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미니츠 SE (2disc)
크리스 크라우스 감독, 모니카 블리브트리우 외 출연 / 대경DVD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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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자고 있을 때 엄마는 홈쇼핑에서 검은콩과 땅콩&호두 맛의 대용량(크다는 뜻 아니고 많다는 뜻) 두유를 구입했다. 주문했으니 택배 아저씨를 외면하지 말고 잘 받으놓으라는 지침이 있었는데 다행히 내가 아니라 엄마가 두유를 맞이했다. 무거운 박스를 경비실에서 낑낑대며 들고올 뻔 했으니 이런 구세주여. 스물 네 개들이 네 박스. 자그마치 아흔 여섯 개. 내가 허리띠 졸라매야 되니까 당분간 홈쇼핑에서 뭘 좀 사지 말라고 바로 어제 얘기했는데, 푸하하, 엄마 또 질렀어ㅋㅋㅋ 이왕 산 거 맛있겠네, 식전에 하나 받아들고 낼름 빨대 꽂아 몇 모금, 그리고나서 김치볶음밥을 먹었는데 그만 배탈이 나는 바람에 먹다 남은 두유는 식탁에 놓고 화장실 다녀온 다음 혹은 한끼 식사 더한 후 또 한 모금, 다시 배가 살살 아파질 것 같은 기우에 또 식탁 위. 이게 바로 하나를 세 개처럼 먹는 방법이다. 96개를 언제 다 먹을 거며, 이걸 다 먹기까지 얼마나 많은 탈이 날지 무서워졌다. 그리고 <포 미니츠>를 봤다. 지난 크리스마스에 보려고 고른 영화지만 크리스마스즈음부터 연말까지 북적북적 부웅 하고 뜬 마음은 도무지 가라앉질 않았다. 정작 크리스마스는커녕 연말에도 단 한 편의 영화조차 보지 못했다.

 

두유와 <포 미니츠>는 어쩐지 잘 어울려서 하루쯤 밥 안 먹고 커피 안 마시고도 거뜬할 것 같다. 행복하다. 전기매트의 온도를 한껏 올려 엉덩이가 뜨거울 만큼 따뜻한 곳에 앉아있자니 안락함에 벅차오른다. 노트북 옆에는 읽어볼까 하면서 방금 책장에서 뽑아온 버지니아 울프의 <자기만의 방>이 제발 날 좀 읽어주세요, 소리친다. 못 읽어줄 것 같은데, 새삼 너무 두꺼워보여. 

 

처음에는 4분이라는 제목을 가진 촌스러운 영화에 대해 써볼 생각일랑 없었다. 제목이 이게 뭐야. 영어로 바꾼다고 더 나아지는 것도 아니었다. 어젯밤 잠들기 직전 적막함을 못 이겨 틀어둔 영화가 30분쯤 혼자 재생되고 있는 걸 몇 번 건성으로 눈길 주었던 영화다. 껌뻑이는 눈으로 보다가 반쯤 눈을 감기도 하고 졸고 그러다 푹 빠져버렸다. 일어나서 맨 정신으로 봐야겠다 하면서 다시 일어나 끄고 잤다. 영화는 무의식과 무지로도, 혼돈과 적막 속에서도 봐지는 거란 걸 깨닫고는 경이로웠다. 피아노 연주(연습)가 나오기 전이었는데도(지리한 스토리였는데도) 홀랑 빠져버린 것을 두고 그 흔한 "감동"이라고도 못하고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설명할 수 없는 이유로 어릴 때부터 음악영화가 좋았다. 평범한 사람의 천재성을 아름다운 하모니와 연주의 혼합으로 그릴 때 감동은 뻔할 만큼 닳아있는 것들인데도 불구하고 피아노를 꽤 오래 배웠다는 것과 학창시절 예고나 음대를 진지하게 생각했었다는 사실만으로 피아노는 특별했다. 클래식을 들을라치면 꼭 피아노로 연주된 곡만을 원했다. 씨디도 그렇게 골랐다. 그런데도 내 인생이 아니 내가 피아노를 피해버린 건, 피아노를 전공하면 정말 하고 싶은 작곡도 배울 기회가 생길거라는 사실을 염두에 두면서도 나는 종종 피아노를 지겨워했고, 악보 없이 즉흥연주 할 줄을 몰랐기 때문이다. 천재들은 다 그렇게 하던데, 난 악보 없이는 아무런 건반도 누를 수 없다는 걸 알아차린 것이다. 당연히 나는 음악천재가 아니었다. 악상이 절로 생각나고 마음 가는대로 변조하여 연주하는 황홀스런 연출은 진정 천재적 피아니스트에게만 있을 수 있는 일이란 말인가. orz

 

예고와 수능 예체능반과 예술대 음대 같은 것들의 특수성을 스폰지보다 가볍게 버린 나는 딱히 아쉬워하지도 않았다. 그 길이 내 길이 될 수도 있었는지는 지금도 알 수가 없지만 재즈 피아니스트 진보라나 두 손가락 피아니스트 이희아를 보면서 피아노를 친다는 것은 어떤 것일지 종종 떠올려보는 것 외에 내 인생은 피아노와 어떠한 관련도 없다. 엄마가 거실에 한 자리 차지하고 있는 오래된 피아노를 자꾸 버리자고 하는 것과 싸우는 일 말고는.

