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를 가든 거기에는
저 벽을 어떻게 오를 수 있을까. 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이는 일을 하고 싶을 때가 있어. 지루한 일상을 뚫고 지금 이곳이 아닌 새로운 곳으로 가고 싶을 때, 저 벽을 넘어서면 무언가 새로운 세상이 펼쳐질 것 같을 때, 그때가 내게는 이십 대 중반 무렵이었어.
낯설었던 서울 생활은 아무리 물을 부어도 뭉쳐지지 않는 모래처럼 서걱거리는데 아버지의 죽음과 언니의 투병은 나를 가라앉게 했어. 얇은 상자 같은 허술한 마음은 무거운 슬픔을 견디지 못해 곧잘 터져버리고, 텅 빈 자취방의 어둠은 아침이 와도 내 눈 속에 그대로 고여 있었어. 마음 붙일 곳 없는 거대하고 적막한 도시를, 문을 열면 왈칵 무어라도 쏟아질 것 같은 자취방을 떠나고 싶었어. 하얀 눈처럼 모든 걸 덮어버리고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될 수 있는 곳, 달아날 수 있는 곳. “그래, 히말라야! 나는 히말라야로 가야겠어!”
그러나 내게 그런 막연한 대담함은 없었어. 준비하자는 생각에, 신문에 난 ‘등산학교’ 광고를 보고 찾아갔어. 등산학교는 매 주말 1박 2일의 일정으로 한 달 정도 진행되었어. 등산의 기본이 되는 여러 가지를 익혔는데, 그중 거의 모든 일정에 암벽등반과 관련된 교육이 있었어. 암벽등반은 북한산 인수봉에서 대여섯 코스를 연습해 오르곤 했는데 처음엔 용기가 필요했지만 결국은 체력과 끈기가 관건이었어. 마지막 코스에선 너무 지쳐 팔에 힘이 없었어. 이래선 안 되겠다 싶어 아침마다 집 근처 낮은 산에 올라 스트레칭도 하고, 악력기로 손힘도 키웠어.
벽을 올랐어. 처음 바위틈을 발견했을 때 반가운 마음에 그곳에 발을 깊이 넣었더니 몸까지 끼어 잘 움직이지 않은 적도 있고, 발 디딜 곳이 없어 보였던 매끈한 곳에서 디딜 곳이 보였을 때는 기쁨의 탄성을 지르기도 했어. 가장 중요한 것은 떨어지려고 할 때 ‘추락’이라고 큰 소리를 질러 동료에게 내 위험을 알리는 것이었어. 얼마나 자주 ‘추락’을 외쳤는지. 만일 그렇게 외치는 연습을 하지 않았다면 “어~어~”하다 떨어졌을지도 몰라.
암벽을 오르기 위해서는 손과 발만 벽에 닿아야 해. 두려움에 몸을 벽에 붙이면 꼼짝할 수가 없어. 현실이 어떻든 그곳에 발을 딛고 있어야 하지만 온몸을 붙이고 그것이 전부인 양 매달릴 때는 한 발짝도 나갈 수 없고, 아무 길도 열리지 않아. 안전해 보이는 길도 안전하지 않고, 위험해 보이는 길도 빛나는 길이 되기도 해.
힘들면 힘들다고 소리쳐야 해. 누군가와 함께 오르는 게 좋아. 떨어질 때 추락하지 않도록 서로 줄을 당겨줄 사람이 있어야지. 그리고 그 줄을 잡고 있는 서로를 믿어야 하고. 나를 묶고 있는 줄은 무엇일까? 가족일까? 친구일까? 내 추락의 순간에 소리쳐 나를 보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은 누구일까? 나는 누구에게 그런 사람일까? 이런 생각들 속에서 벽은 내 삶에 녹아들고 있었어.
마지막 주가 되었어. 평소에는 밤이 되면 텐트 안에서 줄 묶는 법이나 등반에 관한 이론을 익혔는데 그날은 지도를 보고 길을 찾는 법을 익히고, 텐트 없이 밖에서 자는 비박을 하려고 했어. 날은 이미 어두운데 안개까지 짙었어. 능숙한 교사들도 결국 길을 잃었어.
우리 조가 멈춘 곳은 능선 끝 벼랑. 교사들이 조치를 취해 우리는 모두 벽을 타고 그곳을 내려왔어. 9명이 모두 내려오는 데 1시간이 넘게 걸렸어. 3월이었는데도 추위로 몸이 떨렸어. 의지할 수 있는 건 헤드라이트 불빛뿐이었어. 내리막에서 나는 몇 번이나 발 디딜 땅을 확인했어. 그래, 저기를 디디는 거야, 하고. 그런데 뭐가 잘못된 걸까. 내가 그토록 확신했던 땅은 허공이었어. 능선의 아래는 산 아래로 이어지고, 거기에서 떨어진다는 것은 죽음을 의미하는데.
몸이 붕 떠올랐어. 나도 모르게 풀을 잡았더니 그 풀이 뿌리까지 뽑히는 것이 선명하게 보였어. 갑자기 온산이 환해지고 나는 벌거벗은 것처럼 가벼웠어. ‘나는 이렇게 가벼운데, 풀뿌리까지 뽑히는 구나’, ‘이렇게 가볍고 환하다면 죽는 것도 괜찮을지 몰라’하는 생각들이 아주 천천히 일어났어. 그러다 갑자기 움직임이 멈추고 따뜻해졌어. 무슨 일이 벌어진 걸까?
나는 우리 조 담임교사의 품에 안겨 있었어. 가볍고 벌거벗은 듯 느껴졌던 몸은 두꺼운 외투와 20kg에 가까운 커다란 배낭 때문에 생각보다 천천히 굴렀던 모양이야. 선생님이 약간 평평한 곳에서 기다렸다 나를 받아 안았는데 다행히 바지가 찢긴 것 외에 다치신 곳은 없었어. 모두가 가슴을 쓸어내리고, 다음날까지 내 사고는 얘깃거리가 되었지.
길을 잃을지는 아무도 몰랐어. 내가 확신한 땅이 허공일지도 몰랐어. 전혀 예상할 수 없는 상황에서 삶이 끝날 수도 있었다고 생각하니 오히려 죽음이 멀리 있는 것 같지 않고, 어쩌면 내가 생각하는 것만큼 고통스럽거나 나쁘지 않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어. 아버지도 언니도 각자의 벽을 오르고 있을 뿐. 나의 염려와 슬픔이 벽을 오르는 그들의 줄을 더 튼튼하게 할 수 없으며 ‘추락’을 외칠 때 서로의 끈을 꽉 잡아주는 것 외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어.
마찬가지로 나는 나의 벽을 오르고 있지. 서울이든 히말라야든 어디에 가든 거기엔 내가 있고, 나를 따라 삶과 죽음이 나란히 걷고 있다고 생각하니 벽에 몸을 붙인 듯 꼼짝 못 할 것 같았던 답답한 마음이 조금 가벼워졌어. 죽음의 문턱에 다녀오고서야 나는 달아나지 않기로 했어.
간혹 어딘가 멀리 달아나고 싶을 때 그날을 생각해.
네가 어디를 가든 거기에는 네가 있다(Wherever you go There you are)_존 카바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