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리 오브 라이프 - The Tree Of Life
영화
평점 :
상영종료


 

 

태초 내가 존재한 것은 아니다. 아빠와 엄마는 결혼 8개월 만에 날 낳았지만 난 정상적인 혼인관계에서 잉태된 허니문 베이비였다. 10월의 어느날이 예정일이었으나 그보다 앞서 나온 건 누가 말한 것처럼 엄마 몸이 약해서거나, 초산이어서, 또는 내가 빨리 나오고 싶어해서는 아니었다. 결단코 나는 이 세상에 더 빨리 나오고 싶었던 적이 없다. 내가 나올 시점을 정할 수 있었다면 나는 아마 태어나기를 포기하는 쪽을 택했을 것이다. 주어지는 삶은 고통스럽고, 살아가는 일은 그보다 더 어렵고 힘드므로. 나는 아마도 그 사실을 알았을 것이다. 생명의 나무, 번역 제목으로 <트리 오브 라이프>는 바로 그 지점, 나도 없고 당신도 없는 절대적 시점, 나는 없고 내가 잉태되지도 않은 바로 그 생명의 태초부터 시작한다. 시작줄기를 알 수 없는 폭포수와 원인을 알 수 없을 만큼 깊은 곳에서 서서히 이루어져온 화산폭발로 우주의 기원, 인간의 태초를 보여준다. 애초에 말하는 영화가 아니다. 보여주는 영화다. 색감의 미학과 친절하지 않은 내러티브, 간혹 들어차는 생략과 여백의 아름다움까지 철저하게 계산된 영화다.  

느끼지 못할 뿐이지 영화는 분명히 드러냈다. 가야할 길을 명확하게 알고 걸어가는, 본인이 어느 지점에 얹힐지를 아는 영화다. 인간은 어디로부터 왔으며, 어디로 갈 것인가. 왜 왔으며,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 또는 언제부터 해왔는가. 시점에 관한 영화지만, 우주와 지구, 미래와 현재, 생과 사, 현실과 초월 등 이 모든 것들을 짚어내는 영화이면서도 동시에 어느 것도 불명확하다는 것을 깨닫게 한다. 시작부터 기이하고 갸우뚱한 초현실학적 화면으로 장면장면을 지루하게 이어져가던 영화가 어느새 아주 조심스럽게 우리의 존재이유를 묻는다.

성인 잭(숀펜)은 아버지의 전화를 받은 후 기억나는 어린시절과 기억나지 않는 어린시절을 동시에 떠올려 기억의 맨 처음으로 가는 타임머신을 탄다. 보는 우리도 동시에 올라탄다. 거기에 의식 강하고 가부장적인 아버지 오브라이언(브래드 피트)과 상냥하고 다정한 어머니가 있다. 보통의 가정, 보통의 부모. 보통의 시대. 잭은 본래 자신이 있던 곳에서 죽을 힘을 다해 헤엄쳐 그들의 첫 아이로 잉태된다. 문을 열어서, 넘지 못할 산을 오르고, 건너지 못할 강을 건너서, 우주의 무한한 공간을 헤쳐 하필이면 그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될 사람에게로 온다. 그들의 자식이 된다. 이후 평범한 부모는 행복과 사랑으로 잭을 낳아 기른다. 노래를 불러주고, 안아주고, 키스하며, 나긋한 목소리로 귀에 속삭인다. 사랑스러운 아이야, 무럭무럭 자라라. 마치 나무가 커가는 것처럼 그도 자라난다. 쌔근쌔근, 아장아장, 뚜벅뚜벅. 동생이 생기고, 동생에게 빼앗긴 사랑을 샘내고, 동생을 주도하여 온 동네를 뛰어다닌다. 

아버지는 엄격하다. 그는 그가 아는 모든 것에 한해, 그가 보고 듣고 느낀 것 모두를 아들들에게 가르친다. 식사예절, 싸우는 방법, 상대를 제압하는 능력, 공놀이, 잡초뽑기, 나무 기르기, 말대꾸하지 않는 법. 아버지는 자신의 시행착오를 아들에게 물려주기 싫어 선택한 방법이지만 잭에게 이 모든 것들은 살아가는 데에 자신감을 잃게 하고, 반항기만 길러주는, 욕망을 누르기만 해야 하는 엄청난 감옥이 된다. 어느새 어린 잭에게 아버지란 존재는 익숙하고 편안하지 않은, 능가해야 하고 짓밟고 싶은 반항해야 하는 존재가 된다. 어느날 그가 직장을 잃고 그 커다란 날개를 꺾어버리기 전까지.  

