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 미술, 사회 - 중세부터 현대까지 여성 미술의 역사
휘트니 채드윅 지음, 김이순 옮김 / 시공사 / 2006년 7월
평점 :
품절


2015.08.30



    그간 공부했던 미술을 짤막한 책으로 펴내려고 준비 중이었다. 콘셉트를 잡는 것부터가 문제여서 처음에는 가방 속에 들어가는 일기 정도로 잡고 필자 나름의 캐릭터를 만들려고 했다. 글에서 힘을 빼기 어려워 나답지 않은 캐릭터로 글을 썼더니, 동생은 평소 같은 글을 쓰는 것이 더 낫겠다고 충고했다. 그건 별로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하지만 그 날 동생이 내게 해줬던 두 번째 충고가 내게는 어려웠다.


    내가 동생에게 보여준 글에는 길을 가다 문득 본 한 여자의 모습이 하루 종일 기억에 남는 것과 미술에 대한 추억을 서로 빗댄 구절이 있었다. 다분히 과하게 꾸며 쓴 부분이긴 했는데, 동생은 그 구절에서 여성의 대상화를 지적했다. 그러면서 한 남자 아이돌이 진행하는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지적됐던 여성과 뮤즈에 대한 누리꾼들의 논쟁을 소개해줬다. 처음에는 ‘그게 문제가 될 만한 거였나?’라는 생각이 앞섰다. 불쾌감도 있었다. 여자가 남자 예술가들의 영감이 되고, 그 아름다움을 예술로 추앙하는 것에는 아무런 오류가 없다는 ‘믿음’ 때문이었다.


    이런 걸 두고 패러다임의 함정이라고 부른다. 나는 부득이하게 나만의 미술책을 펴는 작업을 관뒀다. 길게 잡으면 8년을 공부해온 미술에 대한 모든 생각에게 “잠시 멈춰라.”라고 명령하고, 거대한 회전을 준비해야 했기 때문이다. 굳어 있던 나의 세계관에 일대의 운동이 시작된 건 진화론과 우파니샤드 이후 참으로 오랜만이었다. 휘트니 채드윅의 『여성, 미술, 사회(Women, Art, and Society)』의 서문은 미술에 대한 글을 써왔던, 그리고 공부해왔던 나의 작업을 모두 정지시키고 그 판을 뒤집어야 할 것 같은 막연한 두려움을 줬다. 고민거리가 크게 늘어 기분이 좋진 않다. 하지만 결코 옆으로 밀어놓고 싶지 않은 고민이다. 왜 그런지 이 책의 서문을 빌려가며 적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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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술을 공부하며 여성에게 관심을 가졌던 적이 적었다고는 말할 수 없겠다. 15세기까지 서구의 주요 작품들을 생산해낸 제작방식인 ‘템페라(tempera)’에 관심을 갖게 된 결정적인 이유도 산드로 보티첼리의 <비너스의 탄생> 속 주인공 때문이었고,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에 대한 일화를 읽으며 마녀사냥의 연장선상에서 일어나 비극에 눈살을 찌푸린 적도 있었다. 가장 최근은 미술 블로그를 할 때였는데, 현대미술에 한 획을 그은 100인의 여성 미술가들을 짤막하게나마 모아 이웃 블로거들에게 소개해준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 관심의 시선이 잘못된 것이었다. 솔직히 말해서 그것이 잘못된 것이었다고 이렇게 글로 적기까지 얼마나 많은 마음의 충돌이 있었는지 모른다. 하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적어도 미술사를 공부하는 남성인 나에게 여성은 대상, 혹은 재현물이었다.


    여성과 여성의 작품을 그저 재현물, representations이라고 보는 시각에 우리는 아직도 익숙하다. 그러나 나는 여기서 구차한 변명 하나를 해볼 수 있다. ‘그렇게 적힌 미술사를 공부하는 것이 주류인 환경에서, 그리고 여성을 그렇게 보는 시대 속 작가들의 작품을 보는 입장에서 그 시각을 벗어날 수 있는가?’ 내가 뮤즈에 대한 논쟁을 보고 가장 먼저 든 질문이 이것이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봐야하는가?’를 먼저 묻기 전에 반사적으로 든 궁금증이자, 일종의 변호수단이었던 것이다. 그 정도로 나는 물들어 있었다. (사실 ‘지금까지 공부한 미술사의 모든 것을 수정해야 한다고?’라는 억울함도 있었다.)


