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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 ㅣ 그르니에 선집 1
장 그르니에 지음, 김화영 옮김 / 민음사 / 1993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언젠가, 섬은 한 장의 사진이었다. 환하게 웃는 흑백사진 속 배경, 거기에 섬이 있었다. 비록 모니터상이었지만 매료되는 건 순간이었다. 섬은 이 세상이면서 동시에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신비로운 공간. 그때부터 여자는 아무도 모르게 마음 속에 섬을 간직했다. 어디에 존재하는 줄도 모르면서. 섬이 왜 좋은지, 섬에 가두고 싶은 것이 뭔지도 모르면서, 제 안에서 서서히 무너지던 것들이 어떤 감정인지도 모르면서. 그에게 도착을 전할 때, 당연한 그의 자연스런 인사에 상처받던 날처럼 하염없이 서러워졌다.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여자는 남자에게 다시는 연락하지 말아야겠다고 결심했었다. 여자는 말했다. 아저씨는 나로 인해 행복해질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 그냥 원래 행복한 사람 같아요. 내가 해줄 게 별로 없을 것 같아요. 그러니까 행복해요. 남자는 대답이 없었다. 대답을 듣는 대신 여자는 수화기를 내려놓고, 메신저를 끄고나서 섬을 품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섬이 있다. 어느 시인이 노래했다. 그러니까 섬은, 하물며 '섬'일까. 여자는 종종 생각한다. 여기도 저기도 아닌, 어느 낯선 곳, 섬은 그 이상이하도 아니란 것을.
뒤에서 남자가 갑자기 안았을 때 여자는 놀라지 않았다. 베르사유에 다녀온 날이었다. 갑자기 내린 비에 하루종일 젖었다 말랐다 했던 것 같다. 이후 여자는 그를 생각하면 섬이 떠올랐다. 섬 같은 사람. 화이트 초콜릿처럼 달콤한 목소리를 가진 남자. 첫인상. 그후로도 오랫동안 여자는 남자와의 첫만남 따위를 회상하지는 않았다. 회상될만큼의 이야기가 없었다. 멈춰진 시간, 정지된 화면, 희미한 이미지. 말이 통하지 않는 파리의 작은 지하철역. 드물게 해가 쨍쨍하던 겨울날 오전 아니 오후. 그보다 더 낡은 공중전화. 몇 개의 나라를 거치느라 늘어날 대로 늘어난 짐이 든 노랑 캐리어. 베네치아에서 산 가면. 로마의 과일, 음료, 호두. 기다리던 시간. 설렜던 감정. 퐁네프 다리. 콩코르드 광장,,
아저씨, 나 비행기 놓쳤어요. 여자는 당황한 목소리로 낮에 떠나온 남자에게 전화를 걸었다. 남자와 여자는 정확히 열 한살 차이였다. 열한살. 남자가 스무살 때 여자는 아홉 살이었고, 여자가 스물 아홉이면 남자는 마흔이 될 터였다. 그래도 띠동갑은 아니네. 이름모를 네덜란드산 맥주를 마시던 남자가 희미한 미소로 말했다. 하루종일 파리시내를 헤매느라 샤를 드 골 공항에서 길을 잃었던 여자에게 수화기 너머 목소리는 구원이었다. 늦었는데 돌아올 수 있겠어? 어서 와서 자. 밥은 먹었어? 비행기는 연착되고 있었지만 보딩자체가 늦었던 승객을 배려해주지는 않았다. 같은 처지의 일본여자가 말을 걸었다. 어디로 갈 거야? 나는 돌아갈 곳이 있어. 여자는 말한다. 늦은밤, 남자는 라면을 끓였고, 탁자 위에 맥주를 한가득 꺼내놓았다. 대체 비행기를 왜 놓친 거야? 어디 갔었던 거야? 나도 모르겠어요. 지도가.. 지도가.. 여자는 울지는 않았다.
남자의 목을 잡고 매달린 건 여자였다. 왜 울어. 남자가 말했다. 잘 있어요, 아저씨. 우리 부산 아가씨, 울지말고 뚝. 언제 서울에 올 거예요? 데려다줄게. 남자가 마지막으로 한 말은 올 때보다 가방이 더 무거워졌어. 한국에 도착하면 전화해. 였다. 하지 않았다면 좋았을 전화. 놓고 돌아와야 옳았을 미련. 다시 섬. 그때 여자는 혼자 섬에 갔다. 시차와 국제전화, 쓸쓸함, 그런 것들을 버리려고 간 것은 아니었다. 기다려요? 남자는 아니, 하고 대답했다. 나직하고 쓸쓸한 목소리란 걸 여자는 알아챌 수 있었다. 언니는 왜 떠났어요? 춤을 추고 싶어했어. 연극배우였거든. 애기도 있잖아요. 한국에서 부모님이 키우고 있어. 아, 네..
기다려요?
아니.
그의 진심을 이제와 내가 알 수는 없다. 그건 그때의 욕망이고 열정이었을 뿐. 여전히, 과거형.
