래빗 홀 - Rabbit Hole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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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사이에 조카가 넷이나 생.겼.다. 그 전까지는 하나도 없었다. 사촌들이 다 고만고만한 또래에다가 결혼도 최근 몇 년 사이에 했고, 하나씩 해치우기 시작하는, 이제 우리 집안은 시작이었다. 그런데 결혼이 진행되기 시작하자, 조카가 생기기까지는 금방이었다. 결혼식과 조카까지는 정말로 얼마 걸리지 않아 내심 놀랍기까지 했다. 내가 두려워하는, 또는 짐스러워하는, 결혼을 하면 아이를 낳아야 한다는 등식이 성립되지 않을 수 없는 현실이었다.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그냥 생긴 것이다. 사촌 조카들을 살면서 몇 번이나 보게 될지, 걔네들에게 이모나 고모라는 호칭으로 몇 번이나 불리게 될지 모른다. 아이들이 귀엽고 소중하다는 것을 알지만 교과서로만 배웠다. 아무리 귀여워봐야 내 아이는 아.니.다. 내가 낳지 않았다. 그건 아마 내 동생이 결혼하여 친조카가 태어나 나를 고모라고 불러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내가 낳지 않았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결혼해야 철이 들거나 인간이 된다는 말은 거기에서 나왔을 것 같다. 아기 보면 귀엽고 예쁜 거 나도 알지만 내가 만들고 내 안에서 나온 아이와는 다를 것 같다. 누구보다 이해와 공감능력이 뛰어나다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내가 낳지 않은 아이다. 그 아이가 다친다 해서 내 생살이 찢어지는 것처럼 아프지는 않을 것이고, 그 아이가 없어진대도 차라리 내가 죽어버렸으면 싶지는 않을 것이다. 짐작컨대, 내 아이가 생긴다면 그럴지도 모르겠다. 나는 내 아이가 없으니까 모르는 것이다. 니콜 키드먼의 기분 같은 것. 같은 슬픔을 겪은 니콜 키드먼의 남편 기분 같은 것. 그러니까 베카와 하위가 아들을 잃은 기분 같은 것, 예를 들어, 슬픔, 절망감, 자괴감, 죄책감 같은 걸 나는 아직 모르는 것이다. 안다고 말할 수는 있으나 내 슬픔은 아니라는 것. 그것은 간혹 꽤 답답한 기분이 된다. 난 종종 엄마,아빠의 죽음으로 그 문제를 치환해보기도 하지만, 역시, 아직은 알 수가 없다. 내가 낳지 않.았.다. 이런 나는 결혼해 입양을 생각해본 적도 있다. 이런 나니까, 거리두기를 잘할 거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건방질 지도 모르겠다, 지금은 장담할 수가 없는 걸 보면.

 

언젠가 알 수도 있겠지만 지금은 알 수 없는 것. 모르는 마음이 얼마나 알고 싶은 마음이 되는지, 이건 공부도 아니고 책으로도 배울 수 없어서 어쩌면 모르고 살 수도 있는 것. 그래서 나는 모성애나 부성애를 지나치게 강조하는 스토리에 심히 감정이입을 하지 못하는 면이 없지 않다. 나도 여자고, 가정적인 사람인데, 아예 모르지는 않겠지만 시어머니께 아이 맡겨놓고 바깥 일 하면서 아이가 조금 넘어지거나 데었다고 팔짝팔짝 뛰거나 동동 거리면서 시어머니에게로 모든 탓을 돌려버리는 아이 엄마를 이해하지 못한다는 뜻이다. 그러면 자기가 키우든가. 그래서 말인데, 엄마는 자기 아이가 소중한 만큼 타인에게도 너그러워질 필요가 있다는 생각을 종종 한다. 자기 아이가 그토록 소중한데 어째서 다른 아이에게는 친절하지 못하는가. 먹이사슬의 관계에서 가장 공감해야 할 사람들이 그렇지 못할 때 나는 분노를 넘어 짜증스럽다가 어쩔 때는 슬픔을 느꼈다. 다른 아이에게 처할 수 있는 일이면, 자기 아이도 처할 수 있다. 내 아이에게 생길 수 있는 일이면 다른 아이에게도 생길 수 있고, 자기 아이를 용서할 수 있으면 다른 아이도 용서할 수 있다. 안될 일이란 게 세상에 없다. 여기까지는 사족. 나는 요즘 영화가 아니라 영화 보는 나에게 몰입하느라 한껏 들떠있다. 영화가 궁금하면 리뷰가 아니라 영화를 보시라. 리뷰에는 영화 이상의 내가 담겼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 쓴다.

