왈로가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댓글에 남긴 걸 보니 아버지 이야기가 하고 싶어진다.

 어릴 적 아버지는 무서웠다. 목소리도 굵고, 크고, 남매 넷이 나란히 줄을 서서 인사를 하지 않으면 그날 저녁은 다 먹었다.

가끔씩 리더쉽 테스트 겸 상식 테스트가 있었다. 아버지는 주로 국사문제를 내시면 답을 아는 사람이 손을 들어 대답하는 식이었다. 정답이 많은 사람은 상식이 풍부한 사람이고, 손을 많이, 빨리 든 사람은 리더쉽이 있다고 인정되었다. 주로 손을 많이 들어야 했다. 아니면 심하게 실망하시니까...

아버지는 술을 조금 드시면 기분이 좋으시다. 노랫소리가 저 멀리서 들린다. 조금 더 드시면 연설을 하신다. 주로 주제는 "누구를 위하여 종을 울리나"이다. 말씀의 요지는 우리가 무엇을 하든 그것은 우리 자신을 위해 하는 일이지, 부모나 타인을 위해서 하는 일이 아니니 열심히 하라는 것인데, 비슷한 내용을 매번 몇 시간씩 이야기하신 걸 보면 대단하다는 생각도 든다. 심하게 드셔서 인사불성 상태가 되면 "우리가 왜 사냐, 사는 게 뭐냐"하는 이야기를 아무도 안 붙잡고 혼자서 하신다.

언제나 민주주의식으로 가족회의를 하셨다. 그러나 의견을 말하는 데까지만 민주주의고, 결론은 아버지의 것이었다. 집을 새로 지을 때 집짓는 아저씨가 "이 집 주인아저씨는 왕이야, 왕. 아직도 이렇게 사는 사람이 있네"라고 할 정도로 독재가 심하셨다.

술도 자주 드시고, 나한테는 공부도 못하게 하시고 해서 사춘기 때는 아버지께 많이도 대들었다. 대학에 가서 아주 잠시 생활야학에 있었던 적이 있었다. 그때 노동자를 위한 연극 공연이 학교에서 있어서 보러 갔다. 현대노동자들의 삶을 이야기로 꾸민 것이었는데 난 깜짝 놀랐다. 거기 우리 아버지가 서 있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집에 들어와서 큰 소리를 치면서 발 씻을 물을 떠오라고 소리치는 저 아저씨, 술을 마시고 비틀거리며 대문을 여는 저 아저씨...아버지의 삶은 그냥 노동자의 삶이었다. 시골에서 올라와서 배운 것 없이 할 수 있는 것을 근근이 하면서 살아가는 사람...객관적으로 무대에 선 아버지는 약하고, 위로받아야 할 모습이었다. 아버지...

사실, 아버지가 아닌 한 사람으로 보면 우리 아버지는 키도 크고, 잘 생기시고, 노래도 잘 하셨다. 특히나 독립심도 강해서 할아버지집을 나와서 고향 마을에서 처음으로 쌀 한 가마니를 주고 전세를 사셨다. 그리고 무엇보다 아버지의 손엔 늘 책이 있었다. 그것이 족보책이든, 명심보감이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 아버지의 일기장도 볼 수 있었다. 얼마 전에 사촌 동생이 우리 아버지를 "사나이 중의 사나이"라고 표현하는 걸 들었다. 군대 가기 전엔 몰랐는데 군대 가서 우리 아버지 생각이 많이 났었다고. 언니들에게 초록색 동화책을 사 주셨고, 아이들이 이해하기 좀 어려운 것이긴 했지만 영화관도 자주 함께 데리고 다니셨다.

그렇게 강하시던 분이 큰언니가 결혼했을 때 집에 와서 방문을 닫고 우셨다. 나중에 아버지께서 해주신 이야기지만 아버지는 평생 세 번 우셨다고 한다. 큰아버지가 월남 가셨을 때, 할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큰 언니가 시집갈 때...

어쨌든 이렇게 얘기하니 아버지가 멋있는 사람 같다. 사실 아버지는 책임감 있고, 멋진 사람이었는데 그걸 아는 데 정말 오랜 시간이 걸렸다. 아버지와 부딪혔던 시간만 생각하곤 했었다. 그 공연을 보고, 아버지에 대한 생각이 많이 바뀌긴 했지만 내게 아버지는 항상 강한 존재였다. 강해서 내가 아무렇게나 해도 상처받지 않을 거라고 여겼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하니 죄송한 일이 참 많았다. 

