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해

 

 

박준 시인의 우리가 함께 장마를 볼 수도 있겠습니다(2018, 문학과지성사)에서 첫 번째 시는 선잠인데 그해라는 단어로 시작해. 발문에서 신형철 평론가가 그것에 관해 언급한 걸 봤어. 나는 그해라는 단어를 생각하면 뭐가 떠오를까? 그해, 그해, 라고 소리를 내 봐. 1996년이 떠올라.

 

그해, 많은 일이 있었어. 속이 좀 불편하다던 아버지는 암에 걸려 있었어. 겨우 한 달 반 만에 돌아가셨지. 대학원을 갈까 하던 나는 진학을 포기하고 취직을 해서 서울로 갔어. 몇 달 동안 친구 집에 살았는데 그 집은 집이라기보다 지하 방이었어. 여름에 장판을 걷으면 물기가 배어있는, 습기 찬 방이었어. 그 후 오빠랑 다세대주택의 지층에 같이 살았어. 지층이라고 들어봤어? 1층도 아니고, 지하도 아니라서 그렇게 부르나 봐. 보기엔 1층 같아. 지하 방도, 지층 방도, 일도, 아버지가 없는 삶도 모두 처음이었어. 이 처음들이 배경이 되어 나는 낯선 길에 서 있는 아이 같았지.

 

밤은 너무 빨리 왔어. 서울은 고개만 돌리면 빛이었지만 모두 인공의 것이었지. 내 안에 들어오면 그 빛조차 힘없이 사그라졌어. ‘아버지라는 단어는 바깥세상에 닿는 걸 꺼렸. 어쩌다 그 단어가 목구멍을 통과하려고 하면 울컥 가슴이 붙들고 놓아주지 않았어.

 

그해 엄마는 주저앉은 듯이 보였어. 아버지를 잃은 엄마를 돌볼 겨를이 나는 없었어. 대구와 서울의 거리만큼 떨어져서 아버지가 남긴 어둠 속에서 각자가 불을 밝힐 때까지 바라볼 뿐이었어. 큰언니는 결혼한 상태였고, 작은언니는 아팠고, 오빠는 대학을 다녔어. 돈을 벌 사람은 나밖에 없었는데 그해가 지나고 IMF가 왔어. 나는 더 작은 일터로 밀려났어.

 

지나간 것은 추억이 된다는데, 젊어서 고생은 사서도 한다는데 아무리 돌이켜 봐도 그해를 생각하면 추억이라는 단어보다 어둠과 슬픔이 먼저 떠올라.

 

기슭아, 내가 겪은 일은 그 시기 많은 사람이 겪었던 어려움과 비교하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걸 알아. 아마 나는 경제적으로 궁핍하기도 했지만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그해가 더 힘겹게 느껴지는 것 같아. 얘기하다 보니 숱한 그해가 줄줄이 달려 나오려고 해. 오늘은 1996년에서 그쳐야지. 너는 그해라는 단어 뒤에 어떤 이야기를 쓸까?

 

        

 

 

선잠

_박준

 

 

그해 우리는

서로의 섣부름이었습니다

 

같은 음식을 먹고

함께 마주하던 졸음이었습니다

 

남들이 하고 사는 일들은

우리도 다 하고 살겠다는 다짐이었습니다

 

발을 툭툭 건드리던 발이었다가

화음도 없는 노래를 부르는 입이었다가

 

고개를 돌려 마르지 않은

새 녘을 바라보는 기대였다가

 

잠에 든 것도 잊고

다시 눈을 감는 선잠이었습니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2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2019-02-12 11: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2-12 12: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노인

 

 

사람들이 분주히 타고 내리는 지하철 2호선, 서로 밀고 밀린다. 욕을 하는 커다란 목소리. 머리가 벗겨진 저 노인은 온몸이 화로 들끓고 있다. 그저 부딪혔을 뿐인데...... 어디서 묻혀온 노여움을 또다시 퍼뜨리며 고래고래 소리를 지른다. 소란을 피해 달아나는 젊은이의 등 뒤로 불이 옮겨붙는다. 저 노인은 몇 해를 살았을까? 세월이 자비를 짓는 건 아닌가 보다. 화상(火傷)을 입은 것처럼 붉어진, 저 일그러진 얼굴이 다시 부드러운 아기의 살갗이 될 수 있을까?