 

나와는 반대로 <포 미니츠>의 제니는 천재적인 재능을 갖고도 다른 길로 가기 위해 악착같이 애쓰는 아이다. 피아노를 쳤었고 천재라는 소리를 들으며 자랐지만 아빠가 원하는 것만을 칠 수 없었던 그녀는 피아노를 버렸다. 인생 대부분의 시간을 재소자들에게 피아노를 가르쳐온 크뤼거는 어느 날 행동과 말투가 거칠고 난폭해서 교도관조차 혀를 내두르는 냉소적인 제니를 만나고는 그녀의 천부적인 재능을 알아본다. 온갖 어려움을 뚫고 거부하는 그녀에게 억지로 피아노를 가르치려 한다. 둘이 처음 만난 날 여느 때처럼 분노와 발작에 휩싸여 담당 교도관을 때려눕히고 감금되는 제니가 안쓰럽고도 아쉬운 크뤼거는 많은 이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교도소장에게 제니의 피아노 콘테스트 참가 허락을 받아낸다. 이제 매일 제니와의 피아노 연습을 진행해야 하는 크뤼거는 피아노 뿐 아니라 아직 작고 여린 여자아이의 투정과 상처, 외로움과 침잠하는 자아까지 고스란히 받아내야만 한다. 함께 있는 시간이 길어질 수록 서로에게 의지하면서 좋아지는 관계에도 현실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제니는 시기하는 재소자들로부터 위협을 받기도 하고 교도관은 연습 중에도 수갑을 풀어주지 않는다. 거대한 벽 앞에 닫혀가는 서로의 마음들. 

 

제니가 교도소에 온 이유, 크뤼거가 오랫동안 매일 재소자들에게 피아노를 가르쳐온 이유가 설명되는 것과는 별개로 이 영화는 황홀하고 아름답다. 나이를 뛰어넘은 두 여자의 우정, 서서히 열려가는 마음과 싹트는 믿음, 서로의 비밀공유, 예술혼으로 결합되는 잔잔하면서도 안고 싶어지는 거대한 피아노 선율까지 감동의 준비와 발사를 온몸으로 갖춘 완전한 영화다. 눈치 챘겠지만 영화는 내내 제니의 첫 연주 "4분"을 향해 달려간다. 그녀가 제 안의 슬픔, 분노, 오열, 자아, 고독을 온전히 꺼내놓을 수 있을 때까지 우리는 크뤼거가 되어 그녀의 성장을 지켜보며 가슴 졸인다. 때로는 제니가 되어 연주를 하기도 하고 작은 가슴 안에 흐르는 예술의 혼을 쥐어보려 애쓰기도 한다. 영화의 마지막 "4분"은 더없이 황홀했다고 많은 리뷰가 쓰고 있었다. 새삼 감동적이고 아름다운 연주였다고 쓰지는 않으려 한다. 그저 연주, 누구보다 멋졌지만 누구와도 달랐던 미숙하기만 했던 말썽부리는 발작쟁이 제니의 연주만을 가슴 깊숙이 기억할 것이다.

 

기적은 쉽게 일어나지는 않지만 어느 곳에서나 온다. 가슴 안의 감정들을 폭발시킬 수 있을 때에, 어떤 것을 제 진심을 다해 온 마음으로 잡으려 할 때에, 같지 않지만 이해하고 아끼는 마음이 서로 만나는 지점에서, 니가 무엇을 하든 내가 지켜보고 웃어줄 것이라는 마음이 집결할 때에 비로소 기적은 일어나고 감동은 탄생하며 한 편의 영화는 사소하기 그지없을 지라도 내게 최고가 된다는 것을, 아직 모자란 나지만 조금은 알 것도 같았다. 2012년은 겨우 일곱 번 째 날을 지나고 있을 뿐이니까. 앞으로 더 많이 알게 될 것이다. 계획은 사소하고 큰사람이 되기를 바란 적 없지만 감동있는 해가 되기를, 감동줄 수 있는 사람이 되기를. 그리고 이 글을 읽는 모든 분들의 꿈이 하늘에 닿았으면 좋겠다. 당신들의 이야기는 언제나 내게 감동이었음을 뒤늦게나마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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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 2012-01-07 22: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두유가 무려 아흔 여섯개나 있다는 말씀이신가 말입니다!
ㅡ크으, 또 제가 두유 킬러인데 부럽습니다... 요즘에 그러고보니
집에 두유를 사놓질 않네요. 생각난김에 말해야겠어요.

