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0

 

 

오늘은 610일이야. 87년을 생각해. 그해는 시위의 해였지. 대통령 직선제를 요구하는 대학생들이 매일 거리에서 최루탄을 맞았어. 나는 그때 시내 가까운 중학교에 다니고 있었어. 시위는 늘 내가 하교한 후에 있었지만 시위를 막기 위해 전경 차가 학교 운동장 가에 대기 중이었어. 창문에 서서 전경들에게 손을 흔들기도 했지. 이상하게 그 장면을 떠올리면 전경들 얼굴이 아기 얼굴처럼 보여. 그 얼굴을 가리고 방패를 들고 친구가 될 만한 이들을 내리찍었겠지. 그중 어떤 이들은 때리면서 아팠을지 몰라.

 

작은언니가 86학번이어서 이 회오리 속에 있었어. 사범대 학생들은 시위를 별로 하지 않는다지만 그때는 거의 모든 학생이 다 거리로 나갈 때라 언니 과도 단체로 다 나갔다고 해. 시뻘겋게 상기된 얼굴로 들어와 한동안 방 안에 가만히 앉아 있던 언니가 생각나. 두려움 속에서 옳은 일을 하려면, 나약한 사람이 나약하게만 살지 않으려면, 참 많은 걸 내놓아야 해. 그저 낭만을 내려놓는 게 아니라 목숨을 내놓아야 했던 사람들도 있었지.

 

촛불집회 때 유모차를 끌고 집회에 나간 사람들이 있었지. 집회가 안전하다는 믿음이 없으면 할 수 없는 행동이지. 그런데 백골단과 쇠파이프가 없어진 것이 그저 가만히 있는데 이뤄진 일이 아니야. 투표라는 단순한 일도 누군가의 시간과 공포와 목숨으로 뽑아낸 종이 위에 도장을 찍는 일이지.

 

요즘은 다른 식으로 세상을 바꾸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어. 미투가 그중 하나지. 온갖 2차 가해를 당하면서도 미투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이미 세상을 바꾸고 있어. 농담처럼 말하는 이에게 처벌받을 수 있다는 걸 살짝 상기만 시켜줘도 조심하게 되었어. 우리는 미투에 참여하는 사람들에게 빚지고 있다고 생각해.

 

그렇게 쟁취한 직선제를 통해 선출된 대통령이 쿠데타의 주역이었다는 게 아이러니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때의 항쟁이 무의미하지는 않았어. 보이는 곳에서 보이지 않는 곳에서 지금도 꾸준히 계속되는 노력이 앞으로 뒤로 앞으로 뒤로 움직이지만 조금씩 나아가고 있다고 믿어.

 

 

 

_신경림

 

 

어둠을 어둠인지 모르고 살아온 사람은 모른다

아픔도 없이 겨울을 보낸 사람은 모른다

작은 빛줄기만 보여도 우리들

이렇게 재재발거리며 달려나가는 까닭을

눈이 부셔 비틀대면서도 진종일

서로 안고 간질이며 깔깔대는 까닭을

 

그러다가도 문득 생각나면

깊이 숨은 소중하고도 은밀한 상처를 꺼내어

가만히 햇볕에 내어 말리는 까닭을

뜨거운 눈물로 어루만지는 까닭을

 

-신경림, 쓰러진 자의 꿈(창작과비평사, 1993), p.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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