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 천하의 경영자 - 상 - 진시황을 지배한 재상
차오성 지음, 강경이 옮김 / 바다출판사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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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李斯... 그가 누구인가를 궁금해 한 적이 있었던가?  진시황을 논할 때 그의 책략사였다던 이사, 그의 이름이 역사책에 거론되어진 적은 있었던가?  알 수 없다. 그늘에 가려져있다는 것은, 누군가의 그늘에 가려져 있다는 것은 그다지 좋은 일만은 아닐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늘에 가려 제 이름보다는 누군가의 이름을 앞세워 세상 모든 것을 쥐락펴락 할 수 있었다면 그것은 행복한 일일까?  이 책에서 말하고자 하는 존재 이사라는 사람을 통해서 본다면 그다지 행복한 일은 아니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진시황이 그의 분신이었는지 그가 진시황의 분신이었는지 그것이 중요한 것은 아닐게다. 단지 그들 서로의 분신 중 하나가 없어진다면 당연히 남아있던 존재도 사라져야 한다는 것뿐.. 그래서 보이지 않는 2인자는 서글플지도 모르겠다. 자신의 이름을 내세우지 못하는 인생을 사는 것보다는 차라리 적은 희생속에서 정을 느끼며 살아가는 것도 하나의 행복일거라는 생각을 하게 만드는 이사의 일생이 아니었나 싶기도 하고...

이사라는 인물을 통해 들여다 본 중국의 역사는 길고 장대하다. 한사람의 꿈이 다른 사람의 꿈과 함께 어울려 커다란 밑그림을 그릴 수 있다는 것은 분명 멋진 일이다.  역사속에 진시황이라는 커다란 이름을 남길 수 있게 되는 그들의 여정속에서 하나씩 영글어가는 꿈을 맛볼 수 있다는 것도 굉장한 일이다. 그 달콤함 앞에서 불로장생을 꿈꾸었던 진시황의 끝없는 욕심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역사라는 기록을 통하여 한줄로 엮어지던 그들의 일생.. 책을 읽으면서 천년만년 살았을것만 같다는 착각이 들었던 것은 왜일까?  진시황의 썩어가는 육신을 바라보며 생의 허무함을 느꼈던 이사가 자신의 말로에 대한 대책을 세워놓지 않았다는 것은 아이러니다. 운명이라면 받아들여야 한다는 뜻이었을까?

장장 600쪽에 달하는 책이 상,하로 두권이다. 두께에 놀라고 그 두께가 두배라는 사실에 눌렸던 이 책에 대한 첫인상.. 하지만 그다지 감동적이지만은 않다. 솔직하게 말한다면 조금은 지루하다. 신식과 고전을 오가며 퓨전형식을 취했지만 다가왔던 느낌은 그저 그랬다. 일단 커다란 축을 세워두고 그 축을 받치기 위한 잔가지들을 만든다음 그 잔가지들에서 자라난 잎새들이 바람에 흔들리는 것들을 하나씩 묘사한 듯한 그런 느낌이었다. 그러니 커다란 물결의 파고를 만나고 싶어도 만날 수가 없다. 정석대로 흘러가는 단조로운 강같다고나 할까? 그랬다. 내가 이 책을 읽으면서 혹은 다 읽고난 뒤의 느낌은..  하지만 중국 역사의 한 획을 그었던 부분에 대하여 세세하게 알 수 있게 된 계기가 되었다. 방대하지만 흘러가는 물줄기는 하나였으니 말이다. 

