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음 한국사 시리즈
보통 통사-조선왕조실록의 정치사 중심의 역사서만 읽어본 것 같은데 이건 좀 색다르다
15세기 동아시아 뿐만 아니라 당시 세계의 흐름까지 파악할 수 있어 넓게 보는 눈을 키워준다
시리즈 전부 읽어보고 싶어졌다

부제 ‘조선의 때 이른 절정‘이 무척 와닿는다
절정기이긴 했으나 너무 빨랐다...거나 혹은 오래 가지 못했다는(오래는 가긴 했는데?) 뉘앙스를 인정하면서도 속상하고 안타깝다

태조에서 성종까지가 고작 1세기밖에 안되는지 생각도 못해봤다
벌써 읽은지 4년이나 된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을 다시 읽어봐야겠다
(6권이나 된다! 그래도 여기까지가 제일 재미있긴 했다)
특히 박시백 조선왕조실록을 보며 세종의 단점을 읽게 되었는데 이 책을 보니 다시금 위대한 왕이란 생각이 든다
민음한국사 16세기는 그 이후에 읽어야지

흥미로운 내용들과 도판이 좋긴 하지만 도판이 작아서 자세히 봤으면 하는 것들도 종종 있는 건 아쉬움으로 남는다




흔히 조선 시대의 대외 정책을 시대교린 ‘이라고 말한다. 여기에서 ‘사대의 대상은 중국이고, ‘교린‘의 대상은 중국을 제외한 동아시아의 여러 나라나 부족들이다. 즉 여진· 일본· 유구 등이다. 그런데 ‘교린‘이라는 말에는 서로 필직할 만한 나라가 대등한 지격으로 교류한다는 의미가 담기 있다. 따라서 조선이 여진·일본 유구 등에 교린 정책을 시행했다면, 이는 조선이 이들 나라와 부족을 자신과 대등한 존재로 인정했다는 뜻이 된다. 하지만 과연 조선이 여진 일본. 유구 등을 대등하게 인식했는지는 의문의 여지가 있다.
- P44

한글을 만든 사람이 누구냐고 물으면 세종이라고 답하는 사람이 많겠지만, 사실은 한글을 세종이 친히 만들었다는 친제설보다는, 세종이 신하들과 힘을 합쳐 만들었다는 협찬설이나 세종은 지시만 하고 실제로는 신하들이 만들었다는 명제설이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러나 한글을 집현전 학자들이 만들었다는 생각은 전혀 사료에 바탕을두지 않은 잘못된 생각이다. 사료에서는 일관되게 한글을 세종이 친제했다고 증언하고 있기 때문이다. - P169

앞의 『세종실록』 1443년 12월 조 기사가 그러하고, 『훈민정음』의 정인지 서문도 그러하다. 협찬설이나 명제설을 옹호하는 이들은 흔히 당시에는 신하들이 한 일이라도 왕의 업적으로 돌리는 것이 관례였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편견이다. 『세종실록』을 다 뒤져 보아도 세종대에 이루어진 많은 일 가운데 ‘친제‘라는 표현을 쓴 것은 한글이 유일하다. 세종이 신하를 시켜서 한 일은 분명히 신하를 시켜서 했다고 하지 세종이 친제했다고 한 사례가 없다. 실록이나 기타 기록에서 세종이 한글을 친제했다고 밝히고 있는데, 별 근거 없이 그것을 불신하는 것은 곤란한 일이다. - P169

앞에서 일부 학자들이 실록의 "훈민정음이 완성되다."라는 기사에서 훈민정음이 문자를 의미하는 것으로 오해해 웃지 못할 촌극이 벌어졌음을 밝혔다. 이 훈민정음이라는 말이 문자가 아니라 책을 의미함을 깨닫기까지 적지 않은 대가를 치렀다. 『용재총화』에 등장하는 ‘언문‘도 문자가 아니라 책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해야 다른 사료들과 조화롭게 이해할 수 있다.
- P172

이처럼 대신과 삼사의 임무와 성향은 상반되지만 그 인적 구성은 긴밀한 연속성과 순환성 속에서 이루어졌다. 이는 이후의 역사를 설명하고 이해하는 데 적지 않은 의미가 있다. 조선의 주요 관원들은 젊을 때는 삼사에 근무하면서 탄핵과 간쟁의 임무를 성실히 수행하지만, 그 뒤 나이를 먹고 품계가 올라 대신이 되면 그 관직에 합당한 현실론적 태도를 나타낼 가능성이 컸다. 이런 관직 운영 체계는 그 뒤 전개된 사화와 당쟁 등 정치적 갈등을 분석하는 데 중요하게 고려해야 할 부분이다. - P232

사화들을 관통한 주제는 이 시기에 나타난 제도적 변화의 핵심인 삼사였다. 탄핵과 간쟁이라는 고유한 기능상 삼사는 국왕, 대신과 긴장하거나 충돌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사화의 시련을 거치면서 삼사의 언론 기능을 확립했고, 삼사로 대표되는 조선적 정치 운영은 그 핵심적 특징을 완성했다. 이런 체제는 그 뒤 여러 한계를 드러내면서 다양한 수정을 겪기도 했다. 그러나 이 시기에 형성된 제도의 구조는 그 뒤의 수많은 발전과 변화가 융합되고 흘러나오는 견고한 주형으로 남았다고 평가할 수 있다. - P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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