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무도하
김훈 지음 / 문학동네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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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하게도 그동안 내게 너무 멀게만 느껴졌던 김훈의 소설들. 일부러 피한 건 아니었는데 문학을 공부하면서도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한 번도 그를 읽지 않았다는 사실이 늘 죄책감처럼 가슴을 짓눌렀다. 어쩌면 사회 비판적 성향이 짙어 보이는 작가의 인상에 지레 겁을 먹었는지도 모르는 일이지만, 무슨 말을 하든 게으른 나의 비겁한 변명이란 걸 알면서 읽지 않은 것이 아니라 읽지 못했다는 말이 더 어울리는 작가였음을 조심스럽게 고백한다. 그런 내가 감히 현대문학을 아는 척 해도 될까. 김훈을 읽지 않고는 현대문학을 논할 수 없다는 처절한 반성이 이 글을 쓰게 만들었다. 읽을 기회라는 게 주어진다면 바로 지금이라고 생각했다. 세련됨이 현대적인 거라고, 현대적이어야 청춘을 사로잡을 수 있다고 믿던 시절에 소재조차 고루해보이는 김훈의 소설이 내 시야에 들어올 리 만무했다. <~노래> 시리즈가 한창 대한민국을 떠들썩하게 할 때 구석에서 21세기에 무슨 이순신 일대기야 하던 건 나였고, <강산무진>과 <남한산성>이 인기 가도를 질주할 때 또 강이랑 산이야 하며 하품하던 것 역시 나였다. 그런데 이제와서, 겨우 지금에 와서야 그가 내뱉는 세계의 아릿함을 모르고 지나온 20대의 절반이 못내 한탄스럽기까지 하다. 내게는 언제나 좀 더 일찍 알았으면 하는 것 투성이다. 나는 그런 사람이다.

시조인지 시인지 모르는 작자미상의 公無渡河歌는 옛 것을 지루해하던 나에게 제일 먼저 다가와 손을 내밀어준 옛 글이었다. 우연히 듣게 된 국문학 수업에서 뒤늦게 옛 시의 고풍스러움을 깨닫게 된 것이야말로 오늘날 이렇게 김훈의 <공무도하>를 만나기 위해서가 아니었을까. 나에게는 모든 현상을 어떻게든 인연으로 엮어 보려는 엉뚱한 버릇이 있다. 한 번 발동하기 시작하면 복잡미묘한 세상도 때로 별 것 아닌 것이 된다. 나는 그게 좋다. 온 세상이 내 손바닥 안에서 꿈틀대는 느낌. 그럴 때 세상은 완전한 내 것이 된다. 하지만 내가 쥔 세상이 반드시 아름답다고만 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세상은 처음부터 내가 부른다고 달려오는 만만한 존재가 아니었던 탓이다. 이 사실을 깨달을 때면 나는 이미 강을 건넜을지도 모른다. 세상이 그렇다. 죽음의 강 레테는 한 번 건너면 두 번 다시 돌아올 수 없다. 건너고 싶을 때 건널 수 없고, 돌아오고 싶을 때 돌아올 수 없지만 돌고 돌다보면 어느 순간 같은 자리에서 만나게 된다는 걸 우린 그저 본능으로 알고 있다. 그런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아무리 애써도 근본적으로 달라질 수 없는 것, 나의 것과 너의 것이 동일하면서도 다른 것, 눈 앞에 건너야 할 강이 있지만 건널 수 없는 것.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고, 이것도 저것도 아니면서 이것 아닌 것도 저것 아닌 것도 아닌 것, 삶. 김훈의 <공무도하>는 인간 본연의 비루한 삶에 대해 이야기하지만 호들갑스럽지 않고 오히려 담담하다. 지금은 모두 혼자이지만 언제든 함께가 될 수 있다는 희망을 전제하고 있기 때문이리라.

