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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랑이는 왜 바다로 갔나 ㅣ 생각의나무 우리소설 10
윤대녕 지음 / 생각의나무 / 2005년 9월
평점 :
절판
트라우마, 신체적인 손상 및 생명을 위협하는 심각한 상황에 직면한 후 나타나는 정신적인 장애가 1개월 이상 지속되는 질병... 뭘까? 뭘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과민반응, 충격의 재경험, 감정회피 또는 마비. 늘 불안스러워 하고, 주위를 경계하며, 잠을 잘 이루지 못하는 증세를 보인다. 충격을 다시 경험하는 환자의 경우에는 사건 당시와 같은 강도로 느끼는 기억, 꿈, 환각이 재연될 수 있다. 감정회피 또는 마비를 나타내는 환자는 충격이 일어났을 때의 감정·생각·상황 등의 기억을 피하려고 노력하며, 정상적인 감정반응은 소실된다...
쉽게 말하자면 감정이 부재중인 사람의 상태인 것 같다. 자신의 감정속으로 자신을 숨기는 것이 아닐까 싶기도 하지만 여기서 말하고 싶은 것은 그런류의 이야기는 아닌것 같은데.
호랑이는 왜 바다로 갔을까? 제목부터가 신비롭게 다가왔다. 도대체 숲의 제왕 호랑이가 왜 뜬금없이 바다로 갔을까? 갔다면 왜 가야했을까? 더듬거리면서도 어떤 감촉을 찾아내야만 한다고 생각했다.책속에서 흐느적거리는 느낌을 아주 희미하게 잡아 낼 수 있었던 것은 영빈과 해연이 과거속의 자신을 보여주기 시작했을 때가 아닌가 싶다. 현재를 살고 있으면서도 그들은 끝내 과거속에서 자신을 끌어내지 못하고 서로에게 다가갈 수 없도록 스스로에게 벽을 쌓아버리고 말았다. 어느 누구의 감정이입조차도 절대로 허락할 수 없다는 몸짓으로 그들은 그렇게 서로를 향한 마음에 빗장을 걸어두었다. 그래서 영빈은 바다로 갔다. 호랑이를 잡기 위해서. 80년대 386세대를 대표하는 얼굴로 세상을 살면서 결연히 일어섰던 정의로움앞에서 결코 무너져서는 안되는거라고 스스로에게 다짐을 했던 시대의 영웅처럼 살아왔던 지난날들의 초상. 아버지에게 꿈같았던 형을 자신과 같은 사람들의 손가락질로 인하여 죽음으로 몰아넣었다는 것을 인정할 수 없었던 시대적인 모순점을 뭉개며 최루가스에 질식될 것 같았던 그때부터 아마도 호랑이는 영빈의 가슴 한켠에서 자라고 있었을 것이다.
동병상련 同病相憐 ... 영빈과 해연은 그렇게 서로를 바라보았다. 아팠던 기억속에서 다시 아프고 싶지 않은 아니 다시는 아파하고 싶지 않다고 스스로에게 다짐하듯이 그렇게 서로를 바라보기만 했다. 며칠씩 집을 비울 때면 부담없이 집을 맡길 수 있는 그런 사이이면서도 서로의 앞쪽에 선을 그어놓고는 행여 넘어올까봐 가슴 졸이며 그렇게 서로를 바라봐야만 했다. 두사람이 처음 만났던 곳이 어디였는가를 말해주면서 그들이 왜 그렇게 살아야만 했는지에 대해 정당성을 부여해주고 싶었던 건 아니었을까? 아이러니하게도 그들이 처음으로 만났던 곳은 택시안이었다. 그것도 성수대교가 무너지던 날 바로 십여미터 앞에서 벌어졌던 그 끔찍한 사고를 목격하던 곳이 바로 그 택시안이었던 거다. 작가는 거기서 덧붙이고 있다. 모든 것들이 붕괴되는 시대였다고. 숨가쁘게 달려가기만 하는 모든 것들이 제자리를 찾기 위해서 붕괴되어져 가는 시대였다고. 그랬다. 그래서 그들은 구년만의 재회를 부정할 수 밖에는 없었으리라. 그 만남조차도 붕괴의 위험선상에 노출되어 있을지도 모른다고 그들은 지레 겁을 먹었다. 그래서 조심스러울 수 밖에 없었다는 거다.재회의 첫만남에서부터 그들이 서로에게 미묘함을 느끼기까지 그녀 해연이 끝내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것은 아마도 그들의 첫만남이 있었던 그 순간이었을리라. 영빈에게 자신을 보여주지 못한채 다가오지도 물러서지도 못하게 했었던 그녀의 질펀한 고통이 제대로 전이되어져 오는 듯 했다.
