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징어
-유하


눈 앞의 저 빛
찬란한 저 빛
그러나
저건 죽음이다

의심하라
모오든 광명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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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고 난 뒤의 팬티
-오규원


가벼운 교통사고를 세 번 겪고 난 뒤 나는 겁쟁이가 되었습니다. 시속 80킬로만 가까워져도 앞좌석의 등받이를 움켜쥐고 언제 팬티를 갈아 입었는지 어떤지를 확인하기 위하여 재빨리 눈동자를 굴립니다.

산 자(者)도 아닌 죽은 자(者)의 죽고 난 뒤의 부끄러움, 죽고 난 뒤에 팬티가 깨끗한지 아닌지에 왜 신경이 쓰이는지 그게 뭐가 중요하다고 신경이 쓰이는지 정말 우습기만 합니다. 세상이 우스운 일로 가득하니 그것이라고 아니 우스울 이유가 없기는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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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깨를 털면서
_김준태


산그늘 내린 밭 귀퉁이에서 할머니와 참깨를 턴다.
보아하니 할머니는 슬슬 막대기질을 하지만
어두워지기 전에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젊은 나는
한번을 내리치는 데도 힘을 더한다.
세상사에는 흔히 맛보기가 어려운 쾌감이
참깨를 털어 내는 일엔 희한하게 있는 것 같다.
한번을 내리쳐도 셀 수 없이
솨아솨아 쏟아지는 무수한 흰 알맹이들
도시에서 십 년을 가차이 살아본 나로선
기가막히게 신나는 일인지라
휘파람을 불어가며 몇 다발이고 연이어 털어댄다.
사람도 아무 곳에나 한 번만 기분 좋게 내리치면
참깨처럼 솨아솨아 쏟아지는 것들이
얼마든지 있을 거라고 생각하며 정신없이 털다가
“아가, 모가지까지 털어져선 안 되느니라”
할머니의 가엾어하는 꾸중을 듣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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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타
_이달균


등짐이 없어도 낙타는 걷는다
고색한 성채의 늙은 병사처럼
지워진 길 위의 생애, 여정은 고단하다

생을 다 걸어가면 죽음이 시작될까
오래 걸은 사람들의 낯익은 몸내음
떠나온 것들은 모두 모래가 되어 스러진다

모래는 저 홀로 길을 내지 않는다
동방의 먼 별들이 서역에 와서 지면
바람의 여윈 입자들은 사막의 길을 만든다

낙타는 걸어서 죽음에 닿는다.
삐걱이는 관절들 삭아서 모래가 되는
머나먼 지평의 나날 낙타는 걷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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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건한 슬픔 
_김일연


끊임없이 값어치를 무게로 재고 있는 
도살당한 고기들과 일용하는 양식들 
먹기를 삼백 예순 닷새 거른 날 하루 없네 

생각하면 뜨거움만으로 사는 것은 아닌 것 
온몸으로 부는 바람 온몸으로 지는 꽃잎 
잎 다진 목숨들 안고 인내하는 겨울山 

헐벗은 무얼 다해 가고 있나, 너의 허울 
끊임없이 값어치를 맑기로 재고 있는 
새벽녘 생수 한 잔이 뼈 속에 차갑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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