 

서울 살 때 있었던 일이야. 지하철에서는 화난 노인을 자주 볼 수 있었어. 노약자석에 앉은 젊은 여자에게 욕을 퍼붓는 할머니는 맞은편 노약자석에 앉은 청년은 돌아보지 않았어. 여자는 임산부인데. 도대체 무슨 상황이지? 정말 이상했어. 그들은 노인이기 전에 그냥 화난 사람이지. 그런데도 나는 내가 가진 노인에 대한 이미지와 많이 달라 놀랐어.

 

간호사로 일하는 친구가 말했어. 병원에서의 노인은 누가 많이 배운 사람인지 못 배운 사람인지 구별할 수 없대. 성품은 본래 학벌과 상관없잖아. 양복과 작업복으로 나뉘었던 구별은 주름살과 살짝 뒤뚱거리는 걸음 속에 사라져. 난 노인에 대한 환상이 있었어. 어르신이라고 불러도 좋을 너그러움과 인자함이 있을 거라는. 지금 보니 관대함이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이 있을 뿐이지, 노인이 다 인자함을 가지고 있지는 않아.

 

대개의 노인은 약해. 지하철에서의 노인은 약한 걸 드러내지 않으려고 짖어대는 조그만 강아지였을까? 욕구는, 욕망은 젊을 때처럼 단단한데 조그만 바람에도 뿌리까지 흔들려. 흔들리지 않으려고 부여잡는 힘. 고집이 되고, 독선이 되는 거지. 흔들리는 것처럼 보이지 않으려고 용을 쓰다 뿌리까지 드러내며 화병을 앓기도 하면서. 젊은이보다 더 깨어있는 분들도 많지만 몸이 약해지는 건 받아들여야 하지.    

 

처음부터 노인인 사람은 없어. 모두가 아기였고, 아이였고, 청년이었어. 엄마도 그랬어. 40대 후반에 할머니가 된 엄마는, 엄마인데도 내 기억 속에서 눈물 많은 소녀 같고, 재바른 아이 같았어. 엄마가 50, 60, 70이 되어도 나한테는 그냥 엄마. 내 신발을 닦아주고, 나를 염려하는 사람이었어.

 

재작년 여름에 엄마가 어지럽다고 전화가 왔을 때 난 엄마가 겁먹었다는 걸 눈치챘어. 혼자 있는 게, 혼자서 세상에서 사라질까 봐 두렵구나. 처음 병원에 가는 아이처럼 긴장한 엄마는 이제 늙었어. 어깨도 앞쪽으로 조금 굽었고, 누구보다 잘 걷는다고 자신만만했는데 손잡고 걷는 내 걸음을 몇 번이나 멈추게 했어. 어떤 의사들은 노인들이 하는 이야기를 듣기 싫어해. 그들은 대개 지쳐 있고, 노인 환자는 말을 많이 하는 데다 자기 말을 빨리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지. 그래도 친절하면 좋을 텐데. 말 잘 듣는 아이처럼 검사를 받는 엄마. 엄마를 집에 모셔드리고 오는 길에 30년 후의 나를 생각했어.

 

나는 나야. 다섯 살 때도 스무 살 때도 서른에도 마흔에도 나는 나였어. 아이다, 청년이다, 아줌마다, 규정하지 않았어. 나는 커가고 있어서 무서울 게 없었던 게 아니야. 나는 언제나 나여서 그런 걸 의식할 수 없었어. 그러나 노인이 된다는 것, 다시 아기처럼 힘없는 사람이 된다는 걸 어떻게 받아들일까, 생각해. 유연하게 깨어있는 사람이 될 수 있을까?

