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중그네 오늘의 일본문학 2
오쿠다 히데오 지음, 이영미 옮김 / 은행나무 / 200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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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라부 선생, 아마도 대한민국에서 꽤나 유명할게다. 일본에서 태어나 대한민국까지 이름을 떨친 걸 보면 그 치료법이 괜찮았을거란 생각이 든다. 그 유명세를 타고 이라부 선생을 보기 위해 서점으로 달려간 사람도 많았을 것이고, 그 대단한 입소문으로 아마도 정신과라는 것에 대한 일반적인 사람들의 심리적 부담감도 많이 줄어들지 않았을까 싶기도 했다. 한참 전이었을 것이다. 그 이라부선생에 대한 소문을 들었던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제사 이라부 선생과 인사를 나누었다.  이라부선생이 정말 실질적인 존재였다면 이제사 자신을 찾아온 나에게 뭐라고 말했을까?  세상을 너무 버겁게 보시는 거 아닙니까? 이렇게 얘기했을거란 생각이 들면서 푸시시 웃어버린다. 정말 그럴 수도 있겠다. 세상을 너무 버거운 시선으로 바라보며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니었을까? 뻑뻑해진 눈에 인공눈물을 넣어가면서 눈알을 굴리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책을 읽고 난 뒤 자체진단을 하게 만들었던 이라부 선생에 대해 다시한번 생각해 본다.

이 책 <공중그네>가 입소문을 탔을 때 내게는 왠지 거북스러움부터 생겨났다. 어쩌면 쓸데없는 자존심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우리의 학생들에게 필독서로 읽힐 정도로 가랑비처럼 젖어드는 일본소설에 대한 반감이었을지도 모를 일이지만.... 어쨌거나 나는 궁금했다. 무엇이 그토록이나 많은 사람들을 끌어당길 수 있었는지... 답은 간단했다. 긍정적인 마인드. 자기 자신만의 껍질속에서 탈피하기. 인정하기, 자신속에 있는 또하나의 자신이 무엇때문에 아파하고 있는지 바라볼 수 있는 것도 자신이니 그 아픔에 대하여 솔직하게 인정하기.. 긍정적인 마인드를 갖자고 떠들어대는 책들은 참 많다. 이렇게하면 되지 않을까? 그 방법까지 제시해주는 책도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왜 그토록까지 인기가 있었던 것일까?  아무래도 이라부 선생의 그 능청스러움때문인 것 같다. 문제를 문제시하지 않는, 곪아버린 아픔에 대하여 수선떨지 않은 채 그것이 곪아버리게 된 원인을 스스로에게서 찾아낼 수 있도록 도와주는 그 방법들이 사람들에게 쉽게 다가설 수 있도록 만들었던 것 같다.

배꼽잡게 만들었다는 말을 사실 나는 이해하지 못했다. 우습게 설정된 몇몇 장면들만 그랬을 뿐이니까. 웃긴다는 생각보다는 그 이라부 선생이 자신을 찾아온 고객들과 똑같은 설정을 만들어낸다는 사실에 놀라웠다. 정말 이런 의사가 있을까? 정말 이런 의사가 있다면 눈물나게 고마운 일일것만 같다. 언제였던가, 잘 다니던 병원을 어느날 불쑥 생겨난 새로운 병원으로 옮겨버렸더니 너도나도 한마디씩 했었다. 그래도 다니던 병원이 낫지 않을까? 새로 생긴 병원이 어떤 곳인줄 잘 모르잖아!... 하지만 나는 확신했다. 형식에 얽매인 질문이 있는 곳은 싫다고. 환자의 말을 잘 들어주고 그 환자의 상태에 대해 마음을 다해 다가올 수 있다면 그런 의사가 진짜가 아니겠느냐고. 그랬었던 나에게 이라부는 바로 그런 의사의 이미지로 느껴지기에 충분했다. 엉뚱하고 별스럽게 보이지만 그것이 무슨 대수랴 싶을 정도로.. 머뭇거림없이 환자의 아픔속으로 들어와 환자 자신이 스스로 치유하게 만들어주는 역할을 할 수 있는 이라부 선생의 모습이 마치 실제처럼 느껴지기까지 했으니...

