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잉 연결 시대 - 일상이 된 인터넷, 그 이면에선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
윌리엄 H. 데이비도우 지음, 김동규 옮김 / 수이북스 / 2011년 10월
평점 :
절판


2012.01.20

 

 

 

  MBC의 한 다큐멘터리에 출연한 안철수氏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이러다간 모두 공멸할 것 같아요.” 이 시대의 대중들이 사회적 병폐들을 충분히 겪고 있으면서도 묵인하고 있다고 비판한 것이다. 방관하는 우리의 자세가 비판받아 마땅한 것임은 알겠으나, ‘공멸(共滅)’이라는 말은 무슨 뜻을 갖고 있을까? 국립국어원의 표준국어대사전을 검색해보니 ‘공멸’은 “함께 사라지거나 멸망함.”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자주 사용하지 않는 단어이고, 발행한 지 조금 오래된 사전들에는 없는 단어이기도 하다. 함께 사라지거나 멸망한다. 무엇 때문에 “함께”라는 부사어가 굳이 첨가되었을까? <이반 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를 보면 슈호프는 죄수 알료쉬카와의 대화에서 죄 없는 자신이 왜 이곳에 끌려 왔는지 모르겠다며 한탄하는 장면이 있다.


  예컨대, 그런 것일까? 나는 아직 사회에 나서지 않은 학생이고, 죄를 지은 적은 없다. 의무교육도 성실히 받았고, 군복무도 열심히 이행했다. 이 사회에 내가 해를 끼친 것은 없으리라 짐작된다. 그런데 나는 어떤 이유 때문에 이 사회의 추락과 함께 ‘공멸’해야 하는 위기에 처해 있다. 하지만 솔직한 생각으로 나는 무엇이 공멸의 위기를 야기하는 것인지 알 수 없다. 책으로만 봐온 세상이다. 대기업들의 횡포, 정부의 무능력, 폭력에 둔감한 사회 등의 문제는 논설이나 칼럼에서만 읽어왔다. 이 좁은 시야를 가진 일개의 학생이 무슨 이유 때문에 “함께 멸망하는” 시나리오의 한복판에 서 있어야 하는 것일까?


  새삼스러운 질문이다. 우리는 온갖 링크(link)들로 이어진 그물 사회에서 살아감을 충분히 알고 있다. 유럽의 위기가 9시간이나 시차가 나는 이곳에서도 문제를 야기한다. 어떤 원리로 그런 비극이 벌어지는지 정확한 메커니즘은 학자가 아니라면 알기 힘들다. 대략적인 이해는 이것이다. 우리는 ‘연결’되어 있다. 윌리엄 데이비도우의 <과잉연결시대(Overconnected)>는 이 시대의 ‘연결’에 관한 충격적인 사례와 저자의 예리한 시각을 담은 책이다. 인터넷 선을 잠시 뽑아놓거나 무선연결을 해제하면 우리가 사용하는 컴퓨터는 더 이상 세상과 소통하는 창이 될 수 없다. 순간 우리는 어딘가에 갇힌, 혹은 누군가로부터 동떨어진 느낌을 받는다. 우리는 어떻게 해서라도 다시 인터넷에 접속하고자 할 것이다. 이것은 오프라인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온라인은 놀라운 속도와 ‘연결력’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연결욕구를 가속화시킨다. 빛의 속도로 대화를 주고받는 시대이다. 같은 뜻으로 위기 역시 빛의 속도로 다가오게 된다. 세계가 동시다발적인 공황상태에 빠지는 시나리오는 더 이상 하찮은 음모론이나 비관론이 아니다. 윌리엄은 그런 위기들을 짚어가며 우리에게 섬뜩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사진출처] crowdfundingbank.com

 

 

 