    오늘날의 환경도 나를 물들이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여성은 소비와 소유의 대상이다. 인터넷에 나도는 수많은 선정적인 광고들은 자본주의가 여성을 어떻게 ‘이미지화’하고 있는지 여실히 보여준다. 예쁜 여자 운동선수가 나오면 누리꾼들은 순간적으로, 아니 돌발적으로 관심을 갖는다. ‘보여지는’ 여자에 대한 이미지는 아름다움과 성적인 매력, 그로 인한 시각적 즐거움과 거의 자연적인 결합 관계에 있는 것 같다. 내가 모 방송사의 아카데미에 다니며 느꼈던 실망 중 하나는 “그래서 예뻐?”라는 한 작가의 질문이었다. TV에 나오는 여자의 얼굴은 가급적 예뻐야 한다. 그 작가에게 실망했다는 것이 아니라, 그래야 시청률이 조금이라도 더 나오는 TV 프로그램의 특성, 아니 그보다는 그래야 잘 볼 것임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나 자신에게 실망했다고 봐야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여성의 이미지에 대한 지난 역사적 전통, 그리고 그걸 아주 잘 이어가고 있는 오늘날의 이미지 사회 속에서, 그렇다면 그것과 저항하려는 페미니즘 미술의 움직임은 얼마나 고독한가를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 우선 페미니즘 미술이 극복하려고 했던 건 여성과 저속함의 연결고리였다. 이건 사실 더 크게 보면 공예와 고급미술 사이의 위계 관계를 끊어버리려는 노력과도 닿아 있다. 알겠지만 여성은 공예와 더 가깝다고 봤다. 고급미술은 당연히 남자들이 독차지하고 있다시피 했다. 우리는 둘 중 누구를 봤을까? 고급과 거리가 있는 것에 거리감을 두려는 경향에 휩쓸리기 쉬운 우리가 말이다. 고급은 우리의 자존감을 구성하는 요소 중 하나로 오래도록 유전됐다. 여자는 공예품이나 만드는, 고급미술과는 거리가 멀어서 미술사에 굳이 포함시키지 않아도 되는 존재로 취급됐다. 페미니즘은 이걸 거부했다.


    1970년대 들어서 활발하게 진행된 이 이론은 운동의 형태로도 이어졌다. 미술사를 공부하는 사람들은 물론이고 당시 관람자들에게도 상당한 당혹감을 줬던 작품들이 이 시기에 주로 나왔다. 여성의 신체로 누드가 제시됐다. 거리에 옷을 벗고 당당하게 서 있는 여성미술가, 자신의 몸에 온통 피어싱을 한 여성미술가, 투명한 상자 안에 들어가 옷을 벗은 채 관람객들 앞에서 자신의 몸을 전시하는 여성미술가. 여기서 여성의 신체는 대상이 아닌 주체로 거대한 전환을 한다. 이 시대의 누드 작품은 19세기의 남성 미술가들이 그린 여성 모델의 누드와 본질적으로 다르다. 주체를 드러내는 과장되고 폭력적인 방식은 그 공격력을 우리들의 시선에게 행사한다. 여성의 신체를 성적 대상에서 제외시키거나 아예 성적 대상으로 표현하여 우리의 지배적 시선을 두 번 조롱한다. 하지만 이를 모르는 관람자들은 눈살을 찌푸리거나 저 미술가가 돈을 벌려고 환장을 했다며 야유를 보낸다. 오늘날 현대미술의 메카라 불리는 영국에서도 한동안 그런 미술에 ‘쓰레기’라는 제목을 선언조로 붙인 언론들이 여론을 좌지우지했었다.