 

니콜 키드먼의 히스테릭한 연기에 물이 올랐다. 아름다운 그녀는 최근 몇 년간 정말로 아름답게 나이 먹어가는 본보기를 보여주는 것 같다. 파란 눈의 여자가 이토록 아름답다는 것을 좋아하는 헐리우드 배우 니콜 키드먼과 나오미 왓츠에 의해 느껴가는 나날, 베카로 분한 그녀가 남편과 함께 아이 잃은 부부들의 슬픔을 나누고 공감하며 치유하는 모임에 나갔을 때 느끼는 다 부질 없다는 감정도, 남편 하위가 그곳에서 어떻게든 부부 사이를 회복하고, 아들 잃은 심정을 다스려 아내와 잘 살아보려는 행동도 모두 이해가 되었다. 슬픔을 다스리는 방식은 각자 다를 수밖에 없다. 둘이 함께 낳아 사랑을 주며 키웠어도, 아빠와 엄마의 애정의 깊이가 다르다. 이상한 일이지만 애정이 달라서가 아니라, 내면을 다스리는 슬픔과 치유의 작동 매커니즘이 달라서 생기는 일인 것 같다. 아들과 함께했던 비디오 영상을 보며 밤마다 눈물짓는 남편과 동생이 낳은 아이에게라도 아들의 옷을 입혀 아들을 느끼고 싶은 아내. 자신에게로 향하는 모든 애정과 소통의 끈을 거부하고 혼자만의 세상으로 숨어버리는 아내와 그런 아내를 세상 속으로 끄집어내기 위해 애쓰는 남편이 있다. 비교적 일상 속에서 이들은 행복한 듯 보인다. 그래, 슬픔이 어떤 사람 안에 온전히 농도 100%로 존재할 수는 없다. 그럴 수 있다고 생각되는 것도 어쩌면 착각. 차례로 찾아오는 낮과 밤을 차례로 감당할 수 없는 지경이 오면, 그땐 절망의 나락으로 치닺는다. 슬픔이 바닥을 칠 때까지 자신을 내버려둘 수밖에 없는 것. 그것을 꺼내주는 것은 오로지 자기 자신만의 몫. 물론 주변 사람들의 도움이 필요하지만.

 

두 부부가 위안을 찾은 방법은 아쉽게도 바깥을 통해서였다. 슬픔을 다스리는 방법이 달랐던 두 사람이 비슷한 사람을 만남으로서 치유가 시작된 것이다. 자신들과 같은 슬픔에 빠진 사람들 그룹에서도 꼼짝 않던 이들을 움직이게 한 건 하느님도 아니고 신도 아니고 사람이었다. 실수를 되새기고, 남아있는 원인을 원망해보고, 행복을 밀어내고, 안락함을 추방해도, 궁지에서 인간은 동아줄을 붙잡아 버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견뎌야 하기에. 일상 와중에 문득문득 찾아드는 아들의 흔적을 간직해야 옳을지, 그 반대일지 우리는 알 수가 없다. 누군가의 슬픔은 이해나 공감과는 별개로, 오롯이 내 것일 수가 없는 것이 진리다. 집을 팔고, 옷을 버리는 일처럼, 간직하거나 내버리는 것은 슬픔에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다. 소중한 사람을 잃었을 때 울음의 강도로 슬픔을 판단하는 것과 하등 다를 바 없는. 베카는 자기 엄마의 같은 슬픔에도 깊이 공감하지 못한다. 어느 순간이든 자기 상처가 제일 크다고 재단해버린다. 그 틈에 눌린 주변 사람들은 그녀의 안에 한 발자국도 들어갈 수 없겠지. 언젠가 구멍이 생길 때까지. 누군가를 잃은 자리를 또다른 것이 대신한다는 말을 나는 믿을 수 없다. 내 슬픔이 당신 것이라는 것도. 세상에 일어나는 많은 것들 중 오로지, 오롯이, 감당해야 할 몫이 있다면 그것이 슬픔이라고 생각한다. 슬픔의 나락에 있을 때에는 누군가가 내 슬픔에 공감한다 해도 가식으로만 보인 적이 많았다. 공감이 진심인 줄 알면서도 슬픔은 반으로 줄어들지 않았다.

