버리는 것만이 옳다는 얘기는 아니라고... 단지 그 집착하는 마음이 우리 안에 악한 생각과 어리석음, 탐욕,허영, 질투심을 심어서 고통을 만들어 내는 원인이 된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일뿐이라던 스승은 영적 수행의 바탕을 이루는 연민에 대한 가르침을 주기도 한다. 선한 마음을 갖고 관대하게 행동하라는.... 소년을 향해 던져지는 스승 독덴 린포체의 말들은 부처님의 말씀 그대로가 아닌가 싶다. 어쩌면 독덴 린포체를 통해 부처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하는건 아닐까 싶기도 하고.... 그가 죽음에 이르는 장면은 가히 환타지적인 요소를 갖고 있음을 묘사하는 대목도 있으니.... 그렇다하여도 후광을 업고 무지게처럼 빛으로 산화되는 스승의 죽음을 아주 잠깐동안 바라보았던 소년의 가슴속에는 어떤 전율이 흘렀을까?

얼마전에 보았던 <쿤둔>이란 영화의 한장면이 생각났다. 양쪽 발에 족쇄를 채운채 엎드려 고행의 몸짓을 하던 한사람의 수행자를 보면서 달라이라마는 두손을 모아 합장으로 인사를 해 주었었다. 그 영화속에서뿐만 아니라 매스컴을 통해서라도 몇번을 본 적이 있었던 고행의 길.. 육체적인 고행과 정신적인 수행의 차이는 무엇일까? 과연 그들이 얻고 싶어하는 것은 무엇일까? 역자후기에서 보면 깨달음이란  살면서 마음을 조금씩 바꾸어 가는 게 아닐까 라는 말이 나온다. 고개를 주억거리고 있는 나를 느낀다. 그럴수도 있겠구나, 마음을 조금씩 바꾸어 간다는 게 말처럼 그리 쉬운 일은 아닐테니....

어찌되었든 소년은 은둔자의 생활을 끝내고 의젓한 청년이 되어 자신이 살았던 마을 꼴마로 되돌아온다. 많은 사람들의 환영을 받으면서.  매순간 이런 의문을 마음에 지니도록 하세요. '죽는 순간 아무런 후회도 없으려면 나는 어떻게 행동해야 할 것인가?' 라고요...그가 마을사람들에게 했던 지혜의 말씀은 다시한번 나를 되돌아보는 계기가 되어주기도 했다. 그리고 얼마후에 소년은 다시 길을 떠난다. 부탄에서 가장 위대한 성지들을 찾아 떠도는 순례자의 길을 택했던 것이다. 가족과 친구들이 곁에 있어 더없이 좋았고 즐거웠던 마을 생활을 버린 것은 농부가 된다거나 가정을 이룰 마음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앞서 말했던 것처럼 그는 어쩌면 현실속에 안주하지 않은 삶을 살고 싶었던 건지도 모를 일이다. 책 중간중간에 삽입되어진 그림들은 상상의 세계로 건너가는 징검다리 역할을 해주었던 것 같다. 나의 경우엔 종교적인 색채가 짙은 책의 늪에서는  무언가 의지할만한 것들이 필요한 순간들이 많다. 그런 나를 위하여 생각을 정리할 수 있도록 몇편의 삽화가 도우미 역할을 해주었던 것 같다.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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