이제는 선입견으로 다가왔던 그 거부감을 떨쳐버린다. 그리고 나의 편협함에 대하여 다시한번 질책한다. 작은 것을 내세워 큰 것을 잃곤하던 나의 편협함이라니... 무거운 이야기들을 재미있는 설정을 통하여 무겁지 않게 보여주었던 작가의 섬세함이 눈물겹다.  세상에 무서울 것 없어보이는 야쿠자의 중간보스가 이쑤시개의 뾰족함 앞에 무릎을 꿇었던 상황, 보잘 것 없는 보통의 삶을 살다가 어느날 갑자기 귀족적인 허울에 갇혀버려야 했던 의사선생의 간절함, 변해가는 현실속에 적응하지 못한 채 과거로의 향수만을 꿈꾸던 공중그네타기의 명수, 연일 승승장구하는 후배의 모습에 주눅들어버린 질투심을 어쩌지 못하던 야구선수.. 그 하나하나의 환자들은 바로 우리들이었을 게다. 속내를 드러내보이고 싶어하지 않는 우리들.. 행여나 약점으로 작용할까봐 두려움에 떨며 자기 자신의 올무에 걸려버린 우리들 자신의 모습이 이라부 선생을 통해 적나라하게 펼쳐지는 상황들이 참으로 두렵기까지 했다. 하지만 어떻게든 자신만의 거울들여다보기를 두려워하지 말라던 이라부 선생의 그 속삭임이 들려오는 것 같아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정말 좋았던 시간이었다. 뭣도 모르고 그냥 괜히 거부했었던 시간만큼이나 좋았던 책읽기가 아니었나 싶다. 이라부 선생을 만날 수 있다면 나도 그의 환자가 되어 그와 마주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어쩌랴, 그 이라부선생조차도 내 안에 있는 것을.... 느닷없이 친구라는 말을 떠올린다. 그 유명한 함석헌 옹의  ' 그사람을 가졌는가'라는 글이 떠오르는 것은 또 무슨 까닭일까? /아이비생각


만리길 나서는 길
처자를 내맡기며
맘 놓고 갈만한 사람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온 세상 다 나를 버려
마음이 외로울 때에도
'저 맘이야'하고 믿어지는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탔던 배 꺼지는 시간
구명대 서로 사양하며
'너만은 제발 살아다오'할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불의의 사형장에서
'다 죽여도 너희 세상 빛을 위해
저만은 살려두거라'일러줄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잊지 못할 이 세상을 놓고 떠나려 할 때
'저 하나 있으니'하며
빙긋이 웃고 눈을 감을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온 세상의 찬성보다도
'아니'하고 가만히 머리 흔들 그 한 얼굴 생각에
알뜰한 유혹을 물리치게 되는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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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너프 : 불만족의 심리학
존 네이시 지음, 강미경 옮김 / 예담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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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살면서 진정 이것이면 충분해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살면서 그만큼이면 되지 않겠느냐고 말해주는 사람은 있어도 이만큼이면 되었다고 스스로 만족하며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을 만나기가 그리 쉽진 않을 것 같다. 만족한다는 것은 어느 것 하나만을 특정적으로 콕 짚어 이야기하는 것이 아닐테니 말이다. 내 삶에 진정 만족을 느낄 수 있는 때가 오긴 올까? 내 스스로가 이제 되었다고 말하며 마음 내려놓을 수 있는 그런 날이 오기는 올까? 가끔 생각해보기도 한다. 도대체 내가 지금 무엇을 원하고 있는지.. 도대체 지금 내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뜬금없는 자문속에서도 답은 찾을 길이 없다. 그만큼 정신없이 바쁜 것도 아닌데, 그만큼 무엇엔가에 미친 듯이 푹 빠져 지내는 것도 아닌데...

'원숭이 마음'이라는 말을 보면서 뜻모를 서글픔을 안아든다. 이 나무에서 저 나무로 쉼없이 왔다 갔다하는 그런 상태와 우리의 삶속에 내재된 인간의 속성과 무엇이 그리 다르겠느냐고.. 욕심을 버리고 이제 마음을 내려놓으셔야 합니다, 라는 말은 눈으로도 귀로도 끊임없이 듣는 말 중에 하나가 아닐까 싶다. 예측해보건데 이제 살아가면서 가장 많이 들어야 할 말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건 그냥 내 생각일 뿐이지만) 하나의 이룰 수 없는 꿈처럼 아스라한 뉘앙스를 풍기게 되지 않을까 싶기도 하고.. 가장 필요한 것들은 가장 가까이에 머물고 있지만 그것을 멀리에서만 찾으려고 하는 우리의 못된 습관이 눈에 띄지 않게 할테니 말이다. 