진시황이라거나 중국역사속의 진나라에 대한 것들을 알고 싶다면 이 책을 읽어도 무방할 듯 싶다는 생각이 든다. 만리장성을 축조하고 화폐나 도량형을 통일했으며 그 유명한 분서갱유에 대한 배경들을 자세히 들여다 볼 수 있게 도와주니 말이다. 초나라의 하급관리였으나 하찮은 쥐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통하여 자신의 꿈을 일으키게 되는 이사라는 사람에 대하여, 그리고 그 사람이 어떻게 중국역사를 뒤흔드는 손이 되었는지  그 과정만큼은 절절하게 그려져 있다. 위인전이라면 너무 장황한 느낌이 없지는 않기에 하는 말이다.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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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경래 : 세상은 백성의 것이다 샘깊은 오늘고전 9
작자미상 지음, 윤기언 그림, 김기택 글, 강명관 해설 / 알마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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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살아가면서 어디에 가장 많은 관심을 갖게 될까? 그리고 그 사람을 살아 숨쉬게 하는 원동력은 어디서부터 비롯되어지는 것일까? 어린시절부터 자신이 처한 상황에 대한 생각을 고려해 볼 줄 아는 깊이를 가졌다면 그것은 틀림없이 인물감일까? 자라면서 무언가에 얽매인 채 살아가야 하고 세상의 부조리에 대해 억눌린 심정으로 살아가야 한다면 아마도 누구나 가슴속에 저마다의 칼자루 하나씩은 쥐고 살아가지 않을까?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런 현실이라도 받아들이며 안주하느냐, 그런 현실을 박차고 일어나느냐의 차이점이다.

일개 무지한 백성이 나라를 위해 빼든 칼자루였기에 그토록 커다란 반향을 불러 일으켰을 것이다. 그것도 힘겨운 세상을 살아가는 백성들의 나라였다면 더더욱이나 그랬을 것이다. 누군가 나타나 이토록 불합리하고 부조리한 세상을 한번쯤 뒤집어 엎었으면 하는 바램을 한번쯤은 가져 보았을 것이다. 하지만 여기도 중요한 것이 하나 있다. 그들이 꿈꾸는 개벽이라는 것에는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개벽이 일어나긴 하되 단, 나에게는 아무런 피해도 없어야 한다, 세상이 바뀌긴 하되 나에게도 떨어지는 것이 많았으면 좋겠다.. 뭐 이런 것 말이다.

일전에 읽었던 <홍길동전>이 생각난다. 하늘의 부름으로 태어나는 홍길동의 탄생배경은 가히 신화적이다. 하지만 현실이 그것을 인정하지 않았던 탓에 그는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를 수 없는 처지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분연히 일어난 그가 외쳤던 것은 당연히 신분제도였다.  적자와 서자를 가리지 않아야 하며 설사 서자라해도 벼슬은 물론 자식으로서의 온전한 대접을 받아야한다는 그런 것들.. 평민이 아닌 양반이어서 가질 수 있는 것을 가질 수 있었음에도 가질 수 없었으니 그의 한서림이 더욱 깊었을까?  분신술을 썼다느니 율도국에 들어갔다느니 하는 것들은 하나의 가림막일 뿐이다. 그가 말하고자 했던 것은 그야말로 명백했으니 말이다. 현실이었다. 그가 처해있던 그 부조리한 현실..

그렇다면 지금 내가 말하고자 하는 <홍경래>는 어떨까?  그저 평범했던 백성이었다. 다르다면 어릴적부터 세상의 이치를 깨닫는 깊이가 깊었다고나 할까? ( 물론 인물들의 어린시절이야 누구나 다 똑똑하고 영리하다. ) 이제 가르칠 것이 없으니 집으로 돌아가라며 등 떠밀던 스승조차도 아비에게 이르기를 심히 앞날을 염려했다. 가르쳐주는 한줄의 글귀에서도 현실을 볼 줄 알았던 그를 염려했던 스승은 말했다. 똑똑하고 글재주가 남다르지만 말하는 것이 바르지 못하여 앞길이 크게 걱정됩니다... 홍경래가 열두살이었다고 하니 가히 신동이다. 하지만 앞에 말한 스승의 염려를 고려해 볼 때 원리원칙에 충실했던 그에게 부족했던 것은 수단과 널리보는 융통성이 아니었나 싶기도 하다. 원리원칙만 고집하다보니 생각이 고루할 수 밖에 없다.