포미니츠 은근히 멋진 이름인걸요 제게는 ㅋㅋ
게다가 음악영화라는 말입니까... 하아, 또 한 번 구해봐야겟군요 ㅠㅠ

아이리시스 2012-01-09 14:57   좋아요 0 | URL
며칠 지나버려서 두유는 많이 사라졌어요, 소이진님ㅋㅋㅋ
이게 독일영화라 지루한 것까지 견디며 보라고는 못하겠어요.
어릴 때는 그런 게 좀 싫지 않아요?
재밌는 걸로 봐요, <어거스트 러쉬>나 <비투스>가 더 나을 것 같아요^^

월요일 잘 보내요~^-^

프레이야 2012-01-07 22: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리시스님도 꿈이 하늘에 닿길 바래요. 풍선처럼 두둥실 기분좋게 높이요~~
이 영화 가슴 아프더군요.
그 아이의 상처를 어떻게 어루만져 줄 수 있을까요.
어른의 몫이 참 단단하다는 생각도 들었구요.
그 천재소녀의 광적인 4분 연주가 무척이나 강렬했던 기억입니다.

아이리시스 2012-01-09 15:00   좋아요 0 | URL
히히, 감사합니다, 프레이야님.
제 올해 결심은요, 일단 봐야지 하는 책은 망설이지 말고 다 사는 거예요.(기준이 까다로움)
저는 읽는 것보다 사서 모아두는 게 더 귀찮아서(집에서 안 읽은 책이 차이면 정말 싫어요-_-;;)
책이 있을 곳은 도서관이나 출판사나 서점 이라고 생각하는데요ㅋㅋㅋ

천재소녀의 4분은 굉장했어요. 건반을 누르지 않고도, 몸으로도 하는 연주라..
역시 천재는 다른 거였어요, 프레이야님ㅜㅜ

책을사랑하는현맘 2012-01-07 23: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홈쇼핑은 아니었지만, 그 두유를 맛 종류별로 6박스나 사서 쟁여놓고 먹고 있는 1인..ㅋㅋㅋ
아침에 나갈 때 하나씩, 어디 갈때 하나씩 들고 나가고, 밤에 뭔가 먹을 거 없나 두리번 거리다가 하나씩들...
그래도 아직 2박스가 남았는데 그래도 본전 뽑았다 싶어요.

피아노 전공을 생각하셨다니...그런데 안하시길 잘 했어요..ㅋㅋㅋ
난 잘 모르지만, 전공하는건 많은 희생을 부르는 것 같아요. 특히 음악은.
그냥 취미가 좋지 않을까..ㅎㅎㅎ

아이리시스 2012-01-09 15:12   좋아요 0 | URL
아는 언니가 있어요. 언니는 정말로 예중,예고,음대 나와서 유학을 생각하던 찰나, 아버지가 돌아가셨어요. 세상에, 사람의 인생은 정말 한 순간에도 바뀔 수 있는 거더라고요. 재능도 함부로 과시할 게 못되고, 잘하는데도 불구하고 누군가의 희생이 필요한 일인 것 같아요. 언니는 재능도 있는데다 공부도 정말 잘했어요. 임용고시 준비하고 있어요. 음대만 다녔는데 교직이수가 힘들어져서 교육 대학원으로 갔어요. 순식간에 다른 진로를 택해야 했던 언니도 얼마나 엄청난 스트레스였을까요. 전에 갔었던 결혼식장은 그 언니의 오빠 결혼식이었어요. 제가 여러 사람 낚았던;;

두유는 자꾸 손이 가고 걱정도 한 트럭이고 그래요. 우유가 체질에 안 맞아요. 음식 탈이 많이 나요, 저는. 고기도 1주일에 1회 이상이면 어김없이요. 현맘님, 근데 두유는 살이 안찌나요? 이렇게 달콤한데?ㅋㅋㅋ

Shining 2012-01-10 02: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이 시간에 여기 있는 건 모두 문재인씨 때문이에요(흑).
요즘 자는 시간도 부족해서 알라딘도 못 들어오고 참고 있었는데ㅠ
하지만 어차피 날아간 잠, 글도 쓰고 아이리시스님 서재도 들어오고 좋네요^^(하지만 눈은 벌겋다는거;)

이 영화 오랜만에 보네요, 저는 몇 년 전에 영화제에서 상영할 때 봤어요. 관객들 몰입도가
굉장히 좋았던 것이 지금도 기억나요.

감동과 꿈도 빌어주시고, 어휴. 새해에는 좋은 일만 생기려나봐요(후훗). 마지막 문장, 그대로
아이리시스님에게 돌려드릴게요. 이런 글 써줘서 정말 고마워요:-)

아이리시스 2012-01-10 18:08   좋아요 0 | URL
엉뚱한 뉴스 보느라 앞부분 잠시 놓쳤는데 참 좋았죠 오랜만에 호호호. 따뜻하고 정겨웠어요. 정말 힐링되는 느낌. 저는 다른 천재들은 별로 안부럽고 남의 얘기네 이러고 마는데 피아노는 아쉬운가 봐요. 그래서 피아노 연주도 좋아하고 영화도 좋아하고 그래요. 좋아하는 것이 많이 안다는 것과는 달라요;;

근데 샤이닝님, 뭐하신다고 잠이 모자라신 거예요- 그 와중에 방문 받은 행복한 서재의 주인입니다, 저는 행복해요, 와우~@.@ 히히히히. 샤이닝님께도 항상 좋은 일만 있으시기를 진심 바라고 있습니다. 매일매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