    

저기 길에서 수레를 끄는 어르신. 차들은 쌩쌩 달리는데 도로 가장자리에서 너무 천천히 걸어.들이 빵빵거려도 수레는 빨라지지 않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2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2019-02-11 09: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2-11 09: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혜덕화 2019-02-12 17:4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시어머니에 대해서도, 엄마에 대해서도
노인들 왜 저럴까 소리가 이젠 나오지 않아요.
나도 70 넘고 80 넘으면 저렇게 될 수도 있겠구나, 그런 생각이 드니까.
아버지 돌아가시고 혼자 남은 엄마는 부쩍 약해보이고 외로워보여서, 그렇게 씩씩하던 우리 엄마 맞나 싶을 때가 있어요.
생로병사가 고통이라는 부처님 말씀을 진실로 진실이라고 받아들이게 되네요.
설령 기쁨이 반짝이는 날들도, 흐르는 물처럼 지나고 나면
혼자 남는 시간이 올테니까요.
누구나 죽음 앞에서, 노쇠함 앞에서
혼자 남겨지는 시간이
생각보다 빨리 올 것이니까요.

이누아 2019-02-13 16:47   좋아요 0 | URL
쓰다 보니 화난 노인 이야기를 제일 먼저 적었네요. 요즘 쓰려고 앉으면 서울 있을 때 생각이 자주 나요. 그래서 화난 노인이 먼저 생각났나 봐요. 너그럽고 현명한 노인 이야기도 많은데...

우리 엄마는 산골에 살던 분이라 걷고 산에 오르는 건 늘 자신 있어 하셨는데 요즘 다리가 좀 불편해요. 마음은 아직 산골 소녀인데 몸은 점점 느리게 움직이는 것 같아요. 엄마가 이렇게 빨리 늙어가다니.... 거기서 제 모습을 봐요.
 

장래희망

 

 

너는 장래희망이 뭐였니? 나는 문구사 주인이 되고 싶고, 서점 주인이 되고 싶고, 수필가가 되고 싶고, 학자가 되고 싶고, 수행자가 되고 싶었어. 초등학교 6학년 때 서점 주인이 되고 싶다고 했더니 선생님이 그런 건 아무나 할 수 있는 거니까 노력해서 성취할 수 있는 다른 장래희망을 가져 보라고 하셨어.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인 것 같지 않은데, 지금도 그런데...그나저나 아무나는 도대체 누굴까? 그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은 가치 없는 일일까?

 

요즘 작은애의 고민은 장래희망이야. 전에는 산속에 혼자 사는 자연인이 되고 싶다고 하더니 돈을 좀 벌어야겠다고 도시에 살고 싶대. 근데 별다른 장래희망이 없다는 거야. 학교에서도 물어보고 어른들도 물어보고. 설날에 큰애는 장래희망을 말하는데 자기는 없는 게 마음에 걸리는지 고민하더라고.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일이 있듯이 할 수 있다고 다 하고 싶은 건 아니야. 장래희망도 변하고, 희망과 달리 살아도 만족할 수도 있고. 장래희망이 없다고 장래가 없겠니, 희망이 없겠니. 없다가 생길 수도 있고 생겼다가 없어질 수도 있다고 했는데도 이것저것 생각하더니 사실은 집에서 뒹굴뒹굴 놀고 싶대. 빈둥거림이 장래희망이라니, 독특하다.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지만 아무나 할 수 없는 일 같아. 그러나 그게 정답이 아니라는 듯 계속 고민하고 있어. 뭔가 근사한 장래희망이 필요한 것 같은데 그런 근사한 건 하고 싶지 않나 봐.

 

희망조차 정해진 자리에 기입해야 할까? 그 자리에 긍정적인 어떤 걸 적어야 할까? 목표가 확실해서 성취해내는 것도 멋지지만 억지로 그럴 필요는 없지 않나 생각해. 난 내 장래희망과 상관없이 살아. 그렇게 간절하지 않았는지 자꾸 바뀌기도 하고. 장래희망 때문에 괴롭지도 신 나지도 않아. 아무렇지도 않아.

 

눈이 눈을 덮는 것처럼 속없고 빛깔 없는 하루하루 속에 장래 따위는, 희망 따위는 다 잊고 뒹굴뒹굴 뒹구르르 만화책이나 넘기며 지내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이제 겨우 11살인데.