양반이 아니면 출세할 수 없었던 사회적인 현실이 그의 앞에 장애물로 나섰을 때 그는 일어서야 한다고 생각했다. 홀연히 고향을 떠나 세상을 주유하며 삶을 힘겨워하는 백성들의 모습을 보았고, 그 원인을 파악했다. 무엇이 문제인가를 알게되니 그와 뜻을 같이 할만한 사람들을 수소문했다. 그리하여 일으키게 되는 '홍경래의 난'.. 조선시대 민란중에서 가장 규모가 컸다는 '홍경래의 난'은 지배계층에 대한 저항이었다. 그 많은 민란중에서 참으로 오랜시간을 들여 계획되어지고 실천에 옮기게 되지만 다른 민란들처럼 끝이 참 허무하다. 물론 거기에서 찾는 의의야 다르겠지만 말이다. 우습게도 나는 이런 생각을 종종 한다. 지금 세상에서도 저와같은 민란이 일어난다면 어떨까?  성공하면 '혁명'이오 실패하면 '반역'이라는 명분이 지금 세상에서도 통할까?  그 때나 지금이나 한치도 변하지 않는, 아니 변하고자 하지 않는 정치세력들을 보면 한번쯤 일어났으면 하는 마음이 앞서는 걸 보면 나도 지극한 평민이라는 것을 어찌할 수 없다.

민란이라는 말을 다시한번 생각해보게 된다. 순수한 농민저항이라고는 하지만 정말 그랬을까? 그렇지는 않았을 것이다. 세상에 대한, 자신의 현실에 대한 만족도가 그리 높지 않았거나 그것도 아니라면 그야말로 뜻이 있어 세상을 바꾸고자 했으나 힘이 없었던 사람들이 하나둘 모여들었을 것이다. 순수하다는 것은 그토록이나 힘겨운 일일테니 말이다. 세상이 진정 백성들의 것일까? 백성들이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단지 삶을 영위하는 곳, 그것이 세상이오 그곳에서 살아가야 하는 것이 백성은 아닐까? 뜻이 너무 커서 감히 바라볼 수 조차 없다면 너무 어렵다. 어린이나 청소년을 겨냥해 만들어지고 있는 우리의 고전시리즈가 참으로 고맙다. 단지 학습적인 면을 떠나서라도 우리의 고전을 읽어본다는 것에 커다란 의미를 부여해주고 싶은 까닭이다.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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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의 사생활
이응준 지음 / 민음사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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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라는 동요를 배우면서 자랐다. 그런데 지금은 그렇게나 많이 불리워지지 않는 듯 하다. 왜일까? 간단하다. 그만큼 시대가 많이 변했다는 뜻일게다. 좀 더 차갑게 말하자면 통일이라는 것에 정감어린 늬앙스가 사라졌다는 말도 될게다. 잃어버린 공간이 아니라 따로 또 같이의 공간으로 치부되어져버리는... 가끔 이런 생각을 해 보기도 했다. 통일이 되면 무엇이 좋을까? 과연 통일을 하긴 해야 하는 것일까? 그렇다면 통일이 되긴 되는 것일까?  간혹 호사가들은 동독과 서독의 통일이라는 거대한 물결을 거론한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통일을 했다는 것에만 촛점이 맞춰져 있다는 거다. 통일이 되기 위한 과정들이나 통일이 된 후의 부조리함이나 부적절함 내지는 부적응의 현실은 까발리길 꺼려하는 것처럼 보여지기도 한다.

나뉘었던 한 국가가 다시 하나가 된다는 것은 정말 아름다운 일일게다. 현실적인 느낌이 멀기만한 이야기지만 말이다. 왜 먼이야기일까? 반추해보자면 이렇다. '누가 이사람을 모르시나요'라는 노래가 온나라를 떠들썩하게 하고 기네스북에까지 올랐다던  헤어진 가족찾기 프로그램이 있었다. 그 당시 방송을 보면서 울지 않은 사람이 있었을까? 그렇다면 그들은 왜 울었을까? 헤어졌던 가족들의 만남에서는 행복과 불행이 함께 묻어 났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그들의 만남이 화면에서 그려질 때 그들의 눈물이 내 눈물샘을 자극했을 뿐이었다. 그들의 만남속에 있었던 행복과 불행을 함께 느낄 수 있어서 흘렸던 눈물은 아니었다는 말이다. 냉정하게 말해서...

