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패딩 입은

 

 

저번 토요일에는 어찌해서 저녁에 혼자 학교 운동장을 걸었는데 속이 메스꺼웠어. 항생제 탓인가 하면서 집으로 오는데, 아무래도 속이 불편해서 잠시 편의점 의자에 앉아 쉬었어. 거기서 롱패딩을 입은 남자를 봤어. 뚫어지게 TV를 보고 있었어. 그 편의점에 밖에서 볼 수 있는 텔레비전이 있다는 걸 처음 알았어. 좀 과하다는 느낌이 들었지만 날이 좀 쌀쌀해서 그의 행색이 영 이상하진 않았어. 그래도 식구랑 싸우고 집에 못 들어가나, 하는 생각을 들었어.

 

다음날 도서관에 갔다가 전화를 받으려고 휴게실에 갔어. 사람 얼굴을 거의 기억하지 못하는 나지만 이 가을에 롱패딩을 입고 있는 사람을 어떻게 못 알아보겠어. 검은 패딩을 입은 남자가 똑같이 검은 패딩을 입은 남자와 함께 있었어. 휴대폰으로 영상을 보며 해맑게 웃고 있었는데 밝은 데서 보니 나보다 훨씬 어려 보였어. 그의 곁에 놓인 낡고 작은 캐리어를 보니 정말 집이 없거나 집 나온 사람이구나, 싶었어.

 

그다음 날 운동을 마치고 집에 오는 길에 편의점 근처에서 패딩 입은 두 남자가 작은 캐리어를 끌고 가는 걸 또 봤어. 그때서야 저 사람들은 어디서 자는 걸까? 궁금해졌어. 우리 동네에 온 지 얼마 안 된 것 같은데 잘 데가 있나? 그냥 노숙하느라 롱패딩을 낮에도 입고 다니나?

 

오늘은 도서관 바깥에 둘이 서 있는데 벽에 붙어 있어서 멀리서 보면 무슨 그림자처럼 보였어. 노숙을 오래 한 사람은 아닌 건지 며칠 만에 초췌해졌어. 도서관에서는 무슨 행사가 있는지 로비에서 현악 3중주 연주가 있고, 사람들이 북적거렸어. 그래서 못 들어갔나?

 

이렇게 길게 이야기를 하는 건 그들이 모르는 사람이지만 거의 매일 만나다시피 하니까. 게다가 나보다 한참 어려 보이는데 어쩌다 둘이 이 동네에서 노숙하게 되었나 궁금하기도 하고. 내일도 도서관이나 편의점에서 만나게 될까, 싶기도 하고.

 

나중에 그 두 사람이 따뜻한 방에 앉아 웃으며 이야기 나눌 수 있을까? 젊었을 때 그림자처럼 길게 누워 있던 때가 있었잖아, 작은 캐리어처럼 좁은 동네에서 지독하게 추운 가을밤을 지냈지, 궤도를 이탈해 떠돌았잖아, 하면서.

 

어둠이 불어와. 그림자가 어둠에 덮이듯 저들도 어떤 어둠에 덮여 있는 걸까? 겨우 며칠이 지났는데 초췌해진 모습이 떠올라. 그게 그냥 내 눈에 비치는 모습이었으면, 그들의 내면은 자유롭게 반짝이고 있었으면. 그렇지만 기슭아, 이제 6시가 좀 넘었는데 벌써 어둡고 서늘해.

 

 

 

 

  이탈한 자가 문득

  _김중식

 

  우리는 어디로 갔다가 어디서 돌아왔느냐 자기의 꼬리를 물고 뱅뱅 돌았을 뿐이다 대낮보다 찬란한 태양도 궤도를 이탈하지 못한다 태양보다 냉철한 뭇별들도 궤도를 이탈하지 못하므로 가는 곳만 가고 아는 것만 알 뿐이다. 집도 절도 죽도 밥도 다 떨어져 빈 몸으로 돌아왔을 때 나는 보았다 단 한번 궤도를 이탈함으로써 두 번 다시 궤도에 진입하지 못할지라도 캄캄한 하늘에 획을 긋는 별, 그 똥, 짧지만, 그래도 획을 그을 수 있는, 포기한 자 그래서 이탈한 자가 문득 자유롭다는 것을

 

 

-김중식, 황금빛 모서리(문학과지성사, 19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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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0-24 19:3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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