  제레미 리프킨의 <엔트로피>를 읽은 이라면 <과잉연결시대> 역시 비슷한 부류의 서적이라는 것을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다. 다양한 사례를 통해 문제를 제기하기에 앞서 과학 분야의 이론을 사회에 적용하고, 그것으로 사회를 해석한 뒤, 문제해결을 위한 몇 가지 방안을 내놓는 형식으로 이뤄져 있기 때문이다. 탄탄한 형식의 책이기 때문에 독자들은 상당한 기대를 하게 되고, 다소 어렵더라도 각종 사례들을 통찰하는 저자의 혜안에 혀를 내두르게 된다. <과잉연결시대>에는 주로 금융권의 다양한 이야기들이 등장한다. 경제에 대해 아는 것이 별로 없는 나에게는 결코 쉽지 않은 예시들이었지만 얼마간 언론보도를 통해 들어본 것들이라 익숙해지는 것은 어렵지 않다. 하지만 용두사미(龍頭蛇尾)라 하던가. 일주일 정도 이 책을 붙잡고 조금씩 쪼개어 읽은 뒤, 오늘에서야 결론을 읽었다. 그가 여러 단락과 장(章)을 통해 설명한 사건들의 중대함에 기대어 생각했을 때, 과연 이 책의 꼬리는 얼마나 매력적으로 독자들에게 다가갈 수 있는가, 먼저 의심을 하게 되었다.


  이 책을 읽기 전에 알아야 하는 용어들은 책의 첫머리에 나온다. 물리학 이론에서 따와 그가 만든 용어인 overconnected와 positive feedback은 일단 이해하면 전혀 생소한 개념이 아니다. 피드백이란 A가 B에게 영향을, B가 C에게 영향을 줬을 때, C가 다시 A에게 영향을 주는 아주 간단한 형태의 영향관계이다. 이 관계들이 너무 많기 때문에 우리가 헤아릴 수 없는 상황에 이른 것을 overconnected라고 한다. 요컨대, 우리 사회가 그렇다는 것이다. 모두가 알고 있듯이 현대사회는 정체되지 않고, 예측불허의 상황으로 빠르게 변화한다. 그리하여 우리는 SNS을 통해 실시간으로 사건들을 알게 되고, 복잡한 교통시스템을 이용한다. 하지만 우리 자신은 빠르게 변화하는 세상에 몸을 얹혀 놓는 것을 두려워하는 경향이 있다. 그 경향이 드러나는 때는 안타깝게도 우리가 ‘사고(accident)’를 당했을 때이다. 2008년 세계는 극단적 사고를 겪은 바 있다. 그것은 무서울 정도의 공격적 투자, 미래를 내다보지 않는 안이함, 규제구조의 문제, 그리고 도덕적 해이가 낳은 총체적인 비극이었다.


  윌리엄은 이 책에서 잠시 ‘사고전염(thought contagion)’이라는 또 다른 개념을 소개한다. 우리가 사고의 주체가 아닌 객체가 되어 이리저리 휘둘리거나 병에 걸린다는 뜻이다. 자기실현적 예언은 <믿음의 엔진>과 같은 인간의 정신을 분석한 책에서도 소개하고 있는 인간의 고질적 한계이다. 사고전염은 경제에서도 일어난다. ‘버블(bubble)’, ‘토네이도(tornado)’와 같은 단어는 자주 들어본 것이리라. 사고전염은 소통의 욕구에서 시작된다고 본다. 여기에는 기대도 포함된다. 잘 모르는 것에 대해 평가가 좋으면 투자자들은 당연히 그곳에 투자를 하고자 한다.


  아이슬란드도 그러했다. 어업에 전념하던 가난한 이 섬나라가 금융업으로 전환한 뒤 2008년 10월에 겪은 국내 3대 은행 글리트니르, 란드스방키, 카우프싱의 잇따른 파산은 영국, 네덜란드에게는 직격탄을 날렸고, 전 세계 금융증시의 불황을 가져왔다. 기대가 전염되고 투자가 몰리면 거품이 생긴다. 은행은 그 버블로 재투자를 하면서 더 큰 버블을 만든다. 그런데 정작 투자로 운영되는 돈이 부풀어지는 중에 그들이 가지고 있는 자산이 줄어들고, 다시금 사고전염이 발생해 거품이 갑자기 사라지면 투자자들은 은행의 실체를 알게 되고 돈을 급히 뺀다. 은행은 망한다. 부채가 생기고, 그곳에 투자했던 이들은 인터넷뱅킹은 물론이고, 은행본사의 입구가 봉쇄된 것을 목격한다. 땅을 치고 통곡하는 건 이미 늦은 일이다. 이렇게 아이슬란드 국민들은 세 은행 탓에 영국과 네덜란드에게 막대한 빚을 물어야 한다. 화가 날 수밖에 없었고, 그들은 2009년 1월 26일 연정붕괴라는 사태를 초래했다.