 

용서와 화해, 소통과 공감을 말하는 모든 이야기들이 보편적으로는 위로와 치유의 힘을 강조하지만 단 한 번도, 스스로의 치유보다 타인의 배려가 나았던 적이 없었다. 결국 길어올리는 슬픔의 주어는 나였다. 내 몫이었다. 바깥을 돌아보았다. 세상이 내 편일 때도 그렇지 않을 때도, 다 주고 싶은 적도 하나도 갖기 싫은 적도 있었다. 베카와 하위를 이해한다. 정확히 말하면 그들의 슬픔을 이해한다기보다, 그들이 그렇게밖에 할 수 없었던 이유에 대해 이해한다. 하느님이 죽은 사람을 살릴 수 없듯, 냉소와 무관심으로 자위하면서 잊혀져가기를 기다린다. 그저, 기다릴 뿐이다. 아들과 관련된 흔적들, 집과 개, 옷을 버리려는 아내와 아들의 흔적을 고스란히 두고 그리워하며 일상을 찾기를 원하는 남편. 천사가 된 아들은 어느 것을 더 좋아할까. 감히 부모의 불행과 몰락을 바라겠는가. 정답은 하나지만, 때로 그 정답을 찾아가기가 하늘의 별따기보다 어려운 일들. 그래서 신은 몰두와 열정과 망각을 만들었는지도 모르겠다. 잊기 쉬운 가장 좋은 방법은 몰두와 망각 뿐이다. 그래서, 서로가 서로의 곁을 떠나고 바꾸고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고 자위한다. 가정이 깨어지는 것을 아이는 더군다나 바라지 않을 것이므로. 부모들은 그것을 안다. 같은 그룹에 있던 개리로 인해 깨어지는 가정을 보고만 하위는 다시 베카에게로 돌아와 그녀를 감싸안으려 한다.

 

실제로 위태위태한 가정이 아들의 죽음으로 결합되는 것도 봤고, 이혼만 보류했지 10년째 따로 살며 딸을 결혼시키는 것도 봤다. 그때마다 의아했던 건 의외로 단단해 보이는 가정도 들여다보면 흠이 있기 마련이고, 작은 흠만으로도 쉽게 무너질 수 있다는 것이었다. 베카의 아픔을 겪었던 베카의 어머니가 말한다. 절대로 괜.찮.아.지.지.않.는.다.고. 하지만 괜찮다고. 주머니 속에 무거운 돌멩이 하나를 넣고 걸어가는 것 같은 인생이지만 그것이 없어진 아들 대신이라고 생각하면 그마저 소중하다고. 아파본 사람만이 해줄 수 있는 충고였다. 깨지거나 합쳐지거나, 둘 중 하나를 할 수밖에 없는 부부 사이. 영원히 하나란 없는 가깝고도 먼 친구. 동반자. 그들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어떻게 지리한 시간들을 견뎌나갈지는 아직도 미지수지만, 마음먹기에 따라 세상이 달라진다는 것은 명백하다. 용서하고 내려놓을 것인가, 미워하며 지고 갈 것인가. 평행이론이 이런 식으로 씌여 위안을 줄지는 몰랐지만, 그래, 내가 하필 조금 슬픈 역할을 맡았다고 생각하면, 조금 위안이 되려나. 그리워하는 것보다 있을 때 지켜주는 것이 영원히 더 나은 일이라는 건 분명하지만, 돌멩이, 그런 돌멩이라면 어떻게든 견딜 수밖에. 아들이 부모의 몰락을 바랄 일은 절대로 없을테니까. 부모의 행복, 그것이 자식의 행복이니까. 언제, 어느 순간이든 그것만 기억한다면 아이 잃은 부모가 불행해질 일은 없지 않을까. 시간을 들여 보고싶은 영화는 아니었는데, 누구나 돌멩이 하나쯤 주머니에 넣고 다니며 잡았다 놓았다 한다는 것을 알고나니 세상이 조금만 슬퍼졌다. 구성도,연출도,스토리도 지극히 평범 또 보통인데, 마지막 장면, 손 꼭 잡은 부부가 왜 이렇게 부럽기만 한지. 스포일러가 되지만 어쩔 수가 없겠다. 그들이 서로에게 돌아가서 정말 기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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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 2011-12-27 22: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아이리시스님 요즘 폭풍 리뷰, 페이퍼 날려주시는걸요!
나도 지금 영화 리뷰 쓸거 3편 있는데 아이리시스님의 미친듯한 필력에 제가 고개를 못 들겠습니다 ㅠㅠ

아이리시스 2011-12-28 17:15   좋아요 0 | URL
3편이나 있어요? 버럭!!!!!!!! 써주면 잘 읽을게요. 그렇다고 강요하는 건 아니고ㅋㅋㅋ 저보고 미친듯한 필력이라니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적게 쓰는 게 질을 높이는 방법입니다.(응?)