영화는 줄곧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에 초점을 맞춘다. 아들이 커가고 아버지가 늙어가는 동안 갓 심은 작은 나무도 함께 커간다. 뿌리를 내리고 커다란 심지를 박고 무성한 잎을 뻗어내며 치렁치렁 그늘을 내어줄 때까지 나무는 자란다. 생명도 자란다. 아들은 자라고 아버지는 늙어간다. 하지만 단 한 번도 잭은 아들의 역할을 벗어나본 적이 없다. 내내 불안정하지만 한편으로 누구보다 더 순수하고 정 많은 아이로 자란다. 대부분의 이 세상 아들들이 그런 것처럼.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존재가 소중함을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에는 몰랐으나 자신이 아버지가 되었을 때 그는 이해한다. 그리고 아버지를 누구보다 사랑하는 단 한 명의 아들이 된다. 아버지가 그랬고, 아버지의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우주와 생명의 빈 공간에 계신 것은 역시 하느님, 신이다. 신은 모든 것을 주관하고, 아버지와 자식을 내려주며, 생명에 물과 사랑을 주어, 무럭무럭 크게 한다. 생명의 탄생은 나무의 생명과 같은 것.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핵심주제는 '생명'이다. 아무도 의미없이, 이유없이, 노력없이, 이 세상에 온 사람은 없다. 모두 의미있고, 이유있고, 노력에 의하여 이 세상에 오는 것이다. 태어남과 동시에 아니, 태어나기 훨씬 전부터, 잉태되기 전부터도 우리는 모두 예정되어 있던 생명이다. 하나하나 모두 소중한 존재들이다, 우리는. 비어있는 공간과 여백의 미를 우리의 상상과 생명의 존귀함으로 직접 채워야 한다. 그래서 난해하고 모호하고 신비로울 수 있다. 신비로움이란 감정은 애초 숭고함과 난해함 사이에 있다. 생명의 귀함을 각자 한 번씩 생각해야 하지만 영화가 주는 메시지보다 더 좋은 건 역시 작품의 아름다움과 낯섬을 경험하게 하는, 드라마를 SF로 승화시킨 감독이 빚어낸 영상, 즉 촬영기법에 있다.  

p.s.몇 년 안 본 사이 브래드 피트 참 많이 아저씨가 됐구나. 여전히 멋있지만, 그 멋짐도 숀펜의 카리스마에 눌리고, 아역배우의 뛰어난 기와 눈빛에 눌려서, 말이 권위적 아버지지 전혀 권위적이지 않게 느껴졌다. 이 영화의 하이라이트는 단연 대사없는 초반 30분과 후반 10분인데, 바로 이 부분 때문에 영화 평점을 바닥까지 내리고픈 관객들이 많은 걸로 볼 때, 이 영화는 상업영화 범주에는 절대 들어가서는 안 될 것 같고, 2011년도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작임을 기억해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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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쉰P 2011-10-12 19: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우 내용은 완전 그레이트 대박 마음에 드는데요. 아이리시스님의 나레이션이 깔려 있는 듯한 영화 소개라 잘 읽고 봤네요. ^^ 이런 내용 전 참 좋아해요. 삶과 죽음에 대해 말이죠.
인간이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아 참 어려운 부분입니다. 그리고 알기도 힘들구요. 매일 현실의 눈 앞만 보이고 그것만 쫓아서 살다보면 언젠가 죽을 문턱에 와 있다는 사실이 참 허탈하기는 해요. 하지만 어떤 생사관을 지닌다는 것이 참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죽으면 과연 끝인가? 그럼 나는 왜 태어났는가? 어차피 죽을 것이라면 왜 시작을 했는가 마치 뫼비우스의 끈처럼 생각은 그 끝을 모릅니다. 사실 이것이 제 인생의 연구 주제이기는 하지만 매일 쳐 들어오는 주민들을 상대하다 보면 하루를 바라보고 사는 하루살이 같다는 느낌을 많이 봤습니다.
하지만 신기한 것은 어느 시점에서 아이리시스님의 서재를 알고 아이리시스님과 절친이 되는 이 만남과 인연...아~ 뭔가 신기하지 않습니까~~

아이리시스 2011-10-12 22:06   좋아요 0 | URL
루쉰님, 매일 쳐들어오는 주민상대라니, 이거 뭔가 되게 영화틱하잖아요.ㅜㅜ 저는 칸영화제 취향인가 봐요. 칸영화제 출품작들은 다 좋더라고요.ㅋㅋㅋ 제대로 개봉 안하는게 문제지만. 우린 엄청난 경쟁률을 뚫고 태어났는데, 그 중에 우리가 만난 것, 그것도 서재에서 만난 건 더욱 더 신기한 인연이죠! 절친이 된 것도. 매일 전장에 나가는 루쉰님, 화이팅. 그래도 저는 야근하며 떡볶이나 피자 먹고, 커피나 주스도 마시는 생활, 그리워요. 진짜 시키면 무지 싫을 것 같지만요.(이런 이중성, ㅠㅠ)

삶과 죽음, 탄생과 소멸, 더 연구해요! 그리고 논문써요, 우리.^____________^

프레이야 2011-10-12 22: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영화 아주 기대중인데 아직 못 보고 있어요.ㅠ
브래드는 숀에게 밀렸군요.^^
전 '나무'라는 말 자체가 굉장히 우주적인 것 같아요.
아이리시스님의 리뷰로 미리 보는 영화, 좋으네요.
아주 색다른 화법일 것 같아요.