책을 읽으면서 가장 먼저 떠올랐던 것은 조정래 작가의 <인간연습>이었다. 분단된 국가속에서 철저하게 버림받기 시작하는 이념의 환상들이 거기에 있었다. 허상과도 같았지만 그들에게는 버텨낼 수 있게 해주는 힘, 하나의 꿈같았던 그 이념속에서 뱀이 자신의 허물을 벗듯이 그렇게 훌훌 털어낼 수는 없는 일이었을게다. 주어진 현실을 인정하며 산다는 그 자체도 따지고 보면 쉬운 일은 아닐테니 말이다. 변화... <인간연습>을 읽으면서도 저멀리에서부터 일렁이며 다가오는 변화라는 물결을 바라보아야 했다. 그런데 이 책에서도 그 변화의 물결은 어김없이 밀려온다. 변화... 무엇에 대한?

아주 오래전 김진명 작가의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라는 책이 있었다. 그 책을 읽으면서 내심 놀랍기도 했고 긍정적인 응원의 메세지를 보내고 싶어했던 기억이 있다. 핵무기라는 절대적인 힘을 앞에 두고도 그 힘을 갖지 못하는 현실이 가상이 아닌 정말 현실은 아닐까 싶기도 했었다. 그런데 이 책을 읽으면서 그 책속의 현실이 가상이 아닌 현실처럼 또다시 내게 다가왔다. 충분히 그럴수 있는 일이라고, 준비되지 않은 이념의 통일은 있을 수 없다는 것에 대한 인정일지도 모르겠다. 21세기의 한국 작가가 상상할 수 있는 것들 가운데 가장 센 이야기를 가장 위험한 칼끝으로 점료해 내고 싶었다는 작가의 말이 왠지 깊숙하게 다가온다. 어쩌면 작가의 상상이 아닌 곧 다가올 미래처럼.. 옛날 같았으면 사상이 어쩌고 반공이 어쩌고 할지도 모를 소재가 아니었나 싶은 생각이 드는 것은 왜일까?

주인공 리강剛은 강하다. 이름처럼. 하지만 그는 그 강함의 이미지를 떨쳐내고 싶어했던 것 같다. 외로움속에 숨겨져 있던 강함.. 어느 누구도 이해할 수 없었던 것.. 너는 너를 죽일것이다라는 장군도령의 말처럼 자기 자신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당연한 일일것이다. 우회적으로 말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남과 북이라는 이름으로 갈라져 있다가 하나가 되었지만 서로가 서로를 이해하지 못한 채 필요의식만 앞세웠다면 그것도 커다란 문제일 것이다. 그래서 내부적으로 썩어들어가며 악취를 풍기는 그 미래가 있었을 것이다. 다행인 것은 염려했던 것과는 달리 주인공 리강이 죽지 않았다는 거였다. 일말의 희망처럼 말이다. 그래서일까? 주인공의 죽음으로 모든 것을 무마하지 않는 작가에게 왠지 신뢰감이 느껴지는 아이러니가 생겨난다.

상처받은 남쪽 여자 윤상희와 운명같은 만남을 가졌을 때도 회피하지 않는 리강의 모습이 왠지 아름답게 다가온다. 빠져들고 말았다는 얘기다. 젊은 작가의 통일에 대한 미망 속으로.. 그들이 떠안아야 할 그들의 숙제였던 까닭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이미 지나쳐버린 세대들이 말하는 통일과는 다른 그들만의 통일 개념이었던 까닭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김진명 작가가 말하고자 했던 통일의 염원과 조정래 작가를 통해 바라보았던 통일의 이념과 이응준이라는 젊은 작가를 통해 듣는 통일 이야기는 정말이지 너무도 다른 느낌으로 내게 다가온다. 무엇이 옳고 그른가가 필요할까?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단지 그들이 살아왔고 살아가는, 그리고 살아가야 할 시대의 변화가 다를 뿐이라고.. 그리고 변화는 인정해야만 하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하기에..

