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비스트로스의 『슬픈 열대』 읽기 세창명저산책 99
김성도 지음 / 세창출판사(세창미디어)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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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중학교 2학년의 태도(무차별적인 반항심과 무조건적인 비타협성)를 가진 외계 청소년이 우주 어느 행성에서 무심코 주파수를 돌리다가 월드컵 중계 화면을 포착한다면, 그리고 그 외계인이 텔레파시로만 소통한다면, 그들의 시선은 축구라는 이 낯선 의례에서 무엇을 읽어낼 수 있을까. 

이 외계인들은 소리를 감각하지 못한 채, 화면 위를 불규칙적으로 움직이는 스물세 개(각 팀 11명 + 주심 1명)의 존재와 하나의 작은 구(球)체에 주목한다. 누군가는 패스 성공률에, 다른 누군가는 헤딩 횟수에, 또 다른 이는 볼 응시 시간이나 경기 전후 체중 변화에 의미를 부여한다. 수많은 관점과 데이터가 쏟아진다. 그러나 그들이 점차 축구라는 행위의 본질(수단으로써의 공, 구조로써의 규칙, 제한된 역할)을 깨닫는 순간, 이전까지 탐구했던 모든 정량적/정성적 지표는 본질을 포장한 일종의 랩핑(wrapping)이었음을 알게 된다.

레비스트로스는 <슬픈 열대>에서, 현상을 따라 눈에 띄는 이질성과 다양성에 집착하지 않고, 그 깊은 곳에 숨어 있는 구조를 찾는다. 축구가 단순히 골이 골망을 흔드는 개수의 합으로 평가되는 것이 아니라, 정교하게 짜여진 규칙과 상징의 집합인 것처럼, 인류학 역시 표면 아래 숨은 체계와 패턴을 읽어내는 일로 패러다임을 전환한 자가 바로 그, 클로드 레비스트로스이다. 


실존주의 vs 구조주의

지금 진행되는 경기는 실존주의와 구조주의의 대결이다. 실존주의팀의 주장은 사르트르, 구조주의팀은 레비스트로스다. 존재가 본질을 앞선다”는 실존주의의 관점에서, 축구장의 선수는 아무런 미리 정해진 역할 없이, 순간순간의 선택으로 자신을 정의한다. 골키퍼가 갑자기 공격수가 되기로 선택할 수도 있고, 그 순간 그는 진정한 의미에서 자유롭다. 사르트르의 인간은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투사된 존재'로서, 끝없이 자신을 초월하며 의미를 창조한다.

반면 레비스트로스에게 인간은 이미 주어진 구조 속에서 움직이는 존재다. 축구장의 흰 선, 골대의 크기, 오프사이드 규칙은 선수가 태어나기 전부터 존재했고, 선수의 모든 자유로운 움직임은 실은 이 구조가 허용하는 범위 내에서만 가능하다. 인간의 언어, 친족 체계, 신화적 사고는 마치 DNA처럼 우리 의식 이전에 이미 코딩되어 있다. 우리가 선택한다고 믿는 것들조차 '구조의 변주'일 뿐이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이 두 철학자는 서로를 완전히 적대시하지 않는다. 레비스트로스는 <야생의 사고>에서 사르트르를 위대한 철학자라고 인정하면서도, 그의 '역사 중심주의'를 비판한다. 구조주의자인 그에게 역사란 하나의 신화일 뿐이며, 사르트르가 말하는 '진보'나 '프로젝트'는 서구 중심적 착각이다.

사르트르 역시 레비스트로스를 무시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구조주의가 제기하는 문제를 심각하게 받아들이되, 인간의 실천이 구조를 변화시킬 수 있다고 주장한다. 축구장의 규칙도 결국 인간이 만든 것이며, 인간은 언제든 그 규칙을 바꿀 수 있다는 것이다.

두 사상가의 진정한 차이는 시간을 바라보는 관점에 있다. 사르트르에게 시간은 선형적이고 미래 지향적이다. 인간은 과거를 넘어서서 미래를 향해 자신을 투사한다. 반면 레비스트로스에게 시간은 순환적이고 신화적이다. 모든 변화는 결국 변주일 뿐이며, 인간은 영원회귀하는 구조의 패턴을 반복한다.


과학 vs 구조

레비스트로스는 의미와 관계가 과학 이성의 분석이나 인과적 추론만으로 모두 설명될 수 없다는 입장을 견지했다(p.190). 과학 지식, 과학 사상이란 예리한 칼끝에 지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은 사실이라는 숫돌에 의해 쉼 없이 버려지지만, 본질의 상실을 대가로 치르기 때문이다(p.200). 그렇게 예리해져 많은 사실을 절단할수록 과학은 본질로부터 점차 멀어진다(p.201). 


그의 통찰은 현대 문명이 직면한 근본적 딜레마를 날카롭게 포착한다. 과학의 효용성을 부정하진 않지만, 과학이 현상을 정확하게 분석하고 분류할수록, 역설적으로 본질로부터 점차 멀어진다는 구조적 모순을 지적한다. 세상을 분해해 설명하는 것이 어떤 면에서는 정확하고 유용하지만, 전체로서의 본질(의미와 관계성)은 이 과정에서 사라져버린다. 마치 시계를 분해해서 톱니바퀴 하나하나를 완벽히 이해했지만, 정작 시간이 흐른다는 것의 의미는 놓치는 것과 같다.

레비스트로스는 구조적 차원에서의 인식을 제안한다. 과학이 '예리한 칼끝'이라면, 구조적 사고는 '의미의 그물망'이라 할 수 있다. 칼은 정확히 자르지만 연결을 끊어버리고, 그물은 개별 요소들을 놓칠 수 있지만 전체적 관계를 포착한다.

그것은 세상을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 즉 개별 요소들이 아니라 관계와 패턴에 주목하는 사고방식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의미는 사물 자체에 내재한 것이 아니라 사물들 사이의 관계에서 창발한다.



결국 레비스트로스의 <슬픈 열대>를 지르고 말았다. 문학이라고 해도 손색이 없는 이 책에서 난 무엇을 얻을 수 있을까. 시나브로 기울어진 서구 중심주의에 대한 나의 왜곡된 시선이 조금이나마 제자리를 찾는다면, 그것으로도 충분히 가치있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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