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눈깨비
어제는 눈비가 내렸어. 눈과 비가 뒤섞인 비를 진눈깨비라고 부르나? 진눈깨비하면 뭔가 흩날리는 느낌인데 내가 본 건 함박눈 같고, 세차게 내리는 비 같았어. 눈 예보에 들떴던 아들이 실망하며 학교에 가고, 나는 한참이나 창밖을 봤어. 내가 무어라고 얘기하면 그 광경이 사라질 것만 같아 가만히 보았어.
며칠 전 있었던 단전에 대한 조사를 하려는지 4시간이나 두꺼비집을 내리고 있으라는 방송이 나왔어. 해가 없으니 집은 밤처럼 어두워져. 어둠 때문에 시간이 더 고요하게 느껴졌어. 팔공산에 사는 지인이 보내온 사진은 온통 눈밭이었어. 여기와 거기가 거리가 얼마나 된다고 이렇게 다른 날씨를 경험하는 걸까? 그러고 보니 우리 아파트 안에서도 2단지만 불이 꺼져 있었네. 이렇게 가까이 있어도 얼마나 다르게 하루의 풍경을 기억할까?
아이들이 다퉈서 정신이 없는데 친구에게 전화가 왔어. 엉엉 울면서. 아이들 고함과 친구의 통곡 속에서 나는 할 말을 찾을 수 없어서 또 가만히 있었어. 울다 지친 친구가 전화를 끊었어. 전화를 끊고도 내 전화기 속에는 그 울음이 갇혀 있는 것 같아. 여긴 해가 나오고, 전기가 들어왔는데, 친구 집에는 불이 꺼지고 창밖엔 비가 내리고 있는 것 같아.
사실 진눈깨비가 내릴 때 나는 그것에 대해 말하려고 했어. 내리는 각도는 어떤지, 입자는 어떤지, 땅에는 어떻게 닿는지.....하지만 볼 때는 보기만 해. 어떤 경험 속에 있을 때는 말하기 힘들어. 그 경험을 벗어나야 비로소 말할 수 있어. 말보다 울음이 먼저 터진 친구처럼 아픔 속에서는 말이 안 나와. 조금 벗어나야 말할 수 있어. 말해야 벗어나기도 하고. 오래 머물고 싶으면 그 순간은 표현을 하지 않는 게 좋아. 빨리 벗어나고 싶다면 애써 말하려고 해야 하고.
이제 곧 설이네. 설날이라는 명패만 똑같은, 각자의 다른 날이 기다리고 있어. 그날 하루 전부는 아니라도 한 순간이라도 머물고 싶은 시간이 있었으면 좋겠다. 친구의 집에도 불이 켜지고 햇살이 들면 좋겠다.
진눈깨비
_강은교
진눈깨비가 내리네
속시원히 비도 못 되고
속시원히 눈도 못 된 것
부서지며 맴돌며
휘휘 돌아 허공에
자취도 없이 내리네
내 이제껏 뛰어다닌 길들이
서성대는 마음이란 마음들이
올라가도 올라가도
천국은 없어
몸살치는 혼령들이
안개 속에서 안개가 흩날리네
어둠 앞에서 어둠이 흩날리네
그 어둠 허공에서
떠도는 허공에서
떠도는 피 한 점 떠도는 살 한 점
주워 던지는 여기
한 떠남이 또 한 떠남을
흐느끼는 여기
진눈깨비가 내리네
속시원히 비도 못 되고
속시원히 눈도 못 된 것
그대여
어두운 세상 천지
하루는 진눈깨비로 부서져 내리다가
잠시 잠시 한숨 내뿜는 풀꽃인 그대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