  최근 그리스 사태도 마찬가지이다. 비우량주택담보대출 사태, 이른바 ‘서브프라임 모기지’사태도 마찬가지였다. 거품은 overconnected를 만든다. 그것이 사라지면 막대한 손해가 온다. 놀라우리만치 단순한 구조이지만 이를 피해갈 수 있는 혜안을 지닌 투자자는 많지 않다. S&P와 무디스와 같은 굴지의 신용평가사들마저도 2008년 사태에 앞서 위험부담이 매우 높은 채권들에 트리플에이의 평가를 매겨 투자자들의 쏠림을 부추겼다. 이런 쏠림현상을 보고 있노라면 나는 히에로니무스 보스의 <건초수레 제단화>를 떠올리게 되는 것이다. 악마들이 이끄는 수레 위에서 방탕한 자들이 놀음을 일삼고 있고, 수레 근처의 사람들은 자기네들도 태워달라며 손을 하늘로 뻗은 채 욕구를 드러낸다. 저들이 어디로 가는지는 수레 위의 천사만이 알고 있다. 종교적 지옥을 ‘사회적 지옥’으로 바꿔 생각한다면 그 천사는 진리, 혹은 진실을 우러러보며 “저들은 자신들이 무엇을 하는지 모르나이다.”라는 기도를 하는 중인지도 모르겠다.


  버블이 하나의 문제였다면 overconnected는 정보들이 연계되는 것, 윌리엄이 말한 정보연계가치(values by association)을 통해 사생활 침해문제를 유발하기도 한다. Cyworld, Daum, Naver 등 굵직한 사이트들은 물론이고, 각종 온라인게임에 사용된 개인정보들이 하루 만에 유출된 사건들에 대해 우리는 이상하리만치 미온적 반응을 보이고 있다. 그러다가 집주소로, 전혀 모르는 기업의 홍보물이 자신의 이름으로 도착한다면 그제야 화들짝 놀라곤 하는 것이다. 물론 기업들은 정보를 전문적으로 수집하는 기업, 예컨대 윌리엄이 미국의 대표적인 기업이라 소개한 초이스포인트(ChoicePoint)와 같은 기업에 돈을 주고 고객의 정보를 구매한다. 그 기업들은 회사를 홍보하거나 고객의 취향을 분석하고 판매계획을 세우는 것에만 그 정보들을 활용하게 되어 있다. 하지만 기업들이 정보를 취급하는 안전성에 있어서는 일괄적이지 못하다. 윌리엄은 개인정보에 접근할 수 있는 권한을 개인에게 주는 ‘비밀번호 제도’를 제안하지만 피해복구방안이 마땅히 존재하지 않다는 것도 더불어 언급한다. 요컨대 그것은 윌리엄이 결론에서 언급한 ‘외부효과(externality)’를 제 3자가 부담해야 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이라는 뜻이다.


  앞서 말한 사고전염에 대해 우리가 우려해야 하는 것 중의 하나는 최근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는 극우세력들의 온라인 활동이다. 페이스북은 신(neo) 나치주의자들의 접근을 차단하는 정책을 펼친 바 있다. 소위 ‘hate group’들의 사고전염은 위험하다. 수면 위로 떠오르지 않았던 증오심이 부추겨지면 다양한 경우들이 생겨나 각종 민족주의의 부활을 야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아니, “야기된 현실”이 지금의 모습이다. 특정 연예인에 대한 조그마한 안티-카페들은 그나마 사소한 경우이겠지만 인터넷은 사람의 의견을 극단적으로 몰고 가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악플도 전염된다.”는 학자들의 진단은 사실이며, 어느 것 하나 가볍게 볼 수 없다.


  윌리엄은 통제를 주장하는 사람으로 따지자면 보수주의자에 해당한다. 하지만 그가 결론에 그의 보수성을 드러낸 이유는 “미친 철마(鐵馬)와 같은” overconnected의 실상을 제어해보기 위한 현실적인 의지 때문이라고 보는 것이 적절하다. 아담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도 통제와 자율시장의 공존을 통해 국부(國富)가 증대된다는 개념인데, 오늘날의 정부통제는 필요악인 경우가 많다는 견해가 있다. 하지만 기업들에게 상호연결성이 강한 현대사회는 곧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며, 문제는 그들이 그 땅을 정복하기 위해 비도덕적인 수단들을 카드로 꺼낸다는 것에 있다. 그럼에도 우리는 엄청난 혜택을 누린다고 여기고, 실제 그러하며, 따라서 대안을 생각할 만큼의 의지를 발휘할 수 없는 “길들여진 상태”이다. “위험은 곧 기회비용이 아닌가? 세상에 공짜는 없다.”라는 식의 진화론적 인식이 지배적인 시대라는 뜻이다. 그러나 그것이 과연 우리의 상황에 도움이 될 수 있을까?