뭐, 솔직하게 말하자면 이 책속에 이렇다하게 특별한 것들은 없다. 우리가 지금까지 많이 들어왔던 이야기들이 들어 있을 뿐이다. 책을 읽는동안 내게 살풋 미소짓게 만들었던 자기계발 이야기.. 그렇지 그건 그럴거야. 저자의 말처럼 수많은 사람들이 자기계발에 성공했다면 이 세상은 어찌 되겠는가 말이다.(어쩌면 모두가 다 도인이 되어버렸을지도 모를..) 그렇다고해서 저자가 외치고 있는 말 '더 많이'에서 '충분해'로! 를 크게 외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책속에는 자꾸만 변신을 거듭해가는 거대 문명의 비대함을 꼬집고 있다. 그것을 만들어가는 것이 우리들임을 잊은 채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니냐고 묻고 있다.  

더할 수 없이 무서운 정보에 중독되어가면서도 그 중독으로부터 헤어나지 않으려하는 우리들의 모습, 끝도없이 먹고 마시는 폭식이나 무언가를 찾아 쉼없이 두리번거리는 우리의 물질적 탐욕에 대해서도 일침을 놓는다. 그러면서도 영원한 행복추구를 위한 것이라고 말하며 자신의 삶을 파괴하는 일중독에 대하여, 너무나 많은 선택앞에서 점차 흐려지는 우리의 판단력과 인지력에 대하여(이것은 정보의 다양성과도 문제가 이어진다), 생태계를 파괴하고 우리를 직접적으로 불안하게 만드는 과속성장의 늪에 빠져 허덕이는 상태에 대하여 우리가 불안해하지 않는 둔탁함에 대하여 저자는 아주 큰 염려를 하고 있다. 쓰지않는 물건들이 집 구석구석에 쌓이는, 그리하여 한번도 쓰지 않았던 물건들이 중고상품으로 되팔려나가고 있는 지금 우리에게 무엇이 필요하냐고, 지금 이 순간 우리에게 진정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다시한번 생각해보자고 절절하게 말하고 있다.

각 장의 말미에 실려있는 실천전략... 저자가 우리에게 내미는 약이다. 심각한 우리의 병을 치료하기 위하여 어떻게하면 되는지 알려주고 있다. 정보중독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정보 다이어트를 시도하라와 같이 폭식을 피하기 위해서는 이렇게 하라, 물질적 탐욕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이렇게 하고, 일중독에서 선택의 고문에서 해방되기 위해서는 이렇게 해야 한다는 등... 명령어조의 이야기들이 약간 거슬리기는 하겠지만 실천의지만 있다면 도전해 볼만한 사항들이 꽤나 많다. 가령, 폭식을 피하기 위해서 되도록 가짓수가 많은 식사를 피하고, 절제를 아는 친구와 사귀며, 식사 시간을 일정하게 지키고, 햇볕을 많이 쪼여라, 숙면을 취하라, 외식할 때는 작은 식당을 이용하라 같은 말들은 그다지 어려운 조건이 아니란 생각이 드니 하는 말이다. 많이 듣고 보아 왔겠지만 다시한번 생각해본다고해도 과하지 않을 내용이란 생각이 든다.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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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심장을 쏴라 - 2009년 제5회 세계문학상 수상작
정유정 지음 / 은행나무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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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우~~~ 이제 마지막인가? 그렇다면 나도 내 심장을 쏴야 하는가? 책장을 덮으면서 나는 가슴 한쪽이 먹먹했다. 알싸하게 아파왔다고 하는 게 맞는 말일지도 모르겠다.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다고 생각했다. 왜일까? 이건 뭐지? 알 수 없는 감정하나가 내 가슴 저 밑에서부터 스멀거리고 올라왔다. 순간적으로 눈을 깜박거렸다고 생각했는데 왠걸? 눈물이다. 툭하면 운다고해서 어렸을 적부터 내 별명은 울보였다. 하지만 어느순간부터였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울지 않았다. 울지 않으려고, 최소한 타인에게만큼은 내 울음을 보여주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었다.  내게는 너무도 명확한 느낌으로 다가왔던 말, 사람은 저마다의 동굴을 하나씩 끌어안고 산다는 그말이 누군가의 손을 빌어 내게로 다가왔던 날의 기억이 떠올랐다. 속이 쓰렸다. 다시 신경증!

