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한 친구
“당신에게는 진정한 친구가 있나요?”라는 질문으로 끝나는 에세이를 포털 어디에서 읽었어. 진정한 친구라니? 나도 모르게 친구의 얼굴을 떠올려 봐. 압정으로 꽂아둔 것처럼 진정한 친구라고 하면 떠오르는 친구가 있어. 그렇지만 문득 진정하지 않은 친구는 누구지? 라는 생각이 들어. 어쩌다 사람 앞에 ‘진정한’을 붙이게 되었을까? ‘진정한 부모’, ‘진정한 형제’, ‘진정한 부부’라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어. 친구는 ‘진정한’이 필요한 존재일까. 진짜 참기름, 진짜 진짜 참기름처럼. 진정한 친구를 기대하거나 진정한 친구라고 기대받는 일이 좋기만 한 일일까?
시소가 수평을 유지할 때는 누가 타고 있을 때야. 기울어지면 멀어져. 아니, 멀어진다고 믿어. 그러나 실제로는 같은 거리야. 같은 거리를 두고 가까워지려고, 멀어지려고 용을 쓰고 있는 건 아닐까. 수평에 대해 집착하거나 저만 위로 오르려는 속마음 같은 건 ‘진정한’이 아닌 걸까? 더 높이 오르게 하고 싶어, 있는 힘껏 몸을 뒤로 젖히고 있으면 ‘진정’일까? 어디까지가 진정이고 어디까지가 진정이 아닐까? 같은 길이의 시소 위에서 진정하고 진정하지 않은 걸 재고 있는 건 아닐까?
아무래도 더 친하고 나와 잘 맞는 친구가 있기 마련이지. 이유 없이 끌리는 친구도 있고, 껄끄러운 친구도 있고. 그게 아주 오래 가는 경우도 있고, 나나 그 친구 사정 때문에 멀어졌다 가까워지기도 하고. 그렇지만 별표를 붙이듯 누구는 진정한 친구고, 누구는 그렇지 않은 친구라고 정해놓고 나면 기대라는 게 생기고, 기대는 기대기 마련이라 내가 기댈 수 없으면 섭섭해져.
“진정한 친구가 있습니까?”라는 질문에 아무도 떠오르지 않아도, 몇 명이 떠올라도 그건 다 자기가 정해놓은 어떤 것일 뿐 진짜는 몰라. 가족은 진정한가? 부부는 진정한가? 진정하다가 안 진정하다가 가족이니까 보듬다가 가족이니까 잉잉거리다가 가족이라도 멀어졌다가 가까워졌다가 하지 않나? 삶에 고정된 관계라는 게 있다면 그건 관계가 아니라 개인의 신념이나 믿음 문제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
이런저런 일들이 있어. 내가 모르는 일을 겪는 친구도 있고, 친구가 모르는 일을 겪는 내가 있어. 우리는 만나고 싶은 대로, 그렇게 만나기로 정한 대로, 가장 적절한 사람에게 자신을 내보였다 감추었다 하며 살아가고 있어.
기슭아, 우리는 진정한 친구일까? 만나지 않고서 ‘진정한’은 무슨 의미일까? 그렇다면 진정하지 않는 친구일까? 만나지 않는데 ‘진정하지 않은’지는 어떻게 알 수 있을까? 만나면 알 수 있을까? 괜스레 친구가 많다고, 없다고, 진정한 친구라고, 진정하지 않은 친구라고 생각하면서 우쭐대거나 낙담할 필요는 없어. 그저 우리 앞에 사람이 있어. 그 사람을 만나는 순간이 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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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내 낡은 옷들은
깃발처럼 펄럭일까?
나는 때때로 악한가
아니면 언제나 선한가?
우리는 친절을 배우나
아니면 친절의 탈을 배우나?
악의 장미나무는 희고
선의 꽃들은 검지 않은가?
누가 무수한 순결한 것들에게
이름과 숫자를 부여하는가?
-파블로 네루다, 『질문의 책』(문학동네, 2013), p.1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