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계를 보다가
시간이 빨리 간다, 빨리 간다, 벌써 한 해가 간다, 는 말을 하기도 많이 하고, 듣기도 많이 들어. 우리가 20대에도 이런 말을 자주 했던가?
크리스티안 예이츠라는 교수가 ‘마음 시간’이란 걸 계산했다고 해. 우리가 감지하는 시간은 우리가 이미 살았던 기간의 비율에 좌우된다는 거야. 그러니까 10살 아이에게 1년은 자신의 삶의 10%이고, 20살 청년에게 1년은 자신의 삶의 5%지. 이런 식으로 계산하면 5~10살이 5년 동안 겪는 경험이 40살부터 80살까지 40년간 겪는 경험과 같은 셈이라고.
우리 아이가 사는 1년과 내가 사는 1년이 서로 다르게 흘러간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묘해. 그렇다면 내 시간은 이제 짧아지는 것만 남은 걸까? 기계적으로만 장수하는 것이지, 알고 보면 앞으로 40년을 더 살아도 마음의 시간으로는 내 아이의 마음 시간 5년 정도만 사는 걸까?
‘마음 시간’이라는 말 대신 ‘주관적 시간’이라는 말로 왜 어떤 시간은 빨리 흐르고, 어떤 시간은 그렇지 않은가에 대해 쓴 책을 본 적이 있는데, 너무 오래전이라 책 제목이 생각이 안 나. 거기에는 한 번도 가보지 않은 친구 집을 찾아가는 예가 나와. 갈 때는 시간이 길게 느껴지고, 돌아올 때는 짧게 느껴진대. 갈 때는 낯선 길이지만 올 때는 이미 익숙한 길이잖아. 새로운 걸 하면 시간이 느리게 가고, 익숙해지면 시간이 빨리 가는 것처럼 느껴진다는 거지.
‘주관적 시간’은 ‘마음 시간’처럼 연령대를 설정하지 않았어. 그렇지만 우리가 유추해볼 수 있지. 아이들은 처음 경험하는 일이 어른보다 몇 배는 더 많으니까 그들의 마음 시간이 더 천천히, 길게 흐를 수 있지 않을까. 주관적 마음의 관점에서 보면 나이와 상관없이 새롭게 사는 사람, 새로운 경험을 하는 사람들에겐 시간이 더 천천히 흐를 수 있겠다. 여행하고, 도전하는 사람들이 더 젊게 보이는 것도 같은 맥락으로 이해할 수 있겠다, 싶어.
이런 시간에 대한 이야기들을 어떻게 신뢰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과학적 소양이 달려서 뭐라 할 수 없지만 열 살에, 스무 살에 시간이 빨리 간다고 느낀 적은 거의 없었던 것 같아. 요즘 시간이 빨리 흐른다는 생각이 자주 나. 나이 때문이라고 생각하면 편하기도 하지만 내가 새로운 걸 시도하고, 새로운 곳에 가는 걸 좋아하지 않는 까닭 같기도 해.
『장자』에도 수명에 대한 이야기가 있어. 옛날에 대춘이라는 나무가 있었는데 그 나무에게는 8천 년 동안이 봄이고, 다시 8천 년 동안이 가을이래. 그러니까 수명은 그보다 훨씬 길겠지. 장자 시대에 700살 넘게 산 팽조라는 사람이 장수로 유명한데, 이 나무에는 비길 수가 없다는 거야. 근데 대춘 나무와 팽조 중에 주관적 시간으로는 누가 오래 살았는지 알 수 있을까? 너무 차이가 크게 나서 예로 들기 뭐한가?
기계적 시간도 무시할 수 없다고 생각해. 그렇지만 주어진 시간을 어떻게 느끼고, 무엇을 하는지를 알아차리면서 살 수 있다면 자신의 주관적 시간의 길이도 달라지지 않을까. 어찌보면 그보다 시간에 끌려다니지 않고, 시간을 쓰면서 살아갈 수 있게 되지 않을까. 시간 이야기를 하고 있으니 거실 시계 돌아가는 소리가 더 선명하게 들려. 착착, 척척, 턱턱.
기슭아, 네 시계 소리는 어때?
시계
_송승언
그 집 대문 앞에는 시계와 의자가 있었다 시계는 멈춰 있었고 움직이는 건 아무 것도 없었다 의자에 앉은 늙은 시인은 종일 아무것도 없는 거리 멈춰 있는 시계를 보다가 대문 안으로 사라지곤 했다 그 집 대문 앞에는 시계와 의자가 있었다 이제 늙은 시인은 없고 의자는 비어 있다 나는 조심스레 빈 의자에 앉아 내가 가스를 마시며 뛰어다녔던 그 거리를 본다
-송승언, 『사랑과 교육』(민음사, 2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