감동적인 휴먼드라마라는 말이 있다. 감동적? 웃기네! 대체적인 내 반응은 그랬다. 도대체 뭐가 감동적이라는 거야? 그렇다고 그 흔한 눈물조차 짜내지 못하면서? 그랬는데, 정말 그랬던 내가 책을 읽으면서 밑바닥에서 올라오는 눈물을 삼켜야 했다. 그만큼 진하다. 삶이, 우리가 살아내고 있는 시간의 존재 의미가... 정신병원에서 살아가는 정신병자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는 감동적이라는 말앞에 무릎을 꿇었다. 아이러니다. 미쳐서 갇히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갇혀서 미쳐가는 사람도 있지요. 잘 아시잖아요? 최기훈을 향해 내뱉던 수명의 그 한마디가 살아있는 것처럼 꿈틀거렸다. 세상속에서 나를 건져내고 싶어했던, 아니 시간의 굴레속에서 헤어나고 싶어했던 수명은 어쩌면 우리 자신일것이다. 자신의 시간을 놓치고 싶어하지 않았던, 그래서 자신만의 삶속으로 되돌아가고 싶어했던 승민은 어쩌면 우리속에 내재되어져 있는 한올의 머리카락같은 희망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수명을 끌어안은 채 승민을 바라보아야 했던 나는 정말이지 참 많이도 아팠다. 수명이 나였다. 그 깊은 눈속에 한가닥 절망조차도 숨기고 싶어하지 않던 승민을 도와주기 위해 마지막 탈출을 시도했을 때 우울한 세탁부는 수명에게 물었었다. 선생님은요? 왜 같이 안가시나요?... 거기에서부터였을 것이다. 어쩌면 누군가가 너 자신을 한번만 돌아보라고 말해주기를 기다렸던 것은 아니었을까? 세상으로부터 도망치는 병에 걸린 선생님을 이해하게 된 건 그리 오래 되지 않았다고 말하던 우울한 세탁부의 말처럼 이제는 자신의 껍질속에서 나와야만 한다고 말해 줄 사람이 필요했던 건지도 모를일이었다. 껍질속에만 있으면 질식사한다는 것도 모른 채 힘겨운 세상살이를 막연하게 거부해서는 안되는거라고 누군가가 말해주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정신병원의 일상을 낱낱이 꿰고 있는 수명과 정신병원이라는 곳엘 처음 와보는 승민의 만남은 정신병원을 향해 가고 있던 길목에서였다. 그리고 그 정신병원의 복도에서 그와의 끈이 얽혀버리고 만다. 느닷없이 공조자가 되어버린 수명은 승민을 이해하지 못했다. 미친 새끼, 저러다 죽지.. 였을 뿐이었다. 관심갖지 말자고, 다가가지 말자고 수없이 다짐했던 수명이 끝내 인정해야 했던 것은 승민이 자신이고 자신이 승민이라는 거였다. 끝도없이 밀려오는 현실의 파고속에서 힘에 겨워 모든 것을 놓고 싶어하는 수명과 그 파고의 물결을 잘 읽어내 파도타기로 즐기고 싶어했던 승민은 하나였다. 그리고 바로 나였다. 수명의 앞길을 열어주던 작가는 잔인하게도 우리의 미래이자 희망이었던 승민의 존재에 대한 의미부여를 나한테 떠밀었다. 시체없는 자살이라고...

자신이 걸어왔던 여정속에서 자신만의 삶을 살아내기 위해 안간힘을 썼던 승민의 지나온 시간들을 보면서, 그리고 그 시간속으로 돌아가 자신과의 재회를 꿈꾸었던 승민이 시력을 잃어가는 과정을 보면서, 자신의 기억속에서 찾아낸 먼 날의 아픔을 끌어안은 채 살아야 했던 수명이 당당하게 그 아픔과 마주서고자 했을 때 나는 눈물이 났다. 지극히 당연한 현실속에서 일어났던 두 남자의 사건은 결국엔 얻어터지고 깨지는 탈주극이었지만 그야말로 거칠 것이 없었다. 수명과 승민이  적으로 간주하여 싸워댔던 것은 현실이었다. 하지만 작가는 오롯이 싸워야할 적으로만 보지 말라고 충고해주고 있었다. 싸움은 하되 설득과 관심과 이해도 필요하다고.. 내 삶이지만, 내 시간이지만 나의 판단과 선택과 통제력안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들이라고.. 모두가 정신병자들이었지만 그들 나름대로의 룰로써 정을 나누었던 병동사람들의 그 살가운 표현을 외면해서는 안되는거라고..