    미술사라고 해서 다르지 않다. 권력 이데올로기는 남성 위주의 담론을 생산해왔다. 남성은 다시 권력을 생산한다. 이 둘이 거의 뫼비우스의 띠의 형태로 이뤄져 있다. 관습적 이해라는 건 여기서 나온다. 미술사도 여기에 들어 있다. 미술의 모든 것이 남성 위주의 담론으로 이해된 것이다. 그러나 미술사를 쓴 사람이 대놓고 “나는 남성 위주로 썼어요.”라고 말한 적은 없다. 이런 미술사의 본질은 작품과 작가 위주의 연구와 서술이라는 체계적인 학술 방식에 포장되어 있으며, 그 누구도 이를 ‘포장’했다고 말하지 않았다. 정리하자면 미술은 곧 권력이요, 미술사는 권력의 서술이었던 것이다. 지금도 이러한 연구가 주류다. 미술 상식에 많은 부분 개입되어 있기도 하다. 나 역시 그런 걸 배웠니 피해자라면 피해자였고, 그런 글을 썼으니 권력의 생산자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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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페미니즘 미술이 극복해야 하는 문제는 크게 두 가지인 듯하다. 하나는 일상이다. 나의 ‘여인’에 대한 무의식적인 대상화, TV에 나오려면 일단 예뻐야 한다는 한 작가의 말, 예쁜 여자 운동선수에 대한 돌발적 관심. 그밖에 또 얼마나 많이 적을 수 있을까. 여성을 미적 대상으로 보게 하는 수많은 요소들이 여성 스스로를 주체로 내세우는 페미니즘 미술의 규모를 압도하고도 남는다. 채드윅도 인정했다. 페미니즘을 거부하는 여성 미술가들도 많다. 더군다나 미술을 공부한 나의 입장에서 보면 미술의 현실 참여, 혹은 현실 속 패러다임의 전환 등이 이론에서처럼 그렇게 활발하게 진행되지는 않는다는 걸 알기 때문에 “누가 그 주체들을 보려고 하는가?”라는 회의적인 질문이 들 수밖에 없다. 따라서 페미니즘 미술은 지금까지 등장한 모든 (이것도 권력적 표현이지만 편의상 용어를 쓰자면) 미술 사조를 통틀어 가장 현실 참여적이고, 비판적이어야 한다. 권력의 밖에서 그 권력을 부수는 정치적 목소리를 가장 많이 내야 하는 운동, 반드시 운동이어야 한다는 뜻이다. 여기서 미술은 우리가 아는 기존의 ‘예술’이라는 것의 성격에서 탈피한다. 페미니즘 미술은 전적으로 페미니즘 안에서 형성되어 행동으로 옮겨져야 한다.


    그러나 페미니즘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오로지 ‘여성’의 기준으로 보는 어떤 시각이 아니다. 한때는 그러려는 시도도 있었으나, 이는 푸코의 권력 고찰을 통해 그 한계가 지적된 바 있었다. 푸코는 권력이 제도와 담론, 생산되는 지식의 형태에서 비롯된다고 봤다. 즉, 틀에서 나온다는 뜻이다. 따라서 기존의 권력을 부수려는 그 어떠한 것도 가장 근본적인 특성은 반드시 ‘비권력적’이어야 한다. 이를 적용하면 페미니즘 미술은 여성을 위한, 여성만의, 여성에 의한 미술이어서는 안 된다. ‘여성’이라는 단어를 형성한 권력 자체를 해체하면서 남성성과 여성성의 존재를 부인해야 한다. 개념을 만들고, 차이를 세우며, 위계를 형성하는 권력을 해체시키는 것이 페미니즘의 특성이기 때문에 페미니즘 미술은 젠더, 인종, 계급, 성적 경향, 나이 등을 모두 포괄하여 저항해야 한다. 대단히 넓은 미술이며, 거의 180도에 가까운 패러다임의 전환을 유발할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해야 하는 건 다르게 볼 수 있다는 가능성을 인식하는 것이며, 그 가능성의 근거들을 인정하는 것이다. 얼마든지 다르게 역사를 인식할 수 있는 환경은 권력지향적이지 않다. 해체가 중요한 이유가 바로 여기 있다. 하지만 우리는 생각의 공존이 얼마나 어렵고, 권력망과 다른 권력망 사이의 파괴적인 행동이 얼마나 일상적으로 빈번하고 잘 받아들여지고 있는지 쉽게 느낄 수 있는 사회에서 살고 있다. 만약 그것이 인간의 본성이라고 결론이 난다면, 어쩌면 페미니즘은 인간 그 자체와 싸워야하는지도 모른다.


