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둑 두는 여자
샨 사 지음, 이상해 옮김 / 현대문학 / 2004년 10월
평점 :
절판


샨사의 소설을 읽으면 비극적 사랑의 주인공이 되고 싶어진다. 역사적 비극도, 정치적 비극도, 전쟁 비극도, 개인적 비극도 모두 숭고하기만 하다. 아름답고 빛난다. [로미오와 줄리엣]이 오늘날까지 읽혀지는 이유도 그와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 [바둑두는 여자]를 읽으며 내가 아는 만주사변과 중일전쟁을 되짚어본다. 당시 우리나라는 가장 강력한 통치와 억압이 진행되던 일제강점기 막바지였다. [바둑두는 여자]는 바로 그 당시 중국땅에서 벌어진 만주사변과 중일전쟁 즈음이 배경이다. 쳔훵광장에서 바둑 두며 시간 보내는 일이 전부인 중국소녀와 천황폐하의 승리를 위해 군에 지원한 일본청년의 엇갈린 사랑 이야기이기도 하다. 바둑판에 흑백돌이 번갈아 놓이듯 소녀와 군인의 삶이 매 장마다 교대로 펼쳐지는 전략적이면서도 치밀한 구조를 지녔다. 간결한 문체와 군더더기 없는 연결이 샨사의 가장 큰 매력이라면 처녀작에서 이미 모든 것이 증명된 셈이다.  

소녀와 군인의 만남은 광장에서 바둑판을 마주하면서 시작된다. 이야기가 막바지로 향할수록 바둑판의 돌들이 어떤 식으로 엇갈리고 교차되는지 분간하기 어렵다. 어수선한 시대를 살아가는 청춘의 간절한 욕망과 절망이 아주 천천히 선명해지기 시작한다. 문장은 때로 눈앞에 펼쳐지는 생생한 광경 못지않게 시각적이다. 샨사의 문장은 모든 감각을 어루만진다. 아마 그 점이 평범할지도 모르는 그녀의 소설을 더욱 빛나고 아름답게 기억되도록 하는 거겠지만. 매번 비극적 사랑을 다루면서도 매번 다른 느낌을 준다. 현실을 자유자재로 다룰 수 없는 인간이 자유를 욕망하기 시작할 때 그 끝은 비극일 수 밖에 없다. 이 소설 역시 핏빛 비극이다. 전쟁이 개인적인 아픔으로 귀결될 때 이겨내지 못하는 절망은 결국 죽음을 부르기도 한다. [바둑두는 여자]가 [로미오와 줄리엣]과도, 영화 <색, 계>와도 닮았다고 생각한 것 역시 비슷한 맥락에서다. 

희망도 절망도 없는 무의미한 삶에 예고없이 불쑥 사랑이 나타난다면? 소녀는 길에서 우연히 민과 징을 만나게 되면서 성장하기 시작한다. 소녀는 민을 사랑하여 징을 절망에 빠뜨릴 수 밖에 없다. 모든 비극이 그렇듯, 얼마 지나지 않아 서로의 관계는 어긋난다. 사랑의 배신과 현실의 절망 속에서 어찌할 수 없는 소녀의 목소리는 마치 새의 그것처럼 작다. 소녀가 가장 비극적인 순간, 소녀는 가장 아름답다. 민의 아이를 가졌다는 걸 알게 된 후, 혁명군으로 몰린 민이 처형당하는 장면을 목격한다. 사랑이라고 생각한 것들이 사랑이 아니었다면? 소녀는 처형당하기 전, 탕과 키스하는 민을 보며 민이 자신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이용한 것이란 사실을 알게 된다. 소녀는 자신을 견딜 수 없어, 아기를 죽이기 위해 홍의 말대로 약사발을 들이킨다. 흘러내리는 피를 무덤덤하게 응시하며 다시 살아간다. 폭풍은 지나간다.  

그러던 어느 날, 바둑두러 나간 쳔훵광장에서 중국사람으로 위장한 일본청년을 만난다. 중국인으로 변장한 그에게서 느껴지는 특별한 감정은 소녀가 처한 상황 때문일까, 운명이 끌어당기는 사랑의 힘 때문일까. 공허함을 달랠 길 없어 바둑만 두는 소녀와 마음을 내려놓을 때 없어 유곽의 창녀들 틈을 전전하는 청년의 서로에 대한 애정과 연민은 곧 사랑이 된다. 하지만 그 뿐, 서로에게 더 이상 한 발짝도 다가설 수 없는 그들의 처지가 눈물겹다. 소녀의 용기있는 제안을 끝내 거절하고 돌아서서 후회하는 청년의 모습에서, 청년의 거절에 베이징으로 떠나버리는 소녀에게서 갈 곳 없는 청춘들의 애절함을 느낀다. 이별을 감수했으나 운명의 힘에 이끌려 죽이는 자와 죽임을 당하는 자로서 조우하는 이들은 용기없던 지난 날을 깨닫고 서로를 향한 영원한 사랑을 맹세하며 눈을 감는다.  

역사의 격동기를 살았던 청춘들, 안쓰러운 청춘들의 자유를 갈망하는 눈물에서 행동으로 얻어내는 진정한 희망을 본다. 자유와 돈을 저울질 당할 때 있어 자유를 선택하는 데는 한치의 고민도 없어야 한다는 소녀의 말처럼 진정한 자유를 위해 어느만큼의 희생을 감수할 수 있는지에 대한 고민을 해보게 한다. 어머니와 조국, 군인으로서의 맹목적 의지를 저버리고 소녀에 대한 사랑을 선택한 청년이나 마지막 순간 청년에게 짐이 되지 않으려 죽음을 택한 소녀에게서 느낄 수 있는 비극적 아름다움이 단지 소설이기 때문에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두 사람이 함께 나눈 바둑은 사랑의 시작이자 세상과 단절된 마음을 소통하는 장이었던 셈이다. 영원을 맹세한 사랑이 바둑을 나누던 짧은 시간보다 훨씬 길기를, 그 곳에서는 있는 힘껏 사랑하고 행복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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