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옛날에, 이 땅에는 거대한 공허함이 있었어요. 무엇가를 기다리고 있었죠.
채워지길 기다리며, 사랑을 줄 수 있는 누군가를...

아주 멋진 카피라는 생각을 한다. 공허함이 있었고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이야기..
태초의 카오스도 아니고 너무도 지극한 그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는 듯한 느낌을 강하게 받는다. 무엇일까? 족장의 혈통으로 태어났으나 족장이 될수 없다. 족장으로서의 영민함과 자질을 충분히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족장의 후계자로 키워지지 못한다. 그러나 무언가 되어야만 한다고, 무언가 할 수 있을거라고 믿는 그 커다란 생각속에서 자라나는 파이키아.
고래등을 타고 왔다는 부족의 선조 이름이 파이키아였기에 아버지는 그 아이에게 억지로라도 파이키아라는 이름을 지어준 채 떠났는지도 모를 일이지만 어쩌면 자기 자신이 받아들이지 못했던 책임과 의무에서 해방되고 싶었던 이유일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마을의 족장이었던 할아버지만큼은 파이키아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다. 여자라서, 여자이기 때문에 결단코 마을의 족장이 될 수 없었고 또한 지도자로서의 길을 갈 수 없다는  아주 단순한 전통에 의한 관념때문이다. 왜 안될까? 여자는 왜 안되는걸까?

자연을 소재로 한 영화이거나 동물 혹은 곤충들의 세계를 그려내는 영화속에는 작은 감동들이 하나씩은 자리를 차고 앉아 나 여기 있소~ 하고 말하고 있는 듯 하다. 이 영화속에서는 어린 소녀 파이키아와 고래의 의사소통이 감동을 전해주고 있다. 아무도 인정해주지 않는 아니 인정해 줄 수 없는 지도자로서의 의무를 선조가 타고 왔다던 고래만이 인정해 주고 또한 받아들이는 것은 아니러니다. 어쩌면 그리도 고집스러운지 우리의 유교적인 관습에 젖어 여자가 어딜 감히? 라고 호통을 치던  우리네 할아버지들과 아주 똑같다. 은근슬쩍 짜증과 화가 밀려온다.  족장으로서의 길, 지도자로서의 길을 원하지 않았음에도 그렇게 되야만 하는 운명을 지녔던 파이키아. 아버지의 차를 타고 떠나던 그 소녀에게 바닷속의 고래가 말을 한다. 떠나면 안된다고.  차를 세워요! 집으로 돌아가겠어요... 그러나 소녀의 귀환은 환영받지 못한다.

  


짜여진듯한 각본이지만 늘 그렇다.  배역과 배우가 얼만큼의 혼연일체가 되느냐에 따라 영화를 보는 재미가 한결 좋아지던가  아니면 별것 아닌것으로 전락하게 된다. 파이키아 역을 소화해내던 소녀 배우의 모습은 정말 가녀리다.  아마도 소녀가 소화해내야 할 배역의 의미를 더 커보일 수 있게 하기 위해서였는지도 모를 일이지만 고래등에 올라 타고 발을 차며 '가자'고 말하던 소녀는 이미 맑은 영혼의 파이키라와 닮아 있었던 듯 싶다.
자연속의 모든 것들은 우리와 동화되지 못하면 소통을 원하지 않는 듯 하다. 하나가 된다는 것은 그만큼 위대하다는 뜻일까? 그만큼 맑고 순수해야 한다는 뜻일까?  영화한편속에서 참으로 많은 것들을 찾아낸다.  죽어가는 자연을 살리고 싶어하는 이미지와 여자와 남자의 차별에 대한 말없는 항변과  어찌보면 인종적인 그 무엇까지도 담아내고 싶었던 듯 하다. 고집스럽던 할아버지의 그 무표정과 눈물을 흘리며 할아버지에게 바치는 웅변과 노래를 하던 소녀의 가녀린 이미지가 오버랩되어 온다.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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