살아간다는 것은 더 없이 치열하면서도 또한 치사하다. 언제 죽어도 아무도 울어주지 않는 삶들이 지천에 널렸지만, 그게 내가 아니라고 장담할 수 없는 사실만이 유일한 사실이다. 모든 인간사의 중심에서 부지런히 사건을 날라다 주는 기자 문정수를 통해 우리는 비로소 돌아보게 된다. 의붓여동생을 강간한 친아버지를 쇠절구로 쳐죽인 아들, 혼자 방치되다시피 자라다 키우던 개에게 물려 죽은 소년, 어딘가에서 TV를 통해 소년의 죽음을 접하고 소멸한 엄마, 누군가를 고해바친 댓가로 살아난 고얀 목숨, 생산직 노동자의 취중 실족사, 아직 개통되지 않은 도로에서 크레인에 치여 즉사한 17세 소녀, 딸의 보상금으로 거액의 빚을 갚은 아버지, 결혼이민으로 시집온 베트남 여인, 그리고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걸 알면서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사람들. 그저 관찰자의 역할 밖에는 주어지지 않은 사람들. 우리 중에 주인공도 있고, 관찰자도 있다. 누군가는 주인공이고 누군가는 관찰자가 되는 것, 때로 두 가지 역할을 모두 수행하는 것. 그것이 바로 인간사다. 인간이 처음부터 비열하고 치사하고 더러웠던 것은 아닐 것이다. 아름다웠던 적도 있었을 것이다. 아니, 반드시 그랬을 것이다.

소설 초반 발생하는 홍수는 강을 건너지도, 건너지 않을 수도 없는 이들의 발작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다. 또한 마지막까지 강을 건너지 못하는 인간의 추악한 단면을 확인할 수 있는 단서이기도 하다. 홍수는 정말 인간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초자연적 힘일까? 어쩌면 홍수야말로 인간의 욕망과 허상이 만들어낸 거울 속의 거짓 세상, 그 집합체가 아닐까? 그렇다면 해망이 가진 과거의 상흔과 현재 해망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업 앞에 보상이라는 이름의 작업이 과연 가능할까? 합리와 불합리, 선과 악, 이성과 비이성이 부딪치는 빈번한 소음이 우리에게 가져다주는 진실은 언제나 시간의 흐름에 따라 인간의 욕망도 흘러가고 있다는 것 뿐. 그것은 동시에 걸어갈 수 없기에 언제나 어긋날 수 밖에 없는 보상불가능한, 시간 너머의 것이다. 개발로 인한 삶의 터전을 돈으로 보상할 수 있다면, 이미 일그러진 그들의 삶과 빼앗긴 평화와 충만의 시간은 과연 무엇으로 보상할 수 있을까.

우린 아무도 낙타처럼 가볍게 시간 너머로 갈 수 없다. 강을 건널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달아나는 것을 추적할 수도 없다. 인간중심적 개발과 자연친화적 개발이 양립할 수 없는 것처럼 인간의 존엄과 생명의 고귀를 물질로 환산할 수는 없어야 한다. 인연의 맺고 끊음을 반복하며 생존 자체로 파닥거리던 인간이 언제부터 돈을 위해 인연을 응집시키고 해체시킬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되었단 말인가. 이 비극을 단지 바람에 날리는 소금먼지나 똥먼지를 보상하듯 돈으로 환산시킬 수는 없는 것이다. 없어야만 하는 것이다. 살기 위해 타인의 장기를 사는 행위가 종교적 신앙과 박애의 양심이라는 이름으로 더할 나위 없이 가볍게 정당성의 날개를 달았듯, 온 존재를 다하다가 어느 순간 사라지는 노을과 안개의 습성처럼, 얼마남지 않은 마지막 날들의 시간을 우린 악착같이 양심을 파는데 할애하고 있다. 온 세상의 모든 관심이 하나로 집중되는 날, 누군가는 불행에 떠밀려 저 세상으로 건너가는 것이다. 이것이 사람인데, 삶인데, 인간사를 두고 감히 누가, 존재의 옳고 그름을, 무슨 근거로, 어떤 방식으로 단정할 수 있단 말인가. 절대로 강을 건널 수 없다고 함부로 말하지 말자. 좀 더 나은 삶이, 인간이, 세상이 어딘가에 있을 거라고 믿자. 그럴 수만 있다면 홍수가 그칠지도, 희망이 고개를 들이밀지도 모르는 일이다. 우리의 미래를 큰소리로 말하자. 희망을 끌어안자. 말할 수 있는 이야기보다 말할 수 없는 이야기를 더 많이 가진 기자 문정수는 자신을 태우고 강을 건너줄 노목희가 떠난 한국에서, 강변의 아침 안개를 무사히 맞이할 수 있을까. 그는 또다시 자신에게 담긴 숨겨진 이야기를 들려줄 사람을 찾아야 할 것이다. 나였으면 좋겠다. 슬픔, 아픔, 비열함, 희망. 이 모든 것이 나였으면 좋겠다. 기삿거리가 전혀 없는 서북 경찰서에서 동남 경찰서로 발걸음을 옮기는 그의 인생 무게가 더 가벼워질 수 있도록. 내가 날면 모든 것이 날도록. 내가 건너면 모든 것이 함께 건너가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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