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1 때 자우림 노래가사 중에 '엄마, 미안해요. 아무도 내 곁에 있어주지 않았어요. 아무런 잘못도 나는 하지 않았어요.' '사실은 난 더 살고 싶었어요. 이제는 날 좀 내버려두세요.' 하는 부분을 들으면 꼭 학교나 아파트 옥상 위에 한 번쯤 올라가봐야겠다는 생각이 들곤 했다. 꼭 누가 옥상 끄트머리 어디쯤에 서있을 것만 같은 느낌에. 낮에 학교에서 이어폰을 나눠끼고 함께 듣던 음악이 밤에 독서실에 갇힌 우리의 일상을 파먹고 있었다. 왜 우리는 이래야 할까. 나는 학생이었고, 학교에서 친구들로부터 내몰린 어떤 절망에 처한 아이의 절규를 생생히 상상하며 처음으로 죽음을 배웠다. 이전의 죽음이 추상적인 어떤 것이었다면 이후의 그것은 실체적 두려움이었다고 볼 수 있겠다.
서점에서 너덜거리는 견본을 보고는 집에 와서 얼른 주문했는데, 내가 청개구리 뺨치게 웃긴 애라서, 웃기게도 서점가면 나는 어느 책의 글자 한 자도 제대로 읽지 못한다. 그날도 서점 갔는데 엄청나게 많은 책과 인파 속에 묻혀 한참을 앉아있다가 돌아왔다. 사서 들고 돌아올 힘도 나지 않아, 대충 이런 책이 있구나,하며 실물구경을 하고 왔는데, 이 책의 장르를 전혀 몰랐었던 거다. 받고나서 알았다. 아, 안 죽는 여자에 관한 얘기가 아니고, 불멸하는 세포 이야기였다. 실망했다. 뭘 기대한 거야. 진짜 20년 전에 묻고 온 엄마가 살아있다는 걸로 생각한 거야 뭐야.
헨리에타 랙스의 이야기를 쓰고 싶었다고 저자가 말했다. 그게 누군데. 그녀의 사진도 보고 그녀의 가족사진도 보고 그녀는 꽤 오래 전에 내가 사는 지상과는 결별한 사람이란 것도 알았다. 이 책은 이 여자가 남겨놓고 간 '헬라세포'를 둘러싼 온갖 것들을 풀어놓으면서 '생명윤리'와 '불멸하는 생명'을 말한다. 이 여자가 자궁경부암 판정으로 사망한 후, 동의 없이 추출된 '헬라세포'는 끊임없이 분열하는 암세포로서 그동안 소아마비 백신, 항암치료제, 에이즈치료제 개발은 물론, 파킨슨병 연구와 시험관 아기 탄생 등 생명공학과 의학 발전에 결정적 구실을 했다. 보통 세포의 분열은 유한한데, 이 세포의 분열은 영원해서 그녀는 죽어서도 영원히 죽지 못한 것. 그녀는 죽어서도 죽지 못하고 살아서 죽어가는 사람들의 빛이 되고 희망이 된 것. 나는 과학에는 별 흥미가 없는데 작년엔가 '서프라이즈'에도 나오고 이렇게 책으로도 나오고, 누군가의 몸에서 체취된 하나의 세포가 실험동물을 대신해서 이토록 큰 성과를 올리다니 신기하다. 가족들의 삶은 망가질 수밖에 없고, 고통을 겪었을텐데, 연구가 먼저인지, 생명에 대한 예의가 먼저인지 또 한번 답 없는 의문에 휩싸여서 고민. 하지만 희생이 없다면 또 어떻게 발전이 있을까. 연구할 사람은 연구하고, 지킬 사람은 지켜내고 그래야지.
이 책을 살 때 나는 사실상 '공감'이 아니라 '진화'에 방점을 찍어 샀다. 그런데 당연히 '공감'에 관한 책이다. 정확히 '공감'이 시대에 따라 진화해온 과정을 설명하는 책이다. 고고학 혹은 인류학 적으로 '공감'이 발전해온 길을 살피면 '우리'와 '타자'를 구분할 수 있는데, 이건 단지 석기시대 생존논리일 따름이라는 것. 오늘날에는 '우리'와 '타자'의 거리를 좁히는 것만이 '공감'하는 길이고, 현재 지구상에 존재하는 어떤 문제점도 이 거리를 좁혀야만 해결방법을 모색할 수 있다고 한다. 바로 이것이 공감이 진화하는 방향이라는 것이 요점인데, 왜 이렇게 내용이 많지? 물론, 공감하면 살아가기 쉽다. 하지만 반드시 공감해야만 하는가,라는 의문은 여전히 남는다.
