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인
사람들이 분주히 타고 내리는 지하철 2호선, 서로 밀고 밀린다. 욕을 하는 커다란 목소리. 머리가 벗겨진 저 노인은 온몸이 화로 들끓고 있다. 그저 부딪혔을 뿐인데...... 어디서 묻혀온 노여움을 또다시 퍼뜨리며 고래고래 소리를 지른다. 소란을 피해 달아나는 젊은이의 등 뒤로 불이 옮겨붙는다. 저 노인은 몇 해를 살았을까? 세월이 자비를 짓는 건 아닌가 보다. 화상(火傷)을 입은 것처럼 붉어진, 저 일그러진 얼굴이 다시 부드러운 아기의 살갗이 될 수 있을까?
서울 살 때 있었던 일이야. 지하철에서는 화난 노인을 자주 볼 수 있었어. 노약자석에 앉은 젊은 여자에게 욕을 퍼붓는 할머니는 맞은편 노약자석에 앉은 청년은 돌아보지 않았어. 여자는 임산부인데. 도대체 무슨 상황이지? 정말 이상했어. 그들은 노인이기 전에 그냥 화난 사람이지. 그런데도 나는 내가 가진 노인에 대한 이미지와 많이 달라 놀랐어.
간호사로 일하는 친구가 말했어. 병원에서의 노인은 누가 많이 배운 사람인지 못 배운 사람인지 구별할 수 없대. 성품은 본래 학벌과 상관없잖아. 양복과 작업복으로 나뉘었던 구별은 주름살과 살짝 뒤뚱거리는 걸음 속에 사라져. 난 노인에 대한 환상이 있었어. 어르신이라고 불러도 좋을 너그러움과 인자함이 있을 거라는. 지금 보니 관대함이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이 있을 뿐이지, 노인이 다 인자함을 가지고 있지는 않아.
대개의 노인은 약해. 지하철에서의 노인은 약한 걸 드러내지 않으려고 짖어대는 조그만 강아지였을까? 욕구는, 욕망은 젊을 때처럼 단단한데 조그만 바람에도 뿌리까지 흔들려. 흔들리지 않으려고 부여잡는 힘. 고집이 되고, 독선이 되는 거지. 흔들리는 것처럼 보이지 않으려고 용을 쓰다 뿌리까지 드러내며 화병을 앓기도 하면서. 젊은이보다 더 깨어있는 분들도 많지만 몸이 약해지는 건 받아들여야 하지.
처음부터 노인인 사람은 없어. 모두가 아기였고, 아이였고, 청년이었어. 엄마도 그랬어. 40대 후반에 할머니가 된 엄마는, 엄마인데도 내 기억 속에서 눈물 많은 소녀 같고, 재바른 아이 같았어. 엄마가 50이, 60이, 70이 되어도 나한테는 그냥 엄마. 내 신발을 닦아주고, 나를 염려하는 사람이었어.
재작년 여름에 엄마가 어지럽다고 전화가 왔을 때 난 엄마가 겁먹었다는 걸 눈치챘어. 혼자 있는 게, 혼자서 세상에서 사라질까 봐 두렵구나. 처음 병원에 가는 아이처럼 긴장한 엄마는 이제 늙었어. 어깨도 앞쪽으로 조금 굽었고, 누구보다 잘 걷는다고 자신만만했는데 손잡고 걷는 내 걸음을 몇 번이나 멈추게 했어. 어떤 의사들은 노인들이 하는 이야기를 듣기 싫어해. 그들은 대개 지쳐 있고, 노인 환자는 말을 많이 하는 데다 자기 말을 빨리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지. 그래도 친절하면 좋을 텐데. 말 잘 듣는 아이처럼 검사를 받는 엄마. 엄마를 집에 모셔드리고 오는 길에 30년 후의 나를 생각했어.
나는 나야. 다섯 살 때도 스무 살 때도 서른에도 마흔에도 나는 나였어. 아이다, 청년이다, 아줌마다, 규정하지 않았어. 나는 커가고 있어서 무서울 게 없었던 게 아니야. 나는 언제나 나여서 그런 걸 의식할 수 없었어. 그러나 노인이 된다는 것, 다시 아기처럼 힘없는 사람이 된다는 걸 어떻게 받아들일까, 생각해. 유연하게 깨어있는 사람이 될 수 있을까?
저기 길에서 수레를 끄는 어르신. 차들은 쌩쌩 달리는데 도로 가장자리에서 너무 천천히 걸어. 차들이 빵빵거려도 수레는 빨라지지 않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