 

 

 

나는 사장의 비위를 거스르고 싶지는 않았으나, 나의 생활을 바꿔야 할 하등의 이유도 찾아낼 수 없었다. 곰곰 생각해 봐도 나는 불행하지 않았다.-알베르 카뮈, 이방인(민음사, 2011), p.51.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사소한 모래주머니

 

 

어제 대구로 와서 친정에 들렀다 집에 돌어왔어. 몸은 시간에 맞춰 지칠 준비가 되어 있었나 봐. 피곤이 확 덮치는데 집에 와이파이가 안 되네. 인터넷 전화는 정상인데. 공유기 문젠가? 전에도 이런 적이 있었지만 리셋을 누르거나 전원을 껐다 켜면 됐는데 안 되네. 폰으로 공유기에 대해 검색해 이것저것 해 봤는데 역시 안 되네. 공유기 산 지 꽤 되었으니 새로 사야겠다고, 평소 단골은 아닌데 배송이 가장 빨라 쿠팡에서 샀어. 아이들이 온라인 숙제하는 데 필요하거든.

 

오늘 오전에 공유기가 왔어. 어떻게 이렇게 빨리 올 수 있지? 밤샘을 하나? 어쨌든 공유기를 설치했어. 인터넷과 연결되는 마지막 단계에서 자꾸 안 되네. 결국 통신사에 전화해서 인터넷 정상인데 공유기 설치하는데 안 된다고 했더니 인터넷 끊었다 새로 연결하고, 공유기 연결하니 되네. 쓰던 공유기가 고장이 아니었나? 그래도 작은 애 방까지 와이파이가 다 되니 바꾼 보람이 있다고 나 자신을 위로했어. 아무래도 간단한 일에 너무 오랜 시간을 보낸 기분이지만.

 

그리고 또 하나 해결할 게 있었지. 큰애가 아침에 아빠에게 혼났던 얘기 했는데 기억나? 그날 아침 아들이 부모를 수신차단 했어. 화가 풀려서 오후에 차단 해제하려니 비밀번호가 필요한데 자기는 비밀번호 설정한 적 없다네. 이것저것 눌러봐도 안 되네. 통신사에 전화했더니 휴대폰 회사에 전화해 보라네. 중소 회사 폴더폰이라 그런지 회사 이름 찾기가 어렵네. “얘야, 전화번호 옮겨라. 폰을 초기화하자.” 초기화했더니 되네. 이제야 아들이 내 전화를 받네.

 

세뱃돈 받은 거 입금해야 하는데 아이들 통장은 어디에 있지? 그러고 보니 이사한 후에 애들 통장을 쓴 적이 없네. 왜 애들 통장을 다른 통장들과 같이 안 뒀을까? 몸이 피곤한데 머리는 왜 따라서 잘 안 움직이는 걸까? 그래, 통장 있던 상자와 같이 있던 물건들이 어디 있지? 끽끽거리는 뇌를 움직여 찾긴 찾았는데 은행에 갈 수 있을까? 내일 갈까? 다행히 오전 근무한 남편이 은행에 간다네. 이렇게 또 하나 해결.

 

그리고......사흘을 비운 집은 깨끗해야 하지 않나? 어떻게 이렇게 금방 어지럽혀지지? 빨래와 설거지도 산처럼 쌓여서 어서 이 산을 정복하라고 재촉하는데......

 

피곤 때문인지 이 사소한 일들이 모래주머니가 되어 팔다리에 매달려 있는 기분이야. 사소하다고 꼭 가벼운 건 아니구나. 주저리주저리 너한테 얘기하면서 모래주머니를 떼 내고 있어. 아직 몸이 가벼워지지는 않네. 일찍 자면 오늘이 빨리 끝나겠지. 내일은 사소한 일은 사소한 일로 여길 수 있는 몸과 마음이 되었으면 좋겠어.

 

네게는 편안한 하루였기를.

