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습할 수 없으면 사고고, 수습할 수 있으면 실수라고 해도 될까. 송금 실수를 했다. 개인적인 일이 아니라 업무라 당황스러웠다. 실수한 게 금방 생각났으면 빨리 수습했을 텐데 확인하라는 전화를 받고도 전혀 생각나지 않아 한참 시간이 걸렸다. 전에는 이런 일이 없었는데 요즘은 한 번씩 기억 상자의 비밀번호를 잊어버린 느낌이다. 머리가 하얘진다.
실제로 비밀번호를 자주 잊어버려서 3개월마다 비밀번호를 바꾸라는 경고를 따를 수가 없다. 그러면 아마 3개월마다 한 번 비밀번호 찾기를 해야 할 수도 있다. 이런 일이 줄어들기는커녕 더 자주 일어날 텐데 걱정이다. 나름 메모도 하고, 알람도 한다고 하는데도 메모를 잃어버리고, 알람을 빠트리게 된다. 그 탓에 9월 도서관 수업도 등록하지 못했다. 심지어 수습하는 과정에서 같은 실수를 반복할 뻔했다. 다행히 송금을 누르기 전에 알아차리긴 했다. 내가 전에 한 잘못을 똑같이 하려고 했구나, 하고 다만 주시했으면 좋았을 텐데. . .
이런 일이 있으면 나는 마음이 쉽게 위축된다. 버지니아 울프의 정원을 읽으면서 책 읽는 기쁨을 느꼈다거나 칸딘스키의 책을 읽고 나서 떠오르는 단어는 '내적 필연성'이었다거나 이수명의 시학을 읽고는 시 쓰는 사람만큼 읽어내는 사람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거나... 이런 얘기를 하려고 앉았던 나는 어디 가고, 불과 1시간 만에 쪼그라진 내가 앉아 있다. 금방 쪼그라졌으니 금방 펼질 수 있으려나? 쪼그라졌다 펴졌다 하며 쭈글쭈글해지지 않고 탄력이 생기면 좋겠다. 시가 한 편 떠오른다.
슬기로운 생활
_황주은
소금과 함께 맥반석 달걀 열 개를
가방에 넣어 보냈는데
너는 달걀은 못 받았다 한다
달걀 봉지를 찾느라 온 집안을 뒤진다
물건의 이름을 뒤집어 부른다
키친타월
치킨타월
나의 혼동 때문에
장마가 시작된다
실내가 검은 안경을 쓴 듯 어두워진다
형광등을 사 오라는데
형광펜을 사 왔다
어느 마음에도 불이 들어오지 않는다
천둥이 쳐서 현관문을 열면
누군가 서 있다
어디엔가 흘리고 다녔던 내 얼굴을 달고
‘괜찮아, 이건 흔한 일이야’
내가 나를 위로한다
문이 깨지는 소리로 닫힌다
깨진 것은 깨진 대로,
뒤틀린 것은 뒤틀린 대로
그것을 생활이라 생각하니 발랄해진다
고즈넉하고 너덜너덜한 저녁
눈썹 문신이나 하러 갈까?
은사시나뭇잎이 흰 배를 뒤집고 비에 젖는다
-《포지션》2019년 가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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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턱 너머 저편-에이드리언 리치
악의 꽃(앙리 마티스 에디션)-샤를 보들레르
랭보 시선-랭보
꿈속의 제바스치안-게오르크 트라클
캣콜링-이소호
미남이 사는 나라에서 왔어-이우성
탁, 탁, 탁-이선욱
더 깊이 볼 수 있어 다행이야-전영귀
표면의 시학-이수명
은유의 도서관-김애령
은유-엄경희
점.선.면-바실리 칸딘스키
예술에서의 정신적인 것에 대하여-바실리 칸딘스키
테스트 씨-폴 발레리
버지니아 울프의 정원-캐럴라인 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