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물 세 살에 처음 만난 로맹 가리는 낯설고 벅찼다. 새들이 차례로 페루의 해변에 널부러져 죽어버린 장면이 생생해서 오래도록 가보지 못한 곳을 떠올리고 또 떠올렸다. 상상에 상상을 거듭했다. 쿠바와 페루는 그즈음 모든 청춘들의 낙원이자 체 게바라의 도시였다. 여행지가 아니라 혁명 자체였다. 한때 그곳을 시로 옮긴 친구가 있었다. [바나나피시를 위한 완벽한 날] 이후 처음 맞는 완벽한 단편이었다. 남아메리카의 여행기를 생명줄처럼 붙잡고 살던 때, 로맹 가리와 에밀 아자르가 이인화와 류철균만큼 강하게 묶였다. 두 개의 이름을 쓰고 생(生)을 비극적으로 마감한 작가와 처음 만난 단편이 너무나 강렬해서 그 후로 오랫동안 다른 작품을 가까이 할 수 없었다. 멀찍이 떨어져도 감동이 여전했다. 온갖 상념들이 가루로 부서졌다. 나는 어렸고 어두웠고 맑았다. 스물 셋의 나이에는 어울리지 않는 감격이었다.
그가 어떤 사랑을 했든 어떤 삶을 살았든 무슨 상관이겠는가. [네 멋대로 해라]는 누벨바그,프랑스라는 키워드 없이도 여전히 가장 설레고 가장 달콤하고 가장 아름다운 영화로 기억된다. 함께 걷는 길의 뒷모습이 오랫동안 잊혀지지 않았는데 solely, 공감을 이끌어내지도, 이해하지 못하는 것도 없이 경계선에서 울렁울렁 날 시험하는 이 영화가 나는 그렇게도 좋았다. 그렇게 한 번 접하고 너무 좋아서 저 너머로 밀쳐버린 두 사람이 사랑을 나눈 사이였다는 걸 이 책이 나오기 전에는 몰랐다. 아니, 나온 후에도 계속 모르고 싶었다. 뚜렷하지도 않고 선명하지도 않은 이유모를 끌림으로. 스틸 한 컷에도 가슴이 뛴다. 시가를 문 카뮈의 초상을 볼 때와 마찬가지로 쿵쾅쿵쾅. 선물하는 흑백사진에 당신도 그랬으면 좋겠다.

한때 어떤 식으로든 결론지어야 하는 남과 여의 관계가 늘 어려웠다. 나를 다 아는 척 성큼 다가오는 사람이 부담이었고, 확 끌어당겨도 가까워지지 않는 관계가, 여동생과 후배와 여자가 각각 다른 존재란 걸 깨닫는 것도 싫었다. 몰라도 좋을 것들을 알게 되는 순간이 죽기 보다 싫었다. 파리에 가보고 싶다는 생각을 처음 한 건 이 영화 때문이었다. 이전까지 나는 어딘가로 가야겠다는 생각 자체가 없었다. 갈 수 있을 거란 기대가 없었을까. 여튼 감정이 휘몰아쳐 참을 수 없게 튀어오른다. 그즈음 몇 개의 그런 것들이 있었지만 대부분 잊었다. 잊혀졌다고 해야 하나. 그래서 기어이 떠올리지 않고 끝내겠다. 말할 필요도 없겠지. 나와 당신이 이야기를 나누며 단지 길을 걷고만 있어도 완벽하게 아름다워지는 도시가 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건 이전에는 단 한 번도 희망하지 않은 거였다. 내가 품은 도시는 예루살렘 정도 됐을까. 성서와 신화와 유적과 종교를 온갖 관념적인 상념으로 동경했었다. 왜 매달리는 지도 모른 채 그것들이 좋았다. 낭만을 사랑한 적이 별로 없다. 파리는 실제로 그렇게 낭만적인 도시인 것 같지도 않다. 낭만을 심는 예술가들과 삶을 즐길 줄 아는, 보헤미안을 지향하는 파리지앵들만이 있을 뿐.
여기서 잠깐, Queen의 'Bohemian Rhapsody'는 정말 좋아하는 곡이다.
이 노래를 들으면 Electric Light Orchestra의 'Midnight Blue'가 떠오른다.
그리고 언젠가 구상했던 소설의 배경(소설이 아니다;;)이 생각난다.