저는 지금 다음 페이퍼를 준비중. 근데 이건 좀 오래 걸리겠어요! 보름 정도ㅋㅋㅋ

맥거핀 2011-12-28 13: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목이 참 특이해요. 래빗 홀. 토끼구멍. 그게 도대체 무슨 뜻이래요? 아이리시스 님의 리뷰를 보니 아무래도 영화 내내 힘들다가 마지막 순간에 아주 조금 숨을 쉴 수 있게 해주는 영화일 듯 싶네요. 그나저나 이렇게 짧은 간격으로 좋고 알찬 리뷰를 쭉쭉 뽑아내면 어떡합니까. 일주일에 한 편 쓸까말까한 사람도 있는데..동종업계(?)에 있는 처지에 이러지 맙시다.^^;

아이리시스 2011-12-28 17:09   좋아요 0 | URL
토끼구멍에 진정한 스포일러가 있는데 이 영화는 정말로 착한 영화라서 숨을 안 쉬어도 별로 힘들지가 않아요. 히스테리 부리는 걸로 보여요. 아이를 잃은 슬픔보다는 아이를 잃은 부부가 어떻게 살아가는가에 더 중점을 뒀으니까요. 일주일에 한 편 쓸까말까한 맥거핀님 리뷰는 엄청 길고 알차고, 저는 그렇지 않잖아요. 동종업계,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2011-12-29 06: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12-29 14: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마녀고양이 2011-12-29 12: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 돌멩이 때문에 슬프기도 하지만, 우리는 그 돌멩이 때문에 함께 있는거 아닐까 싶어요.
마음 속 돌멩이 하나 없다면, 무엇하러 타인에게 시간과 에너지를 붓겠어요?
알라딘 서재에서 만난다는 것도 그런게 아닐까 싶어요.

자기 자식에 대해서 말한다면, 더욱 걱정도 되지만 지나치게 걱정도 되더라구요. 그런거죠,
이성을 제대로 챙기지 못 하고 내 아이가 당하면 더욱 승질나고 남의 아이보다 내 아이가 잘나면 좋겠고
나의 아이를 통해서 내가 못 다 이룬 어떤 것을 성취하는 것을 보고 싶기도 하고. 그런 면에서
삼촌이나 이모나 고모가 더욱 현명해질 때도 많은거 같아요. ^^

아이리시스 2011-12-29 14:56   좋아요 0 | URL
돌멩이는 정말 어쩔 수 없는 것 같고요. 한때는 돌멩이가 제게만 있는거라 생각한 적도 많았는데 아니더라고요. 돌멩이가 슬픔일 수도 있지만 분노나 아픔일 수도 있잖아요. 그렇게 무언가에서 점점 벗어났어요.

이 영화는 [퍼펙트 센스]보다 그렇게 다가오는 영화가 아니었어요. 부부의 심리를 그리는데 부부가 되어본 적도 아이도 없는 제가 이해할 수가 없죠. 제가 저 상황이라면, 이라는 가정 자체가 불가능했달까. 어줍잖게 안다고 했었던 것들을 이제는 모르게 됐어요. 하지만 아이가 없어지는 영화 같은 걸 아이가 생겼을 때도 보고 싶을까요. 이런 주제로 미스터리,스릴러,드라마 영화나 책 너무 많아요. 올해 읽은 것만 해도 벌써ㅠㅠ

2011-12-29 18: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12-31 19: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12-31 02: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1-01 09: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페크pek0501 2012-01-02 16: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돌멩이라는 표현이 좋네요. ㅋㅋ

자식 잃은 슬픔을 생각하니, 이렇게 큰 일을 당하지 않고 사는 것, 그 자체가 행복이고 축복이라는 생각 들어요.

나이 한 살씩 먹어가면서 이젠 큰 행복을 달라는 기도 대신 큰 슬픔 없게 해 달라고 기도하게 되는 것 같아요. 이런 게 욕심이 작아지는 것이겠죠.^^

생각 깊은 글 쓰신 아이리시스님에게 좋은 새해가 되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