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필

_장하빈

 

 

새가 날개 접으면 새의 주검 되듯

밥그릇 엎으면 하얀 사리 무덤 되듯

붓을 꺾으면 생의 불꽃 사그라지네

붓끝에서 불꽃이 피어나는 까닭이네

 

-장하빈, 신의 잠꼬대(시와 반시, 2021)

 

 

릴케는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글을 쓸 수 없게 되면 차라리 죽음을 택하겠는지 스스로에게 물어보라고 했다. 그 정도의 마음이어야 글을 쓸 만한 걸까. 글을 쓴다는 게 뭘까. 신의 잠꼬대가 끝나면 저절로 절필이 될까. 시인에게 절필은 하얀 사리 무덤 같은 걸까. 몇 달 전 만났던 노시인이 당신은 늘 옆길로 샜다고, 아니 옆길에서 살았다고 하셨다. 그 옆길이 직장이었다고. 그러니까 생계가, 생활이 옆길이고 시와 문학이 본길이었다는 말이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그런 생각으로 살아서 시인이 되었을까. 시인이 되어서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을까. 붓끝에서 불꽃이 피어나야 살아있는 것 같은 사람들이 정말로 있다. 장하빈 시인도 그런가 보다. 절대로 절필할 수 없다는 절필의 시를 쓰는 걸 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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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래시계

_신용목

 

 

잤던 잠을 또 잤다.

 

모래처럼 하얗게 쏟아지는 잠이었다.

 

누구의 이름이든

부르면,

그가 나타날 것 같은 모래밭이었다. 잠은 어떻게 그 많은 모래를 다 옮겨왔을까?

 

멀리서부터 모래를 털며 걸어오는 사람을 보았다.

모래로 부서지는 이름을 보았다.

가까워지면,

 

누가 누군지 알 수 없었다.

 

누군가의 해변이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잤던 잠을 또 잤다.

 

꿨던 꿈을 또 꾸며 파도 소리를 듣고 있었다. 파도는 언제부터 내 몸의 모래를 다 가져갔을까?

 

누군가가 누군가를 부르면,

 

내가 돌아보았다.

 

누군가가 누군가를 부르지 않아도

나는 돌아보았다.

 

-신용목, 누군가가 누군가를 부르면 내가 돌아보았다(창비, 2017)

 

 

아침에 인간극장을 봤다. 치매 걸린 아버지를 모시는 효자 이야기다. 그 아버지가 그런다. 나는 열 몇 살이었는데 지금은 아흔이 넘었다고. 가짜로 나이를 먹은 건지, 가짜가 아닌지... 정확히는 아니지만 이런 말이었다. 그 아버지는 열 몇 살이던 자신이 어떻게 아흔이 된 것인지 믿을 수 없는 것이다. 파도는 언제부터 그 노인의 몸에서 시간의 모래를 다 가져갔을까. 내 몸에는 얼마만큼의 모래가 남아 있을까. 내게서 흘러나간 모래는 다 어디로 가 있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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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혼

_배수연

 

 

너에게 할 말이 있어

, 숲 속의 양들이 춤을 추고 있네

캐럴에 흔들리는 종처럼 신이 나기 시작했어

조금만 조금만 기다려 볼래

 

너에게 줄 선물이 있어

이런, 목에 깃털이 잔뜩 뽑혀 있네

빨갛게 부푼 곳에 맑은 꿀을 발라 줄게

조금만 조금만 가까이 와 봐

 

바람 없는 날의 나뭇잎은 정말

움직이지 않는 걸까

우리가 함께 서 있을 때에도

조금씩 흔들리고 있는 나의 지친 헝겊들을 네가 알아봐줄까

너의 외투 속을 날아다니는 작은 새

그 새의 둥지를 부수지 않고

너를 꼭 안아 줄 수 있을까

 

선물 상자를 열면 뜨거운 수증기가 올라온다

앵두들이 한 움큼 익어 가고 있을 거야

너의 안경이 하얗게 변할 동안

나는 눈을 세 번 깜빡깜빡하고

그사이 두 번 입맞춤을 할게

 

양들은 색 전구를 켜러 집으로 돌아가고

목에는 아카시아 향기가 남았구나

너에게 할 말이 있다는 걸 아직 잊지 않았다면

매일매일 너에게 선물을 주고 싶어

함께 호호 불어 가며 익은 앵두를 먹자

 

수많은 낮과 밤

피어오른 수증기가 우리의 머리에 폭설로 앉는 동안

나의 눈은 너의 곁에서

깜빡깜빡 입맞춤을 하고 있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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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소리A

_변희수

 

 

바닥에 떨어지면서 컵이 산산조각이 났다

 

배울 점이 있다

빙빙 돌려서 말하려다가 정면으로 부딪힐 때

입술을 열고 반짝이는 게 있다

 

남아서 계속 주의를 요하는 게 있다

컵보다 먼저 손목을, 어리석음을, 날카로움을

긋는다는 것

진심을 다해 무찌른다는 것

 

여기 타이밍을 놓치지 않는 컵이 있다

용기에 대해서 조각조각 설명해보려다 아악!

부들부들 떨고 있는 손이 있다 수상한 움직임이 있다

부정이 있다 긍정이 있다

 

그러니까 말하려는 바가 도대체 무엇입니까,

다그치기도 전에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사라진 컵이 있어서

이 근처는 뾰족하고 위험해 보이지만

 

분명하고 투명하다

다시 깨어나고 있는 것처럼

전과 후가 확연히 다른

 

-변희수, 거기서부터 사랑을 시작하겠습니다』(시인동네, 2020)

 

 

한 서재지인의 글을 읽으며 이 시가 생각났다. 다시 깨어나고 있는 것처럼 전과 후가 확연히 달라졌을 사람의 이야기. 몇 번이나 그 서재를 서성이다가 아무 말도 못하고 나왔다. 내게도 할 말이 있어요. 나도 말하고 싶어요. 나는 끝내 말하지 못하는데 당신은 어떻게 담담히 말할 수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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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_이성복


그날 아버지는 일곱시 기차를 타고 금촌으로 떠났고
여동생은 아홉시에 학교로 갔다 그날 어머니의 낡은
다리는 퉁퉁 부어올랐고 나는 신문사로 가서 하루 종일
노닥거렸다 前方은 무사했고 세상은 완벽했다 없는 것이
없었다 그날 驛前에는 대낮부터 창녀들이 서성거렸고
몇 년 후에 창녀가 될 애들은 집일을 도우거나 어린
동생을 돌보았다 그날 아버지는 未收金 회수 관계로
사장과 다투었고 여동생은 愛人과 함께 음악회에 갔다
그날 퇴근길에 나는 부츠 신은 멋진 여자를 보았고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면 죽일 수도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날 태연한 나무들 위로 날아오르는 것은 다 새가
아니었다 나는 보았다 잔디밭 잡초 뽑는 여인들이 자기
삶까지 솎아내는 것을, 집 허무는 사내들이 자기 하늘까지
무너뜨리는 것을 나는 보았다 새 占 치는 노인과 便桶의
다정함을 그날 몇 건의 교통사고로 몇 사람이
죽었고 그날 市內 술집과 여관은 여전히 붐볐지만
아무도 그날의 신음 소리를 듣지 못했다
모두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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