  결국 윌리엄은 원론으로 돌아가 점검과 예방이 필수라는 교과서적인 이야기를 결론으로 담는다. 이런 것들이다. 투자자들의 공격적인 거래를 규제하기 위해 positive feedback의 수위를 낮추는 방안을 검토해야 한다. 유류세를 예로 들건대 과세제도를 점검해야 하며, 경제학자 토빈이 제안한 금융시장 세율 1%도 좋은 사례일 수 있다. 프라이싱(가격책정) 장치를 점검해 버블을 조장하는 positive feedback을 조기에 차단해야 한다. 외부효과에 대한 프라이싱도 중요한데, 탄소배출권의 경우 시장가격에 맡기는 방안이 정부의 규제보다 나을 수도 있다. 제 3세계의 무역성장속도를 낮추기 위해 그들 기업들에게 선진국 기업들의 규제를 적용해야 한다.


  예방을 제시하는 자리에서 윌리엄의 태도는 더욱 막연해진다. 사례를 들고, 문제점을 언급한 뒤 “이렇게 했더라면”의 식으로 맺는 단락들이 여럿 있다. 요컨대 그가 하고자 하는 말은 ‘방어운전’하라는 것이다. 제레미 리프킨이 <엔트로피>를 통해 “엔트로피를 줄이자.”라고 한 주장과 거의 다르지 않다. 그런데 용두사미의 책이라고 해서 우리가 그의 주장을 ‘식어버린 라면물’처럼 대하는 것은 바람직한 태도가 아니다. 윌리엄은 미래사회의 모습을 예상하며 우리가 주체적으로 overconnected에 적응할 것이냐, 아니면 객체적으로 적응할 것이냐, 그것도 아니라면 도태될 것이냐를 놓고 무거운 저울질을 한다. 그의 관점에 따르자면 다소 비관적이긴 하나 주체적 적응을 위해서는 이 세계의 속도를 줄이는 수밖에 없다.


  늘 그렇듯 문제는 우리의 인식이 공유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과잉연결시대>가 이미 빠르게 달리는 소위 ‘문명권’ 독자들에게는 매력적인 주장처럼 들릴 수도 있다. 우리는 인구가 과잉밀집된 대도시에서 벗어나 전원(田園)의 삶을 추구하고자 하고, 그런 탓에 미술에 있어서도 유난히 인상주의 거장들과 러시아 이동파 화가들의 작품들을 좋아한다. 돈을 벌어 귀농하는 젊은 청년들의 꿈을 담은 다큐멘터리들도 여럿 제작된 바 있다. 하지만 개발도상국과 제 3세계의 독자들에게 윌리엄의 말은 소위 “태평양의 원주민이 본 <최후의 만찬>”과 같지 않을까? 이 세계의 문제를 야기하고, 속도를 주도하는 이들이 조금 더 넓은 시선으로 윌리엄이 말한 상기 문제들을 바라본다면 마땅히 수치심을 느껴야 할 것이다. 하지만 나는 세계의 미래를 비관적으로 보는 관점에 더욱 무게를 주려고 한다. 우리가 자본주의와 신자유주의 체제에 대해 극도의 배신감을 느끼고 있는 것처럼.


  <과잉연결시대>를 덮고 창밖을 내다본다. 잔뜩 눈이 내릴 것처럼 웅크린 흐린 하늘이 고요하기 이를 데 없다. 하지만 이 세계는 분명 내달리고 있다. 상반된 속도 탓에 현기증이 난다. 내달리지 않으면 살 수 없는 사회를 일갈하려는 윌리엄의 진단이 과연 어디까지 뻗어나갈 수 있을까? 책을 읽고, 문제가 무엇인지 알 것 같고, 그러나 해결책을 실천할 수 있을지의 여부는 모르는, 자기만족에 지나지 않는 독서가 아니었는지 되돌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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