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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학
이청준 지음, 전갑배 그림 / 열림원 / 2007년 3월
평점 :
절판
미리 알았던 정보가 너무 많았던 탓이었을게다. 이미 다가와 있던 느낌들이 너무 많았던 탓이었을게다.
진즉부터 읽고 싶었던 책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쉽게 손이 가질 않았다. 차일피일 미루기를 며칠인지...
이제는 읽어야지 하면서 책꽂이에서 뽑아들었을 때조차도 나는 별다른 감흥이 일지 않았다.
작가서문에 이어 서편제, 소리의 빛, 선학동 나그네라고 세편의 작은 분류가 있었지만 나는 왠지
그 옆줄에 붙어 있었던 남도 사람1, 남도 사람2, 남도 사람3 이란 제목이 더 눈에 들어왔다. 남도 사람이라...
오래전에 이미 영화로 만들어져 우리의 가슴속에 흔적을 남겼던 서편제에 대해서는 미리 겁부터 먹었다.
영화를 보지 않았던 까닭이기도 했지만 미리 알아버린 느낌때문에 책이 주는 감흥을 놓치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앞섰던 까닭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tv라는 매체를 통해서 보았던 영화의 한장면들이
자꾸만 눈앞에 아른거렸다. 오버랩되어오는 배우의 소리하는 모습이 책속에서 늘 나를 따라왔다.
남도 사람1 에서는 소리꾼이 생겨나는 과정을, 남도 사람2 에서는 소리꾼이 되어가는 과정을,
남도 사람3 에서는 소리꾼으로서 생을 마감하는 한사람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것 같았다.
서편제라는 영화는 단순하게 전체적인 이미지를 모티브로 빌려왔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랬구나..
소리꾼으로 키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누군가가 자신의 곁을 떠나간다는 사실을 받아 들일 수 없었던 아버지..
그렇게 곁에 두고 싶어하던 딸아이의 눈을 빌어 자신의 서글픔을 말하고 싶어했던 아버지는
끝내 그 아픔을 제대로 표현하지도 못한 채 떠나가버리고, 그 아픔을 고스란히 빛을 잃어버린 두 눈속에
간직해 두어야 했던 딸아이는 끝내 소리로서 그 고통을 잊으려 한다.
허리에 끈이 묶인채 무덤가에서 뜨거운 태양볕을 이불삼아 자라야 했던 소년의 서러움을 나는 알지 못하겠다.
멀어졌다 가까워지곤 하던 엄마의 웅웅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엄마의 존재감을 느껴야 했던 어린 아이의 뜨거운 그 무엇...
햇덩이를 빌어 보여주고 싶어했던 것은 아마도 가슴속에서 자라지 못한 채
하나의 응어리로 남아야 했던 사랑이 아니었을까?
손을 뻗으면 달려와 주어야했던 엄마의 그 마음에 대한, 혹은 울음울면 달려와 안아주겠지 했던
엄마의 그 따뜻함이 그리웠던 건지도 모를일이다...
끝없이 갈구했으나 끝내는 채워지지 못한 사랑의 한자락이 아닐까도 싶은데...
나는 왠일인지 의붓아버지를 처치하고 싶던 살해욕구를 머금은 그 뜨거운 햇덩이를 받아들일수가 없었다.
아버지가 다른 동생이 태어나고 그토록 다가오길 원하던 엄마의 존재는 사라져 버린채
자신의 의지와는 아무 상관도 없이 소리로써 유랑하는 유랑객이 되어버린 소년.
그 소년의 가슴속에서 자라던 증오와 아무런 힘도 없이 소리꾼으로 키워져야만 했던 소녀의 삶은
차라리 무채색으로 다가왔다.
사람의 한이라는 건 그런 식으로 누구한테 받아지닐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인생살이 한평생을 살아가면서 긴긴 세월 동안 먼지처럼 쌓여 생기는 것이라네.
어떤 사람들한텐 사는 것이 한을 쌓는 일이고 한을 쌓는 것이 사는 것이 되듯이 말이네....
자조적으로 내뱉듯 하는 사내의 그 말속에는 이미 한이 되지도 못한 사내와 누이의 삶이 들어 있었다.
누이를 향한 마음을 사랑이었다고 감히 말하지 못하겠다.
그것은 사랑과는 다른 그 어떤 의미를 이미 보여주고 있는 것 같았기에...
자기의 속내를 숨긴채로 서로가 마주했었던 시간들이 어쩌면
그들에게는 한으로 남았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지막으로 찾아갔던 선학동. 이미 예전의 모습을 잃어버린 선학동을 바라보면서
무너질듯한 사내의 발걸음이 못내 안스러웠다.
선학동 하늘에 떠도는 한마리 학으로 여기 그냥 남겠다고 말하던 누이나
그 누이의 행적이 분명코 머물렀을 것을 알았던 사내의 마음은
어쩌면 하나였을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사내는 진정 누이를 보낼 수 있었을까?
책장을 덮으면서 나는 궁금했다. 과연 영화를 통해서 보여주고 싶어했던 건 무엇이었을까?
소리라는 것을 빌어 한국적인 그 어떤 의미를 찾아주고 싶어했을까?
아니면 함께 할 수 없었으나 함께 하고 싶었던 한 사내와 누이의 같은 마음을 보여주고 싶어했을까?
하지만 나는 그 영화를 보고 싶지는 않다.
아직은 책속에 남아 있을 내가 느끼지 못했고 찾아내지 못했던 그 어떤 것들이 너무도 많은 것 같기에.
얇은 책 한권속에서 나는 너무 많은 시간동안 멈춰 있었던 것 같다. /아이비생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