어느 쪽일까? 멀쩡했지만 정신병원안에 갇혀버렸던 수명과 승민을 바라보면서 나는 물었다. 타의에 의해서 그곳으로 갔는가, 아니면 자의에 의해서 그곳으로 갔는가. 그리고 현실의 시간에게 떠밀려 그곳으로 갔는가, 아니면 내 스스로가 그 시간밖으로 걸어나오듯 그곳으로 갔는가. 생각해보면 정말 愚問이다. 멍청한 질문! 답이 있어도, 답이 없어도 멍청한! 지금처럼 끝없는 愚問속에서 살아가는 나를 다시 만난다는 건 그리 좋은 일은 아니다. 그런데도 수명과 승민은 묻는다. 너는 어느쪽이냐고. 내 시간에 떠밀려 살아가고 있는 건 아니냐고. 모든 족쇄로부터 풀려난 자유로운 존재인 '나'를 만나기 위해 글라이더를 타고 어둠속으로 사라져 갔던 승민이 나는 궁금하지 않다. 단지 내 시간속에 나로 존재하고 싶었다고 말하던 승민은 정말 그렇게 되었을거라고 나는 믿으니까. 병원문을 나서며 자신을 묶었던 올가미를 털어내듯이 약과 소지품이 든 가방을, 이 병원에서 저 병원으로 꼬리표처럼 끌고 다녔던 그 물건을 병원 정문안으로 힘차게 내던졌던 수명에게 박수를 보내고 싶다. 

우리를 감시하고 감독하는 족쇄는 많다. 우리를 겨누는 세상속의 총구는 셀 수도 없다. 누군가 쏘는 총에 언제 맞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아무리 쭉 째진 가재미눈을 한 채 살펴본다한들 그 많은 것들을 어찌 다 볼 수 있을까?  나는 팔을 벌렸다. 총구를 향해 가슴을 열었다. 그리고 언덕 아래로 질주하기 시작했다. 나야. 내 인생을 상대하러 나선 놈, 바로 나. 이 책의 마지막 문구다. 그렇게 승민을, 아니 자신만의 희망을 저 멀리로 보내놓고 수명이 했던 마지막 말이다. 눈물이 날만큼 진하게 안겨왔던 수명과 승민의 여정들이 뿌옇다. 어쩌면 아주 오래도록 잊지 못할지도 모르겠다. 수명과 승민의 존재를... /아이비생각

추신..
말투가 많이 불손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밉지 않았기에 다음에 해 줄 작가의 이야기를 기다려보기로 한다. 아주 멋지게 강하고 아름다운 펀치를 다시 한번 날려주기를 기대하면서... 기도가 없는 곳은 사탄의 잔칫집. 기도가 있는 곳은 사탄의 초상집. (153쪽) 의 말처럼 은유라는 것은 때로 혹독한 매질로 나에게 다가온다. 어쩌면 그렇기에 더 매력적인지도 모를 일이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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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나라 도둑 - 김주영 상상우화집
김주영 지음, 박상훈 그림 / 비채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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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나라 도둑'이라는 책의 제목을 보면서 순간 고개를 갸우뚱했었다. 왜 이런 제목을 생각했을까? 사실 이 책은 작가가 동아일보에 연재했던 글들이다. 신문속에서 작가의 글을 처음 보았을 때 낯선 설레임을 느꼈었다. 한편 한편 글이 올라올 때마다 나는 신문을 오려 스크랩하기 시작했고 그 스크랩을 보면서 언젠가는 책으로 나오겠구나 했었다. 신문을 오려 스크랩을 할 때의 내 마음이 어땠었는지 다시한번 내게 묻는다. 참 아득했었다는 그 느낌을 다시 떠올려 보기 위해 이 책을 모른 척 할 수 없었다는 건 핑게일까?  때로는 아픔으로, 때로는 버릴 수 없는 꿈에 대한 미련으로, 때로는 우리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현실에 대한 저항으로, 때로는 과거로 달려갈 수 없는 향수에 대한 기억으로 짧은 글들은 하루 하루 다른 느낌을 내게 전해 왔었다.