'갈등'의 순기능을 나는 매력적으로 본다. '갈등'하는 상황 자체가 좋다는 건 아니고, 내가 감정이 휙휙 변하는 변화무쌍한 성향을 가진데다가 사는 게 무지하게 심심했기 때문에 늘 무슨 일이 일어나야 한다면서 사람을 슬슬, 자극한 건 아니고;; 내가 어딘가로 갈 수 없는 상황이라면 나를 둘러싼 주변상황을 재미있게 만들어야 했다. 하지만 '갈등'의 순기능은 그런 게 아니라 긴장감을 높이고 자극해서 상대를 발전하게 한다는 점에서 조직에서 꼭 필요한 것, 없으면 무기력해지는 것(늘 1등하는 사람은 남보기에는 몰라도 스스로 따분하듯이), 그러므로 발전이 없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공감'은 '갈등'의 순기능을 의도적으로 누르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한데(전혀 다른 문제일 수도 있고, 책은 이 둘을 대립관계로 보지 않는다), 일단 이 책이 말하는 것은 두루두루 더불어 살아가기 위해서는 '공감'이 필요하고, 이 공감할 수 없는 이유와 공감해야 하는 이유의 사례들을 들고 있다. '우리'와 '타자'의 관계가 명확하기 때문에, 지구촌 사회에서 굉장히 동시다발적으로 상반된 이해관계를 불러올 수밖에 없으므로 '공감'하지 못하는 것이다. 이 거리를 좁히자,까지만이다. 황당무개하지만 '지구촌 전체를 1국가/1정부로 만들자'는 우스갯소리가 아주 턱없어 보이지도 않는다. 재밌겠다. 카다피는 아프리카 대륙을 통합해서 '왕=신'이 되려고 했다는데. 왜 관계를 나눌 수밖에 없는지, 나누어지는지에 대해 고민해야 하고, 그 또한 중요하지만, 모든 이해관계가 자발적 공감에 의해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타성적 억압에 의해 수용되도록 강요된다면 그 반발은 더 심해지고 대립각은 예상할 수조차 없다. 있는 그대로 인정해주는 것이 '공감'인지, '타인'을 '우리'로 끌고 오는 것이 '공감'인지 불명확하다.
나는 그저 이 책에서 말하는 '연결본능'이나 '개인주의의 종말' 파트가 반가울 뿐이다. 다만, '공감'이 오로지 개인영역 안에서 개개인의 정신작용으로만 일어나는 '동조화'일 뿐인지는 모르겠다. 인종/종교/지역/학연 등으로 '우리'와 '타인'을 발견/구분하는 일련의 예와 거기에서 벌어지는 문제점과 폐해, 무리의 본능과 자/타 구분 본능과 역사, 오늘날 '우리'의 재발견까지 이야기하는 이 책은 딱딱해 보이지만 흥미롭다. 하나 되기 위해 몸부림치며 쫓아내야 할 타의/다양성/자유는 어떻게 지킬 수 있는가,하는 것은 내 근심일 뿐. 둘을 조합하여 공통으로 가능한 '공감'이라면 더없이 좋겠지만 한 두군데 손 봐서 될 일이 아닌 이 모든 분야를 통합/재배치 하여 거대한 70억 인구를 하나의 지구로 만드는 프로젝트가 가능할지 궁금하다.
나는 '에쿠스'의 실수에 분노했고, 뭘 기대한 내가 바보인지(물론 과대확장한 결론이었으니;;), 법 없는 '범죄의 사각지대'에 있는 사건의 당연한 결과인지, 경찰의 부정부패인지 모르겠다. 하긴 어제 분노하고 오늘은 그런 내가 웃겨서ㅋㅋㅋ(강아지에게 미안한 건 미안한 거고, 고의가 아니라 실수라면(경찰이 조사 후 그렇게 말했으니) 사람을 먼저 감싸야 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
왜냐면 '공감'의 진화를 읽고 있으니까.
근데 이효리는 왜 폭풍악성댓글에 시달리는 걸까. 나도 악담은 지워야 할까;; 지우지 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