가장 못한 것이 오직 다르다는 이유로 널리 쓰일 수도 있다. 가장 좋은 것도 없고 가장 못한 것도 없다. 이때에 좋은 것이 있고 저때에 좋은 것이 있다. 이 세상에는 완전한 것이란 없음을 나도 잘 알지만 이 세상에 일단 발을 들여놓기만 하면, 이 세상 속에 일단 얼굴을 내밀기로 작정만 하면, 우리는 더할 수 없을 만큼 기묘한 악마의 유혹을 받게 된다. 목숨이 붙어 있는데 왜 안 살아? 왜 제일 좋은 걸 안 골라? 하고 귀에다 속살거리는 악마 말이다. 이렇게 되면 곧 뜀박질을 하고 여행을 떠나고.. 그러나 <이제 막> 욕망이 만족되려고 하는 순간이란 얼마나 아름다운 순간인가. (p.32)
저 투명한 하늘의 기억. 내가 그를 기억하는 것만큼 그가 나를 기억해주리란 보장이 없어 슬펐다. 지금은 아니지만.
말없이 어떤 풍경을 고즈넉이 바라보고만 있어도 욕망은 입을 다물어버리게 된다. 문득 공(空)의 자리에 충만이 들어앉는다. 내가 지나온 삶을 돌이켜보면 그것은 다만 저 절묘한 순간들에 이르기 위한 노력이었을 뿐이라는 생각이 든다. 내가 그렇게 하기로 굳게 마음 먹은 것은 저 투명한 하늘의 기억 때문이었을까? (p.33)
나는 그냥 나.
나는 저 꽃이에요. 저 하늘이에요. 또 저 의자예요. 나는 그 폐허였고 그 바람, 그 열기였어요. 가장한 모습의 나를 알아보지 못하시나요? 당신은 자신이 인간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나를 고양이라고 여기는 거예요. (p.43)
나는 당신을 사랑하지 않아요. 그게 사랑은 아니었을 거란 걸 나도, 당신도, 그때도, 지금도, 잘 알고 있듯.
사실 언제나 똑같은 내용이긴 하지요. 그렇지만 사랑하는 마음을 나타내려고 할 때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라는 말 이외에 다른 무슨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사랑은 마음속에서 모든 순간들과 모든 존재들을 하나로 합쳐주는 것입니다. (p.64)
같은 공간, 같은 시간, 같은 공기를 그저 공유하고 있었을 뿐이지요.
그는 우리들에게 지극히 드물게 작용되는 범우주적인 사랑의 법칙에 복종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의 존재를 사로잡아 그의 겉모습을 다듬고 형상을 굳혀놓았던 그 법칙 말이다. 전에 그는 태양이 뜨겁고 밤이 싸늘하다고 느낄 수 있었다. 그런데 이제 그는 이 세상 어디에서나 화해한다. 모든 것에서 그는 영접받고 축복받을 것이다. 저를 맞아들이는 장소의 형태와 결합하여 차츰차츰 그 형태와 분간할 수 없도록 하나가 되어버릴 것이다. 완강한 저항이 철저한 복종으로 변했다가 어떤 새로운 생존 속에서 다시 반항으로 소생할 것이니 이 소용돌이와 평화의 교차가 우주적인 삶을 구성한다. (pp.72-73)
그럼에도 불구하고, 달의 양면을 모두 보고싶어하는 것이 인간.
달은 우리에게 늘 똑같은 한 쪽만 보여준다.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의 삶 또한 그러하다. 그들의 삶의 가려진 쪽에 대해서 우리는 짐작으로밖에 알지 못하는데 정작 단 하나 중요한 것은 그쪽이다. (p.90)
추억은 추억. 추억은 힘이 없어요. 추억은 한 순간의 강렬한 희열일 뿐이죠.
가장 달콤한 쾌락과 가장 생생한 기쁨을 맛보았던 시기라고 해서 가장 추억에 남거나 가장 감동적인 것은 아니다. 그 짧은 황홀과 정열의 순간들은 그것이 아무리 강렬한 것이라 할지라도-아니 바로 그 강렬함 때문에-인생 행로의 여기저기에 드문드문 찍힌 점들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 순간들은 너무나 드물고 너무나 빨리 지나가는 것이어서 어떤 상태를 이루지 못한다. 내 마음속에 그리움을 자아내는 행복은 덧없는 순간들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단순하고 항구적인 어떤 상태이다. 그 상태는 그 자체로서는 강렬한 것이 전혀 없지만 시간이 갈수록 매력이 점점 더 커져서 마침내는 그 속에서 극도의 희열을 느낄 수 있게 되는 그런 상태인 것이다. (p.101)
여행을 해서 무엇하겠는가? 사랑을 해서 무엇하겠는가? 괴로워해서 무엇하겠는가? 잔혹하게 그리워하면 무엇하겠는가?
여행을 해서 무엇하겠는가? 산을 넘으면 또 산이요 들을 지나면 또 들이요 사막을 건너면 또 사막이다. 결국 절대로 끝이 없을 터이고 나는 끝내 나의 둘시네를 찾지 못하고 말 것이다. 그러니 누군가 말했듯이 이 짤막한 공간 속에 긴 희망을 가두어두자. (pp.175-176)
하지만, 여전히 여행을 할 겁니다. 추억이 밥먹여주지는 않으니까. 추억을 가둘 수는 없고, 추억 속에서 열망을 훔칠 수는 없으니까. 태양과 바다와 꽃들이 있는 곳이면 어디나 나에게는 섬이 될 것 같다. 몇 번의 악수, 몇 번의 포옹, 몇 번의 키스, 몇 번의 눈물, 몇 번의 그리움. 그런 것들이 모조리 몇 번의 '착각'일 뿐이었을까. 나는 아직도 여전히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