제목만 보고는 이 책을 가늠하지 못하겠다. 촘촘하게 짜여진 그물처럼 이야기가 흘러간다. 앞으로 뒤로 그러나 그런 것들이 모두 하나로 엉키는 구조가 새삼스럽게 다가와 흠뻑 빠져들게 한다. 거기에 우리가 지금 처해진 현실을 가상처럼 그렸다면 더 흥미로운 게 맞다. 적어도 내게는 그랬다는 얘기다. 재미있게 속도감있게 읽혀졌다. 더 깊은 생각을 하기보다는 그가 들려주는대로 그저 이끌려갔을 뿐인데도 잘 읽혔다. 우리가 그리는, 혹은 꿈을 꾸는(누가 그리는 것인지, 누가 꾸는 꿈일지는 알 수 없다) 신세계는 과연 어떤 세상일까? 책장을 덮으니 맨 앞에서 한남자의 알 수 없는 시선이 보인다. 국가의 사생활이라는 제목 아래에서. 어디를 바라보는 것일까?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일까? 묻지 않기로 한다.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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꿀벌의 집
가토 유키코 지음, 박재현 옮김 / 아우름(Aurum)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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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참 좋다. 마음이 편안하고 산듯하다. 책장을 덮고 잠시 눈을 감아본다. 꿀벌의 집을 찾아 떠났던 리에의 마음을 따라서 나도 꿀벌의 집을 찾아 떠나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꿀벌의 집에서 조금씩 아픔을 치유해가던 그곳 사람들의 모습들이 그려진다. 산다는 것은 결국 관계의 고리인데 그 고리를 어쩌지 못하고 서로에게 아픔을 주면서 상처를 내면서 그렇게 살아간다. 그것도 사랑한다고, 아껴주고 싶다고 말하는 사람들에게서.. 가장 가깝게 머무는 사람들에게서.. 무슨 까닭일까? 버리지 못하는 아집 때문이려니 한다. 영영 버리지 못할 자신만의 잣대를 심어둔 까닭이려니 한다. 내 안의 우물이 너무 깊어서 다른 이들이 퍼올릴 수 없는 까닭이려니 한다.

가토 유키코라는 작가와 처음 만났다. 책날개를 통해 그녀를 탐색해보자니 일본 태생이면서도 중국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농학부를 졸업하고 농림성 농업기술연구소에서 일을 했고 자연보호협회에서도 근무를 했다. 그리고 지금은 작가다. 그러니 그녀가 쓰는 글속에 자연이 녹아 있는게 지독히도 자연스러울 것이다. 도대체 자연이라는 것이 무엇이길래 우리는 저멀리에 있는 환상을 바라보듯이 하는 것일까?  이 책뿐만 아니라 자연을 상대로 말을 걸고 어깨 한번 툭쳐보곤 했던 책들은 많았다. 너무나도 커서? 그것도 아니면 다가가기가 쉽지 않아서? 그런 것만은 아닐것이다. 도둑이 제 발 저리다고 아마도 자연에게 지은 죄가 많은 탓이려니 한다. 

모든 짐승들, 동물들은 병이 나면 자연속에서 치유를 찾는다고 한다. 아프면 약이 될 풀을 찾아 뜯어먹기도 하면서 말이다. 유독 인간만이 그야말로 자연의 혜택을 가장 많이 받고 태어났을 인간만이 자연을 등진 채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싶은 생각도 든다. 편리를 위해서 야금야금 자연을 갉아먹는 쥐처럼 말이다. 그런 우리에게 작가는 자연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말해주고 있다. 문명이 우리를 발판으로 저들만의 세상을 만들어가고 있는 지금 우리가 마음에 입은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서는 자연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자연의 법칙을 이해하고 마음 깊이 받아들여야만 한다고 외치고 있음이다.

"너희 엄마는 지금 다이빙대 위에 서 있으니까"... 리에를 바라보면서 꿀벌의 집 운영자가 했던 말이다. 리에의 엄마만이 다이빙대위에 서 있을까? 아니 지금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모두일것이다. 그 다이빙대의 높이가 얼만큼인가는 자신만이 알 것이다. 아버지의 자살로, 엄마의 아집으로 리에에게는 떠나고 싶었던 현실이 있었지만 어쩌면 모두가 가해자이며 모두가 피해자라는 점을 인정해야만 할 것이다. 꿀벌이라는 아주 작은 곤충을 통하여 보여지는 삶의 이치는 참으로 신선하게 다가왔다. 때로는 추위를 이겨내기 위해 서로가 뭉쳐 하나의 덩어리가 되는 따스함으로, 때로는 의무를 다한 숫벌을 밀어내야 하는 현실적인 냉혹함으로, 때로는 또하나의 여왕벌이 분봉을 하는 차가움으로..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현실과 다르지 않다. 하지만 꿀벌과 인간의 다른점을 간과해서는 안될 것 같다. 철저하게 자연속에서 자연의 이치를 따르는 꿀벌과 저마다의 욕심을 먼저 채우기 위하여 자연의 이치를 거스르는 인간의 모습과는 판이하게 다르다는 것이다.

