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일 밤, 그러니까 추석 전날 밤...
저녁식사를 마치고 간단한 과일(달랑 배)을 깎아 먹으며 오손도손 오랜만에 가족 상봉의 기쁨을 누리고 있었다.
그러던 중... 어디선가 희미하게 들려오는 노랫소리...
'어머니 노래교실'에서 2년 넘게 수학하고 계시는 어머니께서는 바로 그 노랫소리가 生(Live)임을 직감하셨다.


어머니 왈.
"근처에서 노래자랑을 하는 것 같은데?"
이미 오래전에 진화되어 사라진 귀 근육에 다시 힘이 들어가는 듯 어머님은 귀를 살짝 움직이신다.
"그래? 그럼 구경갈까? 여보?"
여전히 여자친구가 없다는 형과 나의 진술(이성 얘기가 나올 땐 아버지께서는 형사, 형과 나는 죄인이 되는 이상한 상황극이 펼쳐진다)에 더이상 얘기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신 아버지께서는 주제와 장소의 변화를 꾀하려 하셨다.
방 안엔 넷이 있었는데 문 밖을 나온 건 셋이였다...
나보다 세살 많은 형은 나보다 세배 많은 고문(^^)에 이미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
"전 그냥 있을께요... 피곤해서..."

들려오는 노랫소리가 점점 더 커지는 방향으로 걷길 10여분...
내 눈에 들어온 건 "추석맞이 정산면민 노래자랑"이라고 크게 걸려 있는 현수막이였다.
그리고 네모난 현수막 테두리에 껌벅이는 전구들...
무대 앞엔 선선해진 가을길 위에 닿을 엉덩이를 배려한 돗자리가 깔려 있었고 눈을 시계방향으로 돌리면 테이블 열댓개가 마치 뷔페처럼 길게 늘어져 있었다.
그리고 그 위에 막걸리, 김치, 돼지고기 등이 미완의 보름달이 발하는 빛을 받으며 저물어가는 가을밤의 분위기를 한층 고조시켜 주었다.
아버지와 어머니께서 구수한 시골 노래가락에 흠뻑 빠져있다고 판단한 난 막걸리는 홀짝이며 짙은 가을밤 속으로 푸욱 빠져 있었다.
(그때 들려온 노래가 "다함께 차차차"였다... 자! 상상해 봅시다... 다함께 차차차가 배경음악으로 흐르고 돼지고기가 흩뿌려진 테이블에 기대 막걸리를 마치 와인처럼 음미하며 마시는 나의 모습을...)
막걸리를 한잔 꺽고 한참 FEEL이 꽂히려는 순간 내 어깨를 두드린 건 아버지였다.
"뭐 할래?"
주어 달아나고, 목적이 빠지고, 상황으로도 전혀 갈피 못잡는 질문을 아버지께서는 가끔 하신다.
"김치 주세요."
"취했냐?"
'요'자와 '취'자가 함께 들릴 정도로 아버지께서는 바로 말씀하셨다.
"너 무슨 노래할꺼냐고?"
아버지께서는 친절하게 생략된 괄호를 메워 주신다.
"벌써 만원 냈으니까 빨리 골라라."

#장면 바뀌고 무대위

-사회자 : 오늘의 마지막 참가잡니다. 대박리에서 오신 김요석씨! 곡목은 가까이 하기엔 너무먼 당신입니다.
(무대 위로 힘차게 올라가 무대 좌측에 앉아 있는 심사위원에게 인사한 후 관중들에게 인사한다. 그리고 부모님을 향해 손을 흔든다. 이광조의 떨리는 입술을 연출하려다 여유롭지 않자 고음 부분에 심혈을 기울이고 결국 삑사리난다.)
-사회자 : 예! 잘 들었습니다. 시간이 없는 관계로 바로 행운상 추첨에 들어가겠습니다. 행운상 당첨자께는 애경에서 후원한 생활용품 선물셋트를 드립니다. (사회자 번호통에서 추첨을 시작한다.)
자... 참가번호 12번, 17번, 51번... 10개의 참가번호가 연속되어 불리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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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번이냐?"
아버지께서 물으셨다.
"아버지께서 접수하셨잖아요? 전 모르는데..."
"내게도 접수번호 같은 건 알려주지 않던데."
아버지께서 무대 쪽으로 달려가시는 모습을 보고 아버지의 행동 우선의 원칙이 생각났다.
"우리 아들도 접수해서 노래 불렀는데 접수증을 안줬어."
"오랜만에 고향 와서 좋게 놀고 가려고 했는데... 이런 식으로 해도 되는 거야!"
"여기 책임자가 누구야!"
접수 번호를 듣기 위해 조성된 차분한 분위기는 웬만한 마이크를 능가하는 목청에서 나오는 아버지의 쩌렁쩌렁한 목소리에 산산조각 난다.


#돌아오는 길

달빛 비추는 시골길을 걷는 세명의 뒷모습이 멀리서 보인다.
-아버지 : 뭐냐?
-요석 : 애경 선물 셋튼데요.
-아버지 : (뿌듯해 하시며) 본전 뽑았네. (세명이 동시에 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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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추석에 이런 재밌는 일이 있었습니다.
옷장 속 긴팔도 잠깐의 휴식을 마치고 활동을 재개하는 계절입니다.
이젠 긴팔의 까실까실한 감촉을 느낄 수 있겠죠.
차분하게 생각하고 많은 사색을 할 수 있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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