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는 다 느리게 걷는다

 

 

저번 주 토요일에 마트에 갔어. 지하에서 먹을 걸 사서 계산대로 갔더니 여러 계산대 중에 두 개의 계산대에서만 결제하고 있었어. 주말 오전이라 그런지 두 곳 다 줄이 많이 길어서 1층으로 올라갔어. 지하 계산원들이 무인계산대 안내를 하고 있었어. 무인계산대에도 사람이 다 차 있고, 계산대 줄이 길지 않아 계산대에서 계산했지.

 

내 앞에 할아버지 한 분이 계산 중이었어. 계산원이 포인트 적립까지 해드렸는데 카드를 안 내시는 거야. 나는 벌써 물건을 다 올려놓고 계산하려고 옆에 서 있었어. 의아해서 쳐다보는데 천천히 주머니에서 만 원짜리 여러 장을 꺼내셨어. , ... 그 계산대는 카드 전용이었어. 계산원은 할아버지에게 기다려 달라고 하고는 누군가를 호출했어. 결국 할아버지는 고객센터로 가서 현금으로 결제하셨어. 그 모습을 보는데 마음이 조금 무거웠어. 우리 엄마 모습 같고, 훗날 내 모습 같아서.

 

남편이 그 마트 다니는 직원 한 분을 아는데 그분이 그러더래. 무인계산대는 사람 쫓아내는 기계라고. 마트 내부에서 직원들이 반대하는 모양인데 계산대 계산원을 줄이니까 사람들이 할 수 없이 무인계산대로 가. 거기 익숙해지면 계산원이 더 필요하지 않겠지. 계산대는 줄고, 게다가 현금을 쓸 수 있는 계산대는 한 곳뿐이라 카드를 안 쓰는 어르신은 오래 기다려야겠지. 카드 안 쓰는 사람도 있냐고? 우리 엄마도 안 쓰셔.

 

뉴스를 보니 은행에서 종이 통장을 없앤다고 해. 65세 이상 노인에게는 원하면 그냥 발급해 주고, 그 외에는 꼭 필요하다는 사람에게 몇 천 원 받고 발급할 거래. 내가 옛날 사람처럼 느껴져. 우리 집엔 10여 년 전 통장도 다 있어. 그게 우리 집 가계부고, 일터 장부거든. 난 아직도 폰뱅킹을 써. 고객센터 같은 데 연락하는 것도 홈페이지를 이용하거나, ARS로 하는 게 불편해. 사람하고 이야기하는 게 제일 편해. 물론 바뀌는 대로 적응하면 더 편리할 수 있다는 걸 아는 데도 하던 대로 하고 싶고, 새로 뭘 익히는 게 번거롭게 느껴져.

 

나이 든다는 게 마음이든 몸이든 느려지는 건가 싶어. 며칠 전에 절 마당에서 엄마가 차에 부딪혔어. 주차장도 아닌 곳에 주차하려다 서서 합장하는 엄마를 치었나 봐. 충격이 꽤 있었는데 다행히 뼈는 괜찮아. 그렇지만 엄마 연세가 있어서 회복이 더디 될까 걱정이야. 젊은 사람 같았으면 피할 수 있었을지 모르고, 금방 나을 수도 있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들어.

 

그래도 속도를 못 좇아간다고 한탄하기보다 좀 느리다는 걸 받아들이는 게 잘 늙어가는 게 아닐까 해. 날다람쥐 같던 엄마의 느린 걸음을 맞춰 걷다 보면 나도 모르게 울컥해. 엄마의 이런 모습을 상상할 수 없었듯이 엄마도 엄마가 이렇게 늙어가는 모습을 생각하지 못하셨을 거야. 엄마가 잘 받아들이고, 천천히라도 오래 걸었으면 해. 변화에는 다 이유가 있는 거겠지만 우리 엄마 가는 곳마다 기계가 아니라 사람이 응대해 줬으면 좋겠어. 느린 속도를 이해해줬으면.

 

 

 

일흔의 고갯마루

_이진흥

 

  

젊은 날 멀리 보이던, 일흔의 고갯길로 힘겹게 올라가는 등 굽은 노인들의 뒷모습 아득했는데, 이곳저곳 바쁘게 뛰어다니다 잠이 든 사이 누가 내 등을 밀었는지 오늘 아침 눈을 떠보니 내가 그 고갯마루에 올라와 있다 생전 처음 도달한 이 높은 고개, 율곡도 세종대왕도 오르지 못한 일흔의 고갯마루에 내가 이렇게 서 있다니 놀랍다 어찌된 일인가, 지나온 길 돌아보니 서쪽 나뭇가지 사이로 곤줄박이 한 마리 날아가고, 발밑 이끼 낀 돌 틈에서는 키 작은 제비꽃이 고개를 들고 빤히 쳐다보고 있다

 

- 이진흥, 어디에도 없다(동학사, 2016), p.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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