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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흘만 걸을 수 있다면
장윈청 지음, 김택규 옮김 / 황매(푸른바람) / 2004년 10월
평점 :
품절
우보천리(牛步千里) - 소 걸음으로 천리를 가다,라는 뜻입니다. 이와 어울리는 두 권의 책을 보고 있습니다. 하나는 제목 그대로 《소 걸음으로 천리를 가다》라는 (무함마드 깐수 교수로 알려진) 정수일씨의 옥중 편지 모음이고, 또 하나는 《사흘만 걸을 수 있다면》이라는 중국의 근육병 환자의 수필을 번역한 책입니다.
자유가 극도로 제한된 감옥에서 우보천리하듯 학문에 대한 열정을 잃지 않고 매진하는 모습을 보며 참 많이 반성합니다. 선천적인 근육병으로 20여년을 방안에서만 지내고 있는, 그리하여 스물 여덟이라는 나이를 넘기지 못할 것을 스스로 아는 청년의 피땀으로 쓴 수필을 보면서 숙연한 마음으로 나를 반성합니다.
조금 전《사흘만 걸을 수 있다면》을 다 보았습니다. 아~ 서평을 어찌 써야할지 막막합니다. 점점 마비되어가는 손으로 매일매일 한 자 한 자 힘겹게 써나간, 그 정성으로 6년 간의 처절한 인내로 완성한 이 책을 어떻게 評할 수 있을지, 그럴 자격이나 있는지...
저자 장윈청(張雲成)은 3살 때부터 ‘진행성 근이영양증’이라는 불치병에 맞서 22년간 투병 중입니다. 진행성 근이영양증은 본래 근육에서 나타나는 일련의 유전성 질병입니다. 선천적인 유전적 결함으로 인한 세포막의 기능 이상으로 근원섬유가 파열, 괴사됨으로써 발생하는 근육질병인데, 세계보건기구가 지정한 인류 5대 불치병 가운데 하나입니다. 형제가 같이 걸리기도 하며 몸 전체 근육이 점점 괴사되다가 폐 부위 근육의 위축으로 인한 호흡곤란으로 급기야 죽음에 이르고 맙니다. 대개의 환자는 청소년기를 넘기지 못합니다. 저자 장윈청은 스스로 28살을 넘기지 못한다고 알고 있습니다.
중문판 책이 완성된 것이 2002년이니, 올해로 정확하게 24년간 투병중입니다. 그의 셋째 형도 동일한 병으로 27년간 투병중입니다. 지금쯤 살아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책 속의 내용으로 미루어짐작컨데 아마 지금쯤 살아있다고 해도 상당히 힘겨운 상태일 것입니다. 눈앞에서 생을 마감해가는 형을 보면서 - 그것이 자신의 미래이기도 한 이 청년은, 그래도 "난 반드시 현실과 맞서야 한다!"고 소리칩니다.
"병은 이미 걸린 것이니 울어봐야 아무런 소용이 없다. 남은 생을 허송세월하느니 차라리 힘껏 싸우리라! 내 이 싸움이 이상을 실현시키지 못하고 아무 성과도 거두지 못할지라도 난 진심으로 그것을 원한다. 왜냐하면 그건 어쨌든 헛되이 시간을 내버리는 것보다는 낫기 때문이다!" 이쯤 되면 환자에 대한 동정심을 넘어, 숙연함을 넘어, 고귀함과 존경의 마음을 가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알량한 동정심은 이 책 중반을 넘어서면서 흔적 없이 사라집니다.
1996년 6월, 헤이룽쟝 방송국 신문(黑龍江廣播電視報)의 편집자 장다눠(張大諾)가 장윈청으로부터 한 통의 편지를 받습니다. 장다눠는 곧 답장을 보냈고, 이 편지가 장윈청으로 하여금 운명을 바꾸리만치 강력한 힘을 줍니다. 책 중반쯤 장윈청은 장다눠의 고마움에 대해 많은 지면을 할애하고 있습니다.
누구에겐가 인생의 항로를 바꿀만큼의 큰 힘을 줄 수 있다는 것은 참으로 행복한 일입니다. 장윈청은 비록 스스로 삶의 종착역으로 다가가는 것을 지켜보면서도 마지막 순간까지 사회에 '기여'하고 싶다고 몇 번을 말합니다. 누구에겐가 전혀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가장 가슴아파합니다. 누구를 위해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자신을 보며 장윈청은 절망에 절망을 거듭합니다. 언제부턴가 그는 작가가 되는 것이 꿈이 됩니다. 작가가 되어 누구에겐가 그의 글이 도움이 되고, 그 글로 인해 수입도 생겨 가정에 조금이라도 도움을 주는 것 - 장윈청이 이런 '상상'을 하는 장면이 책 곳곳에 나옵니다. 그만큼 그는 간절했으며 결국 그는 그 꿈을 이룹니다. 6년 여의 시간 동안 - 저 같으면 단 하루도 견디기 힘든 그 순간들을 처절하리만치 강한 집념으로 17만자에 달하는 육필 원고를 작성합니다. 책 속에서는 상상의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는 그 장면 - 책을 출간하고 인세를 받는, 그 꿈의 결실을 저는 읽었습니다. 제가 본 것은 그의 수필이 아니라 그의 삶 그 자체였으며, 그것은 곧 세상에 대한 일갈(一喝)이자 언중유언(言中有言)이었습니다.
장윈청에게 진심으로 감사하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장윈청 - 당신은 정말로 큰 일을 해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