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선생님이 좋아요
하이타니 겐지로 지음, 햇살과나무꾼 옮김 / 양철북 / 2002년 7월
평점 :
절판


얼음바람 속에서 윤곽을 잃어버린 네오싸인들이 싸늘한 빛이 발하고 있는 거리. 오리털 잠바를 입어 한껏 부풀어진 그림자는 잰 걸음으로 그 곳을 지나간다. 편의점 앞을 잠시 배회한 그림자는 소년을 만나 몇마디 말을 나누고 소년과 함께 사라진다.
아파트 상가에 자리잡은 그 곳. 문틈으로 새어나오는 쩌렁쩌렁한 목소리에 당황한 표정이 역력하다. 얼마 후 문이 열리고 종전 근엄한 분위기는 공기 속으로 스며든다.
"전화하신 분이시죠?"
"예, 제가 문의 드렸던 OOO입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1년 전 내모습, 이렇게 난 야학 생활을 시작했다.

대학원 진학에 반대하셨던 아버지께서는, 배움이 자만自慢이 되어서는 안된다, 항상 배우지 못 한 자에게 배풀 수 있는 사람이 되라, 고 말씀하셨고 난 그 말씀을 가슴 깊이 간직한 채 야학 문을 두드렸다.
그리고 얼마 전, 야학에선 독서토론회가 열렸고 그 날 선정된 책이 '하이타니겐지로'의 <나는 선생님이 좋아요>이다.

쓰레기 처리장 아이들과 이들을 가르치는 선생님들에게 벌어지는 크고 작은 일들을 보면서 내 눈에 들어왔던 건 사건 그 자체보다는 소소한 행동과 시선이었다. 마치 90분간의 축구 경기에서 공보다는 선수들의 몸짓 그리고 표정을 보는 것처럼. 그들에게 중요한 건 육각형으로 둘러싸여진 둥근 공이라기 보다는 주변 사람과의 어울림, 내적 자아와의 약속 같은 것이리라. 공이 없는 경기장에서도 너무나 태연하게, 묵묵히 자신의 일을 할 것이다. 어차피 공이 할 수 있는 일은 결과를 말해주는 것일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기에.

배움과 가르침. '學' 그리고 '講'.
평가자의 평가가 다시 누군가의 평가를 받듯이, 상대적일 수밖에 없는 두 행위는 언제나 동시에 일어난다. 스스로가 가르침의 능동형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인정하고 싶지 않을 수도 있지만, 결국엔 인정할 수밖에 없는 진리다. 야학에선 이런 의미로 가르치는 쪽에 좀 더 비중이 있는 사람은 講學, 그 반대인 사람은 學講이라 부르고 있다.

대한 민국의 교육이 제자리를 못 찾아 방황하고, 교육계에 불미스런 사건들이 많은 작금의 사회에서, 우린 이런 깨달음을 통해 서두르지도 욕심내지도 말고 한 걸음 한 걸음씩 끝 없는 여정을 시작해야 할 것 같다. 선생님뿐만 아니라 교육계에 종사하시는 모든 분들이 읽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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