<똥 친 막대기>라는 동화를 통하여 어른들의 메마름속에 한줄기 강물을 흐르게 했던 것이 그리 오래되지 않았는데 그 어른들을 위해서가 아닌 자기 자신을 위해 이 책을 바친다던 작가의 말이 왠지 안타깝게 들린다. 유난히 힘겨웠다던 작가의 어린시절을 나는 잘 모르겠지만 글을 통해서라도 한번쯤은 도달하고 싶었던 꿈에 대하여 되새김질 하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나는 감히 그런 생각이 들었다. 글을 쓰는 순간만큼은 누구와도 견줄 수 없는 행복한 시간속에 머물렀을거라고... 그 상상의 세계속에서 못다 이룬 꿈들을 이루었을 거라고... 하지만 상상우화라는 말처럼 내가 근접할 수 없는 그의 꿈들이 이 책속에 머물고 있기도 하다. 자신만이 알아 들을 수 있는 자신만의 언어로 쓰여진 우화도 몇 편... 이런 생각을 해 본다. 그 사람의 꿈은 오직 그 사람만의 것이라고.. 그러니 그것을 이해하려 하지 말자고..

이해되지 못하는 나의 짧은 생각속에 그저 스쳐가던 몇편의 우화들을 보면서 나는 좀 버거웠다. 항상 배고팠고 무엇을 하든 꼴찌였다던 작가의 어린시절은 좌절과 외로움만이 존재했다는 그 말에 수긍은 하면서도 왠지 안타까웠다. 그래서일까? 작가는 자신의 아픔에 대하여 남들이 편하게 다가서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는 느낌을 받고 있는 나를 어쩔 수가 없었다. 자신만의 것으로 간직하고 싶어하는 것 같다는.. 하지만 천천히 읽어가며 속내를 들여다보자고 마음 먹는다.  작가의 연세가 일흔... 삶을 되돌아보는 길목에서 이 글을 쓰셨을까?  누구나 나이를 먹고 삶의 뒤안길을 되돌아 볼 때 아름다웠다고 말할 수 있기를 바란다는데 작가는 어땠을까?

뗏목을 타고 자유롭게 자신만의 생활을 즐기던 그에게 어느날 문득 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취재원이 등장하고, 여러 사람들에게서 원치않았던 성원과 갈채를 받게 되면서부터 그의 자유는 파괴되고 말았다. 이제는 되돌아갈 수 없는 자신의 자유로웠던 시간들.. <자유의 뗏목을 타고>에서 보여지는 현실은 참 암담하다. 내 것이면서도 내 것일 수 없는 것들이 이 세상에는 너무도 많은 것 같다. 타인의 시선으로 인하여 변해가는 나 자신의 모습이 너무도 싫었을 것이다. 그래서 길을 떠났지.. 그 번잡함이 싫어서, 타인의 시선이 너무 많아서..  길을 떠났던 장미꽃과 늑대는 처음 그 한가함과 여유로움속에서 정말 무엇이든지 할 수 있을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들에게 찾아온 것은 외로움이었다. 서로의 외로움을 알고 있어도 소통할 수 없었던 그들의 언어는 그들을 더 외로움속에 빠져들게 만들었다.. <장미와 늑대> 이야기를 보면서 나는 문득 군중속의 고독을 생각한다. 혼자있어도 외롭고 함께 있어도 외로운 것이 우리의 속성은 아닐까 싶기도 하고..