 

 

 

하얀 천장을 멍하니 바라본다. 콩알만 한 작은 거미가 한 마리, 바쁘게 발을 움직여 끝에서 끝으로 종단 여행을 감행하고 있었다. 힘내라, 힘내. 마음속으로 응원을 보냈다. 저 거미는 나다. -오쿠다 히레오, 나오미와 가나코(위즈덤하우스, 2015), p.288.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진눈깨비

 

 

어제는 눈비가 내렸어. 눈과 비가 뒤섞인 비를 진눈깨비라고 부르나? 진눈깨비하면 뭔가 흩날리는 느낌인데 내가 본 건 함박눈 같고, 세차게 내리는 비 같았어. 눈 예보에 들떴던 아들이 실망하며 학교에 가고, 나는 한참이나 창밖을 봤어. 내가 무어라고 얘기하면 그 광경이 사라질 것만 같아 가만히 보았어.

 

며칠 전 있었던 단전에 대한 조사를 하려는지 4시간이나 두꺼비집을 내리고 있으라는 방송이 나왔어. 해가 없으니 집은 밤처럼 어두워져. 어둠 때문에 시간이 더 고요하게 느껴졌어. 팔공산에 사는 지인이 보내온 사진은 온통 눈밭이었어. 여기와 거기가 거리가 얼마나 된다고 이렇게 다른 날씨를 경험하는 걸까? 그러고 보니 우리 아파트 안에서도 2단지만 불이 꺼져 있었네. 이렇게 가까이 있어도 얼마나 다르게 하루의 풍경을 기억할까?

 

아이들이 다퉈서 정신이 없는데 친구에게 전화가 왔어. 엉엉 울면서. 아이들 고함과 친구의 통곡 속에서 나는 할 말을 찾을 수 없어서 또 가만히 있었어. 울다 지친 친구가 전화를 끊었어. 전화를 끊고도 내 전화기 속에는 그 울음이 갇혀 있는 것 같아. 여긴 해가 나오고, 전기가 들어왔는데, 친구 집에는 불이 꺼지고 창밖엔 비가 내리고 있는 것 같아.

 

사실 진눈깨비가 내릴 때 나는 그것에 대해 말하려고 했어. 내리는 각도는 어떤지, 입자는 어떤지, 땅에는 어떻게 닿는지.....하지만 볼 때는 보기만 해. 어떤 경험 속에 있을 때는 말하기 힘들어. 그 경험을 벗어나야 비로소 말할 수 있어. 말보다 울음이 먼저 터진 친구처럼 아픔 속에서는 말이 안 나와. 조금 벗어나야 말할 수 있어. 말해야 벗어나기도 하고. 오래 머물고 싶으면 그 순간은 표현을 하지 않는 게 좋아. 빨리 벗어나고 싶다면 애써 말하려고 해야 하고.

 

이제 곧 설이네. 설날이라는 명패만 똑같은, 각자의 다른 날이 기다리고 있어. 그날 하루 전부는 아니라도 한 순간이라도 머물고 싶은 시간이 있었으면 좋겠다. 친구의 집에도 불이 켜지고 햇살이 들면 좋겠다.

 

 

 

진눈깨비

_강은교

 

 

진눈깨비가 내리네

속시원히 비도 못 되고

속시원히 눈도 못 된 것

부서지며 맴돌며

휘휘 돌아 허공에

자취도 없이 내리네

내 이제껏 뛰어다닌 길들이

서성대는 마음이란 마음들이

올라가도 올라가도

천국은 없어

몸살치는 혼령들이

      

안개 속에서 안개가 흩날리네

어둠 앞에서 어둠이 흩날리네

그 어둠 허공에서

떠도는 허공에서

떠도는 피 한 점 떠도는 살 한 점

주워 던지는 여기

한 떠남이 또 한 떠남을

흐느끼는 여기

 

진눈깨비가 내리네

속시원히 비도 못 되고

속시원히 눈도 못 된 것

그대여

어두운 세상 천지

하루는 진눈깨비로 부서져 내리다가

잠시 잠시 한숨 내뿜는 풀꽃인 그대여.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