해연에게도 영빈에게도 가까웠던 존재들이 죽음이라는 의미로 사라져 갔다. 자살이라는 이름으로 자신의 존재를 없애버리고 말았다. 우연치고는 너무 기가 막힌 우연이다. 그들에게 다가갈 수 있는 하나의 매개체로 등장했던 히데코조차도 결국 자살이라는 기억만을 남겨둔채 떠나가 버리고 말았지만 히데코의 죽음은 그들에게 하나의 의식처럼 다가왔다. 넘을 수 없었던 선을 넘어버리는 의식으로.영빈이 제주로 떠났던 것은 어쩌면 자기 자신에게로 돌아가고 싶음이 아니었을까? 잃어버린 채 살아야 했던 정체성을 되찾고 싶었던 건 아니었을까? 바닷물에 낚시줄을 던져넣으며 고기를 낚아 올리던 영빈의 손끝에 전해져 오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그 바다에서 들어야 했던 호랑이의 울음소리는 아마도 영빈이 속울음으로 삼켜야 했던 절규가 아니었을까? 제주도의 아파트 베란다에서 결국 서로를 바라보았던 호랑이와 영빈의 대치상황속에서 안타깝게 주고 받던 몇마디의 말들이 아직도 눈가에 선하기만 하다. 또다른 나와 대화를 나눌 수 있다는 것은 어쩌면 그만큼 자기자신에게로 돌아가고 있다는 말도 될테니 말이다. 뭔지 간곡하게 전하려던 호랑이의 뜻을 알아차리진 못했지만 호랑이는 두 발을 들어 영빈의 어깨에 슬그머니 올려놓았고 거친 혀를 내밀어 영빈의 귀를 두어번 핥아댔다. 그리고 호랑이는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그 나중에 다시 갯바위위에서 바라보던 호랑이의 모습은 예전의 호랑이가 아니었음으로 이미 그들에게 화해의 시간이 다녀갔음을 암묵적으로 보여주고 있음이다.
대화의 부재, 소통의 불성실함, 원만하지 못한 인간관계.... 모두가 우리의 모습이다. 거울을 바라보듯이 어쩌면 우리가 서로를 바라보고 있는건지도 모를 일이다. 그런 복잡한 문제들을 해결해주기 위해서 느닷없이 갯바위뒤에 고양이를 숨겨 둔 작가의 마음은 또 무엇이었을까? 사랑을 원하고 관심을 원하고 베품을 원하던 고양이의 존재가 영빈의 마음속으로 한발자욱씩 들어오고 있음을 보았을 때 내게 불현듯 영빈을 보내야 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찾아왔다. 혹시 작가는 이 남자조차도 자살이라는 멍에를 지워준채 이 세상에서 데려가는 건 아닐까? 제발 그렇게 되지 말기를.... 그럴 즈음에 해연이 제주로 영빈을 찾아오고 마침내는 서로의 앞에 그어져 있던 선을 지운다. 서로의 과거를 보여주면서 변명아닌 변명의 시간을 갖는다. 그리고는 그 과거조차도 서로에게 필요하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렇게 그들은 함께 섬을 찾아가고 바다를 찾아가고 지나쳐갔던 시간들을 하나씩 찾아간다. 아픔으로 허우적거렸던 늪속에서 조금씩 조금씩 헤어남을 느낀다. 하나가 되어가는 두사람의 시간속으로 붕괴와 아픔이 아닌 화해와 이해의 순간들이 젖어든다. 앙금처럼 남아있는 삶에 대한 두려움조차도 그들은 이겨낼 것이다.
이튿날부터 영빈은 책상에 붙어앉아 글을 쓰기 시작했다. 사라져간 모든 날들의 꿈에 대해서. 치유되지 않는 고통에 대해서. 온갖 삶의 기대와 시대의 절망에 대해서.그 때 만났다 헤어진 사람들에 대해서. 무고하게 죽어간 이들에 대해서. 영빈은 1994년 10월 21일 아침 성수대교가 붕괴된 시점부터, 그 후 십 년동안 주위에서 일어났던 일들을 꼼꼼히 기록해 나갔다. 돌이켜 보면 그 시점부터 새로운 삶의 변화가 찾아와 있었다. 해연을 만난 것도 물론 거기에 포함돼 있었다. 또한 구 년 뒤에 다시 만날 일도 없었으리라. 그런데 그 두번의 만남을 두고 어떻게 아무 의미가 없다고 말할 수 있는가. 사람들이 흔히 우연이라고 말하는 우발적 만남에도 어느 정도의 필연은 내재돼 있게 마련이다. 그렇지 않고서는 그 불가해한 일들을 설명할 도리가 없다. 어쩌면 두 사람만이 공유할 수 있는 삶의 이면들이 만나기 이전부터 이미 내재돼 있었는지도 모른다. <390쪽>
윤회일까? 만나야 할 사람은 언젠가는 만나는 거라고. 그렇게 만나야 하는거라고. 영빈과 해연의 용기에 박수를 보내고 싶어졌다. 과감하게 자신의 틀에서 빠져나와 서로를 인정하기까지 얼마나 힘겨웠을까 싶기도 하다. "사 개월쯤 된 모양이예요"...그들의 삶속에서 새로운 시대가 잉태되고 있는 모습은 생각만으로도 아름다웠다. 고양이를 안고 서울로 올라가던 길에 영빈이 통영에 들러 해연의 상처를 보듬어 안는 모습은 왠지 눈물겨웠다. /아이비생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