그렇다고;;
생각해봤는데 난, 짧지만 강렬한 사랑이 하고 싶었던 거지, 그들의 사랑 이야기에 흥미를 느끼는 타입은 아니다. 스스로를 죽일 만큼 정신착란을 겪는 예술가들의 삶이 예술애호가로서 동경스러운 것 다름 아니다. 언젠가 이혼도 안할 거고 죽지도 않을 거고 가난도 모르고 그러니까 내가 정말로 작가나 화가나 예술가 같은 건 되지도 못할 거고 되는 일도 없을 거라며 자책했더니 보통 사람과 예술가의 경계에 선이 하나 그어졌다. 세상에 마치 두 종류의 사람만이 존재하는 것처럼. 누구에게도 보이지 않지만 내 눈에는 선명한 그 선은 오래도록 다른 세상을 향해 써먹었다. 내가 모르는 세상도 있어. 키가 165cm인 내가 7cm짜리 힐을 신는다고 실제로 7cm 크는 게 아닌 것처럼, 165cm에서 본 세상과 172cm의 세상이 다른 것처럼, 그 착란과 거짓을 진실인 것처럼 사는 날들에 늘 변명의 구실이 되어주었는데 부활의 새 앨범은 내가 그은 선이 조금씩 희미해질 때쯤 내게로 왔다.
[Purple Wave]는 음원으로 나온지 좀 됐는데 음반이 여전히 예약판매중. 이 푸르스름한 보라색이 한동안 가슴을 뒤흔들었음은 두 말할 나위 없다. 한동안 듣기 편한 안전한 발라드로 가던 이들의 음악이 초기 분위기로 완전히 돌아섰음을 알리는 초인종 같은 반가움. 하지만 그들의 예전 음악까지 알지 못하는 내 당혹스러움. 이 모든 것들을 감싸는 설렘이 이 음반의 정체성을 표현하는 나의 단어다. 언어는 명확하지 않으므로 당신의 감성에 기대어 위험하고도 야릇하게.
보라색이 아닌 '파동'에서 이 앨범의 특징을 찾고 느끼고 들으려 한다. 오랫동안 보라색을 무서워했지만 한 순간의 이유로 좋아진 것처럼 아무리 달라져도 부활은 부활이기 때문에 늘 부활하는 감성의 느낌으로 찾아온다. 좋아하는 음반 하나 고스란히 시간바쳐 못 듣고, 아끼는 음반 하나에게 온종일 내어줄 시간조차 없는 이 시간들이 무얼 위해 나아가는 중인지 잘 모르겠지만 분명한 건 내가 달라지지 않는 한, 원하는 곡도 원하는 사람도 언제나 그 자리에 있어주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변하지 않으면서 변해가는 것이 살아가는 일 아니던가. 행성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보는 나직한 목소리의 PLUTO가 낯설면서도 애잔하다. 도달하지 못할 곳에 도달하려는 작은 아이의 소망처럼 한없이 가라앉는다. 그러면서도 힘차다. 예전보다 락이 많이 가미된 곡들이 달리 느껴진다. You're my one sided love. 를 외치던 내 이십대의 예쁜 순간은 가버렸지만 여전히 지난 순간을 그리워할 나이는 아니다.
늘 (잃어버린 것, 놓친 것, 지나간 것을) 붙잡으라고 말하는 가사들인데 내게는 언제나 (새로운 것, 오는 것, 원하는 것을) 기다리라는 것처럼 들렸다. 가사가 범공간적으로 뻗어나가도 그들이 노래하고 연주하는 바는 언제나 전해지는 것과 같다는 사실이 안심이다. 한 번쯤은 보라빛 하늘이 요동치는 꿈결 같은 광경을 보고 싶은데, 언젠가는 새들이 수평이 아니라 수직으로 나는 광경을 구경하고 싶은데, 당장이라도 훤한 대낮에 아주 동그란 태양만이 흑백의 열기를 내뿜는 세상을 만나고 싶은데, 바다와 별이 만나고, 시간이 사라지고, 서있는 공간이 삭제되는 낯선 경험을 겪고 싶은데 안되겠지?!
시간을 가두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오지 않는 이를 기다리고만 있는 것도. 굳이 내가 아니라도 넘쳐흐르는 세상에 자꾸만 뭘 더 보태려 하지말고 지우고 소멸하고 다시 써야 한다. 새로 시작해야 한다. 버려야 새로 얻는다는 걸, 시도와 시도가 결국 시도하지 않음으로 만나리란 걸 아프게 깨달았다. 조금 틀어졌지만 무엇을 시도했는지에 대해서는 함구할 이 앨범처럼 날긴 날되 어디를 향하는지 모르는 방향을 설정한다. 내가 어떤 사랑을 했든, 어떤 삶을 살았든. 당신이 어떤 사랑을 했든, 어떤 삶을 살았든. 행여 이 모든 것이 현재진행형이라 해도 나와 당신의 관계에는 아무 문제될 게 없다. 나를 향한 당신의 믿음에 의해 당신의 향한 나의 믿음의 크기가 결정되는 게 아니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