"하지만 치렁치렁한 스커트는 바지로 갈아 입어요. 그 번쩍거리는 블라우스도요"... 엄마를 향해 따갑게 말하는 리에의 음성이 들려오는 듯 하다. 모든 형식과 허울을 벗어던지고 자연을 대할 때, 자연을 우리가 살려내는 것이 아니라 자연속에서 우리가 살아가고자 할 때 모든 것이 순조롭다는 것을... 싱글맘으로써의 힘겨운 여정을 이겨내기 위해 삶을 향해 도전장을 던졌던 꿀벌의 집 운영자 기세의 손목엔 날카로운 상처가 남아 있었고.. 폭주족이었던 겐타, 거식증에 걸렸던 아케미, 심지어는 자신만의 성에 갇혀 살았던 리에의 엄마.. 상처받았으나 치유할 길을 찾지 못했던 사람들이 제각각 꿀벌의 집에서 모여 적당한 거리를 유지한 채 살아가는 모습.. 우리 모두에게는 그 꿀벌의 집과 같은 무엇이 필요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한다.

일본소설이 범람하는 출판계의 현실속에서 "또 일본소설이야?" 하면서 선택했던 아주 작은 책.. 꿀벌의 집을 만난 것은 정말 행복한 일이었다. 삐걱거리는 현실속에서 나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돌아볼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거기 모였던 사람들이 꿀벌을 향해 마음을 열고 꿀벌의 일상을 바라보았던 시선들에 대하여 다시한번 생각해 본다. 마음을 연다는 것, 타인을 향한 시선속에 있는 그대로의 모습만 담을 수 있다는 것.. 정말 멋지고 아름다운 일이 아닐까?  마지막 책장을 덮으며  좋은 느낌을 전해받을 수 있었던 아주 작은 책..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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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드라의 그물 Nobless Club 12
문형진 지음 / 로크미디어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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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경계문학이라는 것을 접하게 되었을 때 아주 단순하게 생각했었던 나의 교만을 알게 되면서 실소를 금했던 기억이 있다. <인드라의 그물>이라는 말 자체부터가 이미 불교를 안아들고 있었던 까닭에 아직 불교에 대해 서툰 시선을 가진 나로써는 다가가기가 조금 망설여졌던 것도 사실이다. 세상 모든것들이 서로 연결되어져 있다는 의미로 해석되어진다는 인드라의 그물.. 힌두교의 신이었지만 불교에 흡수된 신 중의 하나가 인드라라고 한다. 그 인드라의 궁전위에 걸려 있다는 거대한 그물에는 그물코 하나마다 구슬이 달려 있는데 그 구슬들이 서로를 비추며 보여준다고 한다. 인연이라는 말을 생각하게 하는 말이다. 서로가 서로를 바라보면서 자신의 모습을 가다듬기도 하는 우리의 모습과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이 책속에는 너무나 많은 것들이 담겨져 있는 듯 하다.  가끔씩 튀어나오는 <화엄경>이나 <반야경>을 인용한 문장들은 사실 쉬운 말들은 아니지만 나름대로 그 뜻에 다가가기 위하여 다분한 노력이 있었음을 알게 해주는 내용들이다. 이 책의 중요 라인처럼 보여지기도 한다.  아이러니하게도 크리스찬에게서 차크라chakra라는 말을 처음 들었을 때가 생각난다. 물질적이나 정신적인 면에서 정확하게 규명될 수 없는 인간 정신의 중심부를 말한다는 단어. 신체수련에서 중요시되는 개념으로 육체적인 기능과 상호작용을 하여 커다란 힘을 발휘할 수도 있다는... 이 책을 읽는다면 차크라chakra라는 말을 이해하고 넘어가야 할 것 같기에 하는 말이다. 자비로 중생을 구한다는 관세음보살을 세가지로 나누어 말하고자 했던 점은 특이했다. 결국 인간의 마음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역설적으로 말해주고 있는 듯 하다.