솔직하게 말한다면 이 책속에 존재하는 외로움의 크기는 엄청났다. 내가 느끼기에는 그랬다는 말이다. 작게 그려지는 우화속의 존재들은 하나같이 외롭게 보였다. 왜 그랬을까? 책을 덮고 나는 내가 스크랩 해놓았던 신문을 펼쳐 들었다. 그리고 나의 무지를 탓한다. 그저 단순하게만 생각하고 싶어했던 나의 아집을 질책하며 다시한번 천천히 책을 읽어보기로 마음 먹는다. 그냥 스쳐지나가기엔 너무나도 많은 것들이 담겨 있을거라는 기대를 접지 못한 채.. 그동안 작가가 보여준 대하드라마의 커다란 물결과 이 책에서 보여주고 싶어하는 일렁이는 물결의 차이를 제대로 느껴보고 싶어진다.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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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 천하의 경영자 - 상 - 진시황을 지배한 재상
차오성 지음, 강경이 옮김 / 바다출판사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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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李斯... 그가 누구인가를 궁금해 한 적이 있었던가?  진시황을 논할 때 그의 책략사였다던 이사, 그의 이름이 역사책에 거론되어진 적은 있었던가?  알 수 없다. 그늘에 가려져있다는 것은, 누군가의 그늘에 가려져 있다는 것은 그다지 좋은 일만은 아닐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늘에 가려 제 이름보다는 누군가의 이름을 앞세워 세상 모든 것을 쥐락펴락 할 수 있었다면 그것은 행복한 일일까?  이 책에서 말하고자 하는 존재 이사라는 사람을 통해서 본다면 그다지 행복한 일은 아니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진시황이 그의 분신이었는지 그가 진시황의 분신이었는지 그것이 중요한 것은 아닐게다. 단지 그들 서로의 분신 중 하나가 없어진다면 당연히 남아있던 존재도 사라져야 한다는 것뿐.. 그래서 보이지 않는 2인자는 서글플지도 모르겠다. 자신의 이름을 내세우지 못하는 인생을 사는 것보다는 차라리 적은 희생속에서 정을 느끼며 살아가는 것도 하나의 행복일거라는 생각을 하게 만드는 이사의 일생이 아니었나 싶기도 하고...

이사라는 인물을 통해 들여다 본 중국의 역사는 길고 장대하다. 한사람의 꿈이 다른 사람의 꿈과 함께 어울려 커다란 밑그림을 그릴 수 있다는 것은 분명 멋진 일이다.  역사속에 진시황이라는 커다란 이름을 남길 수 있게 되는 그들의 여정속에서 하나씩 영글어가는 꿈을 맛볼 수 있다는 것도 굉장한 일이다. 그 달콤함 앞에서 불로장생을 꿈꾸었던 진시황의 끝없는 욕심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역사라는 기록을 통하여 한줄로 엮어지던 그들의 일생.. 책을 읽으면서 천년만년 살았을것만 같다는 착각이 들었던 것은 왜일까?  진시황의 썩어가는 육신을 바라보며 생의 허무함을 느꼈던 이사가 자신의 말로에 대한 대책을 세워놓지 않았다는 것은 아이러니다. 운명이라면 받아들여야 한다는 뜻이었을까?

장장 600쪽에 달하는 책이 상,하로 두권이다. 두께에 놀라고 그 두께가 두배라는 사실에 눌렸던 이 책에 대한 첫인상.. 하지만 그다지 감동적이지만은 않다. 솔직하게 말한다면 조금은 지루하다. 신식과 고전을 오가며 퓨전형식을 취했지만 다가왔던 느낌은 그저 그랬다. 일단 커다란 축을 세워두고 그 축을 받치기 위한 잔가지들을 만든다음 그 잔가지들에서 자라난 잎새들이 바람에 흔들리는 것들을 하나씩 묘사한 듯한 그런 느낌이었다. 그러니 커다란 물결의 파고를 만나고 싶어도 만날 수가 없다. 정석대로 흘러가는 단조로운 강같다고나 할까? 그랬다. 내가 이 책을 읽으면서 혹은 다 읽고난 뒤의 느낌은..  하지만 중국 역사의 한 획을 그었던 부분에 대하여 세세하게 알 수 있게 된 계기가 되었다. 방대하지만 흘러가는 물줄기는 하나였으니 말이다. 

진시황이라거나 중국역사속의 진나라에 대한 것들을 알고 싶다면 이 책을 읽어도 무방할 듯 싶다는 생각이 든다. 만리장성을 축조하고 화폐나 도량형을 통일했으며 그 유명한 분서갱유에 대한 배경들을 자세히 들여다 볼 수 있게 도와주니 말이다. 초나라의 하급관리였으나 하찮은 쥐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통하여 자신의 꿈을 일으키게 되는 이사라는 사람에 대하여, 그리고 그 사람이 어떻게 중국역사를 뒤흔드는 손이 되었는지  그 과정만큼은 절절하게 그려져 있다. 위인전이라면 너무 장황한 느낌이 없지는 않기에 하는 말이다.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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