   이 운동이 ‘저항’이라는 단어와 잘 어울리는 까닭이 아마 그것이 아닐까. 해체를 위한 행동 방안으로 우리가 목격해왔던 행동 중 가장 눈에 띈 것도 아무래도 저항이었다. 비권력화를 향한 실천적 행동. 그런데 흥미롭게도 이 ‘비권력화’는, 즉 나를 계속 변두리로 밀어내려는 작업은 권력 속으로 들어가려는 시도이면서도 권력을 부수는 독특한 능력을 갖고 있었다. 여기에는 물론 물리적 저항이 포함될 수밖에 없었다. 페미니즘 미술에서 폭력성을 목격하고 혀를 내두르는 사람들에게, 우리는 ‘우리가 예술을 그렇게 만들었다.’고 당당하게 항변할 수 있다. (사실 실제로 물리적인 폭력이 아니더라도 여성 육체의 아름다움에 길들여진 이들에게 그렇지 않은 육체를 부각시킨 작품은 시각적 폭력으로 얼마든지 다가올 수 있다. 이 폭력이 주는 충격은 아마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불쾌한 진실일 것이다. 예술은 인간이 그것과 대면하도록 하는 수밖에 없다.) 그들 중 대부분이 받아들이진 못할지라도 그것이 진실임인데 어쩌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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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편으로는 기존의 미술사를 공부해둔 것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 책을 읽진 않았다. 페미니즘에 대해서 깊이 있게 아는 것도 아니다. 단지 서문만 읽었을 뿐이다. 그러나 이것만은 분명하다. 책이 무엇을 말하고 싶은지, 내가 무엇을 알아야 하고 미술의 역사와 미술가와 미술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더 나아가 여성을 비롯한 ‘타자성’ 짙은 오늘날의 ‘주체’들에게 어떤 시각을 가져야하는지 많은 배움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진화론은 인간은 하나의 종(種)에 지나지 않는다는 관념을 줬다. 자연에 대한 경이를 키웠고, 그 경이에서 느낄 수 있는 신성성에 대한 공감도 기를 수 있었다. 자연 다큐멘터리를 볼 때마다 드는 감정이 예전과 많이 달라졌음을 그때마다 느낀다. 우주에 대한 관심도 더욱 많아졌다. 그와 관련된 위키피디아를 검색하는 것이 즐거운 소일거리 중 하나다. 우파니샤드는 ‘동시성’에 대한 관념을 줬다. 나는 하나의 대상이 여기와 저기 동시에 존재한다는 생각을 받아들인다. ‘이것은 이것이고, 저것은 저것이다.’라고 나눠 생각하지 않는다. 어쩌면 대학 때 배운 장자의 사상도 이에 감응하도록 했을지 모르겠다. 글로 풀면 난잡해지는 생각이라 서술하지는 못하겠지만 이는 분명한 사상적 경험으로 남아 있다. 여기에 또 하나의 새로운 전환이 내게 찾아온 듯하다.


    언젠가 동생이 내게 “오빠는 어디 가서 ‘나는 페미니스트다.’라고 당당히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어.”라고 말한 적이 있다. 그 의미를 이해하진 못한다. 겨우 몇 주 고민해놓고 아는 것처럼 말하면 그 말은 범죄이고, 그 글은 범죄의 증거가 되지 않는가. 부단히 생각하고 고민하면 이것이 언젠가는 나의 시선을 진정으로 회전시킨, 내 삶을 전환시킨 또 한 번의 기회였노라고 회상할 수 있는 때가 올 것이다. 예전에는 다른 사람들에게 미술의 다양한 일화를 소개시켜줄 수 있을 것 같아서 미술을 공부한 보람을 느끼곤 했는데, 지금은 다르다. 미술이 다른 시선으로 가는 통로가 되어 매우 복잡한 감정이 밀려온다. 공감할 수 없을 것 같고, 난해하며, 불쾌하다. 하지만 나는 그런 시선 속에 진리가 있다는 현인들의 말을 굳게 믿고 있다. 이제 막 쓴약을 들이킨 아이가 된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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