책표지에 완전한 깨달음에 이른 자가 인간의 사랑을 할 수 있는가라는 물음이 있다. 타인이 행복하지 않으면 자신도 행복할 수 없다는 말은 다시한번 나를 돌아보게 한다. 종교적인 의미를 벗어나서 그 말이 주는 의미가 너무도 아름다운 까닭이다. 윤회를 말하고 인연을 말하지 않는다해도 우리가 추구하는 하나의 이념 또한 사랑이 아닐까 싶기 때문이다. 책중에서 관음보살의 현신으로 나타났던 '교'라는 여인이 끝까지 잃고 싶지 않았던 그 사랑의 정의는 무엇일까? 전생으로부터 현실에까지 석가모니에 대한 사랑을 놓고 싶어하지 않았던 그 여인의 갈망이 왠지 애처롭게 다가온다. 작가는 어쩌면 그렇게 애타는 사랑을 인간의 마음을 통해 맺어주고 싶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그 관음보살의 세 현신이 이끌어갔던 세계.. 모든 것을 추구했으나 모든 것이 실체적인 모습이 없는 꿈이었다는.. 다시 비어있음 空으로부터 시작되어지는 윤회의 늪.. 어려운 설정임엔 분명하다.

아쉬운 점이 있다면 불교라는 커다란 규칙앞에서 너무도 작게 그려지던 주인공들의 심리적 갈등구조였다. 사랑을 이야기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왠지 가식처럼 다가온다. 일종의 반전이라면 반전일수도 있는 '나'라는 주인공의 정체가 드러나는 과정도 너무 밋밋하지 않았나 싶기도 하고... 무대장치가 너무 황홀했던 것은 아닐까? 세밀하고 섬세하게 그려지던 그 무대를 배경으로 연기를 해야했던 배우들의 심리적인 묘사가 한쪽으로 치우쳐버린 듯한 느낌이 든다. 아마도 우리들의 작가를 통해 이런 류의 글을 많이 접해보지 않은 탓도 있으리라 한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쉽게 다가서지 못하는 아니 우리에게는 왠지 멀리 있는 것으로만 느껴지던 불교적인 인식을 모티브로 삼았다는 것에 박수를 보내고 싶다. 

책장을 펼치면서 심호흡을 한번 한다. 하지만 쉽게 다가오지 않았다. 뭔가 껄끄럽다는 느낌.. 자연스럽게 넘어가지 못한다. 왠지 억지스럽다는 느낌도 온다. 짜맞춘듯한... 아마도 그래서 경계문학이라는 말을 떠올렸을 게다. 젊은 이성이 뛰어놀기엔 불교라는 배경이 너무 방대했던 건 아니었을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든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불교에 대한 시선이 남다른 나에게는 많은 것을 얻을 수 있는 기회가 아니었나 싶다. 너무 어렵게만 다가오던 낯선 언어들이 조금씩은 풀이된 듯한 느낌을 전해받았다고나 할까?  작가 역시 불교신자는 아니지만 불교 애호가라는 말이 와닿는다. 일단은 자기 수양을 목표로 한다는 것, 모든 것이 나로부터 비롯되어진다는 그 말이 나는 참 좋았다. 좀 더 서점에 가서 찾아봐야할 것 같다. /아이비생각


신을 내세우지 않으며 창조자나 정복자의 자세를 취하지 않는다, 지혜와 자비로 표현되어진다, 일반적으로 광신을 배척하고 관용과 일체의 평등을 추구한다, 현실을 직시한다, 모든 일에 집착과 구애를 갖지 않고 실천을 강조한다, 물론 불교에도 미래불이 있고  과거불도 있지만 그것은 오랜 역사를 거쳐오면서 다양성을 띠게 된 까닭이라는 것.. 내가 피상적으로나마 알고 있는 불교의 교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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