아이리시스 2011-10-13 12:44   좋아요 0 | URL
'나무'가 이렇게 생명의 모든 것을 함축하고 있다는 사실이 놀라워요. 그래서 간혹 나무무덤을 만들어주나 봐요. 정말 나무가 쑥쑥 커가는 장면이 이 영화의 모든 것을 말하고 있어요. 모든 것을 흡수하고 빨아들이니까요. 범우주적인 나무. 프레이야님 서재에서 제가 훨씬 더 많이 좋은 영화들 보죠. 좋았어요, 늘. 색다른 화법, 나중에 꼭 보세요.^^

근데 [레스트리스]는 개봉하는데 [멜랑꼴리아]는 개봉 안하나 봐요. 저는 트리에와 커스틴 던스트가 더 기대되는데..^^

stella.K 2011-10-13 11: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목이 제법 거창합니다.
혹시 부산영화제 상영작인가요?
글치 않아도 빵 피트 요즘 뭐하나 했더니 여기 나오는군요.ㅋ
숀펜은 턱이 너무 깍아지른듯해서 부담스럽긴 하지만
연기는 정말 잘하는 것 같아요.
빵 피트는 숀펜과 같이 출연만 안했어도 나름 빛났을지도 모르는데
선택을 잘못한 걸까요?ㅋ
대사 없는 초반 30분, 후반 10분이라...
굉장히 특이하면서도 견딜만한가 의문이네요.
이런 진지한 영화 나름 관심은 가는데,
실제로 보면 어떨지 살짝...?!^^

아이리시스 2011-10-13 12:39   좋아요 0 | URL
스물두살 때 <21그램>을 보러갔었는데 그때 숀펜을 알아서, 그런데 남은 안늙고 나만 나이 먹어요, 흑흑. 하하, 빵 피트. 제가 오랜만에 영화봐서 그런 줄 알았는데, 피트 정말 오랜만에 나온 건가요?ㅋ
근데 이 영화, 딱 영화제 영화예요. 비중으로 볼 때 피트가 주연이면 숀펜은 조연인데, 영화에서 둘이 만나지도 않고 만날 일도 없고, 맞대결하지 않아요. 그래도 내용 때문인지, 존재감 때문인지, 피트가 밀리는 느낌이예요.

이거 부산영화제 상영작 맞는데, 2주후 27일에 개봉해요.^^

페크pek0501 2011-10-14 23: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비어있는 공간과 여백의 미를 우리의 상상과 생명의 존귀함으로 직접 채워야 한다. 그래서 난해하고 모호하고 신비로울 수 있다. 신비로움이란 감정은 애초 숭고함과 난해함 사이에 있다" - 이 표현, 좋고(좋코)~~~

영화 리뷰 쓰기는 어려울 것 같아 저는 엄두도 못 내고 있어요. 그래서 이렇게 리뷰 보는 것으로 만족해야 할 듯... 잘 보고 갑니다. ^^

아이리시스 2011-10-15 01:40   좋아요 0 | URL
책은 수준인데, 영화는 그야말로 취향 같아요. 대사가 없어도 영상으로만 전해지는 게 있으니까요. 그렇지만, 그래서 함부로 추천은 못하겠어요. 그건 제 성격인 것 같아요. 그리고 제가 본 걸 누군가에게 보라고 하고 막 그것에 대해 얘기나누는 취미는 제게 없어요.( '') 저는 항상 제가 모르는 글을 읽고, 모르는 책의 리뷰를 읽고, 모르는 책이나 영화에 대해 얘기해주고, 제가 안읽은 책이나 모르는 분야, 안본 영화에 대해 말해주는 사람을 좋아해요. 오스트리아 빈의 빨래방에서 빨래가 돌아가던 한 시간 동안, 제가 유럽가기 직전에 봤던 빨래방을 배경으로 한 일본영화를 얘기하니까 친구가 유심히 들어주는 것 같은 것. 저는 그렇게 들어주는 사람이 되는 것도 좋고, 이야기하는 사람이 되는 것도 좋아요. 그래서 이야기할 거리가 생겨요. 공감을 요구하거나 내가 좋은 걸 강요하지 않게 돼요.

제가 보는 리뷰는 대부분 제가 읽지 않는 분야의 리뷰예요. 그래서 저는 리뷰 보는 것으로 만족하거든요, 언제나. 내가 읽어도 처음 쓴 다른 사람보다 잘쓸 자신 없어서.^^

주말 잘 보내세요, 페크님. 이 얘기하려고 너무 말을 길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