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참론을 읽다가
어제 정민의 『한시미학산책』(휴머니스트, 2017) 중 시참론(詩讖論) 부분을 지인들과 함께 읽었어. 시참은 무심히 한 말이 뒷날의 예언이 되는 경우를 말해. 가수가 노래 가사와 비슷한 삶을 살게 되거나 시인이 자기가 쓴 시의 내용대로 산다는 종류의 이야기와 통하는 거야. 함께 얘기하다 시에는 긍정적인 요소를 넣는 게 좋다는 데까지 이야기가 이르자 마음이 불편했어.
책에 나온 예라는 것이 우홍적이 일곱 살 때 “늙은이 머리 위에 내린 흰 눈은/봄바람 불어와도 녹지를 않네”를 쓴 걸 보고 이 사람이 요절할 것을 알았다는 식이야. 근데 그가 그냥 이 시를 지은 게 아니라 로老와 춘春자로 글을 짓게 해서 지은 거야. 기발한 아이디어 정도로 여겨도 될 것을 시참이라고 하는 거야. 우홍적이 정말 요절했으니까. 난 아무래도 끼워 맞추기 같아.
어쨌든 실제로 시참이 있다고 쳐. 그렇다면 그는 시 때문이 아니라 시를 쓰는 그 마음과 몸 때문에 요절했다고 해야 옳지 않을까. 시참이 두려워 자기 마음속에 일어나는 것들을 예쁜 것들로 포장한다면 어떻게 시인이라고 할 수 있을까.
나는 오히려 생활에서 말할 수 없지만 홀로 있을 때 일어나는 마음속 이야기를 현미경처럼 바라보기도 하고, 천체망원경으로 저 우주에서 바라볼 수도 있는 게 시인이라고 생각해. 시 안에서는 자신에게 무엇이든 허용할 수 있어야 조그만 종이 위에서라도 자유를 누릴 수 있는 것 아닐까.
긍정적으로 시를 써야 한다는 이야기를 자주 들어. 모르겠어. 어떨 땐 긍정적이고 어떨 땐 부정적이지. 그게 삶이고, 그게 시라고 생각해. 그래서 이해인 수녀님의 시도 읽고, 이상 시인의 시도 읽는 거 아닐까?
내게는 야망도 욕망도 없다.
시인이 되는 건 나의 야망이 아니다.
그건 내가 홀로 있는 방식.
-페르난도 페소아, 『시는 내가 홀로 있는 방식』(민음사, 2018), p.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