요즘은 이런 연습을 자주 한다. 엄마나 어머님을 볼 때 엄마나 어머님이 아닌 그 분들 자체로, 한 인간의 삶으로 좀 멀리서 쳐다보기를 해본다. 어떨 땐 내가 이대로 늙어 그 나이가 되었다고 생각해 보는 것이다. 그러면 조금이나마 마음이 너그러워지고, 그분들께 바라는 것이 없어진다. 한 인간이 나에게 이토록 헌신적으로 무언가를 주기만 한 사람이 어디에 있는가 생각해보면 고개가 수그러진다. 남은 생을 한 인간의 삶으로서 행복한 삶을 사시길 마음으로 빌고, 또 그렇게 하실 수 있게 도와 드리고 싶다.

 


댓글(8)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비로그인 2005-09-29 22: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아버님 이야기 재미있게 들었습니다. 호탕하고 매력적인 분이시네요. 특히 국사문제, 크하하하..이누아님은 괴로우셨을지 모르지만, 듣는 저로서는 무척 흥미로운 광경이네요. 저희 아바이는 늘 술에 젖어 계셔서 지금도 들큰한 술냄새가 풍기는 듯 해요. 한평생 막노동자로 사셨는데 돌아가시고 난 후, 생각해보니 동네 개그맨이셨어요. 항상 유머를 잃지 않으셨고 맘이 따뜻하셨던 점이 장점이라면 술을 너무 많이 드셔서 가족들에게 신뢰를 잃었던 점이 참..안타깝네요.

이누아님 부모님의 건강을 빕니다.

왈로 2005-09-29 22: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생각난다. 그 연극 보고 한참을 얘기했었는데. 아마 심지하고 보고 왔었드랬지?
시간이 지나면 난도 너처럼 얘기할 수 있을까... 아버지에 대해... 애가 둘씩이나 있는데도 아직까지도 이러고 있구나.

로드무비 2005-09-30 11: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너무 재밌게 읽었습니다.
--의견을 말하는 데까지만 민주주의고 결론은 아버지의 것이었다.
이 대목에서 무지 웃었습니다.
부모님도 한 인간으로. 객관적으로 보면 더 이해하기 쉬울 것 같아요.
좋은 글 잘 읽고 갑니다.

복돌이님, 아유, 님의 아버지 얘기도 잘 들었어요.
너무 멋진 분이셨네요.
이문구 소설 주인공 같아요.^^

이누아 2005-09-30 17: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복돌님, 그러니까 복돌님의 개그는 아버님께로부터 온 것이군요. 님의 아버님은 우리 아버지랑 비슷한 느낌을 주는군요.저도 님의 어머님을 위해 기도합니다.

왈로야, 기억하는구나. 너는 안 봤구나. 그때 안*학이가 있어서 너도 함께 본 줄 알았는데...기억력이 점점 쇠퇴하고 있다. 요즘도 반야심경 읽니? 이유도 없이, 무조건 읽기 전에 아버지를 위해 기도해봐. 그냥 아버지가 건강하도록, 아버지가 사람들과 잘 지내도록, 아버지가 즐겁도록, 아버지가 사랑받기를 기원해봐. 이루어지든 말든, 마음이 내키든 안 내키든 그냥 쭉 해보라고 권하고 싶네. 사실, 자식을 위해 기도하는 건 누구나 할 수 있고, 병든 부모를 위해 기도하는 건 절반 정도가 할 수 있고, 건강하지만 나와 부담스러운 관계에 있는 부모를 위해 기도하는 건 잊어버리기 쉽거든. 한번 해봐. 한 석달 열흘만. 이유없이. 접수했나?

로드무비님, 이야기로 하자면 우리 가족들 이야기는 아직 한 꾸러미입니다. 요즘은 괜스레 아버지가 보고 싶고, 아버지 묘에도 다녀오고 싶어져요. 어쨌든 재밌게 읽어주셨다니 좋습니다.

니르바나 2005-10-01 18: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치 살아계신 분처럼 아버님를 그리셨군요. 이누아님
하긴 육신의 끈만 놓으신 것이니 "나 여기있다"고 말씀하시는 아버님 목소리가
마음속에 살아남아 있는 이상 생의 이편 저편의 구분이 쓸모없는 셈이지요.
야반 삼경에 대문 빗장을 만져보라 말씀하신 경봉큰스님의 유언이 생각납니다.

이누아 2005-10-01 18: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니르바나님, 알라딘의 다른 분에게 말씀드린 적이 있는데, 우리 가족은 여섯 명입니다. 이제 네 명이 되었지요. 배우자들도 생기고, 자식 있는 형제도 생겨 그 숫자를 넘기고도 남지만, 각자의 가족이 생겼지만 제 마음 속의 우리 가족은 여전히 여섯 명입니다. 그런 건 변하지 않더라구요.

icaru 2005-10-07 09: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리 아버지 생각도 나네요... 이누아 님의 아버지와 겹치는 실루엣도 있고요... 찡긋...

이누아 2005-10-07 14: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리 시대 아버지들의 모습이 아마도 겹치는 부분이 조금씩은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