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명내의 충돌 현대의 지성 127
디테 젱하스 지음, 이은정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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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1.08

[깊게 읽기] 문명 내의 충돌 (1~4편)에 이어지는 글입니다.

 

 

  어제 시리아에서는 또 한 번의 차량폭탄테러사건으로 인해 70여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미국 <뉴욕타임스(이하 NYT)>紙 홈페이지의 1면에는 거의 매일 아랍의 정치격변과 테러, 이라크, 이란, 파키스탄 등에서의 미군 피해, 미군 철수 등이 헤드라인으로 올라온다. 근 몇 주 동안 위와 같은 뉴스들을 제치고 1면을 장식한 사건은, 내 기억으로는 김정일 위원장 사망과 김정은의 집권 외에는 없었다. 미국이 아랍에 얼마나 깊게 개입되어 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안타깝게도 근래 들어 NYT가 보도하는 거의 모든 아랍 관련 국제사건들은 비극이다. 각 기사들에는 익명을 요구한 인터뷰이들의 부정적인 의견도 빠지지 않는다. 작년은 2001년 참사의 10주년 되는 해였다. 나아진 것은 없는 듯하다.


  작년 여름학기에 나는 요한 갈퉁의 평화이론을 바탕으로 하는 강의 하나를 들었다. 강의를 통해 나는 간디의 비폭력 평화운동을 근간으로 하는 창조적인 대응책들을 배우게 되었다. 납득은 되었다. 하지만 행동으로 이어가는 방향에 대해서는 함구할 수밖에 없었다. 생산적인 내용은 기대할 수 없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그 강의의 레포트 주제로 나는 체첸의 내전을 선택했다. 그와 관련된 이론을 알아보기 위해 집어든 책이 바로 젱하스의 <문명 내의 충돌>이다. 그가 왜 이 책을 쓸 수밖에 없었는지는 충분히 이해하게 되었다. 반년만에 다시 읽어 나의 이해는 더욱 넓어졌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마음 어딘가가 씁쓸하면서도 한없이 공허했다. 이 책은 10년도 더 전에 발행된 책이다. 평화주의자인 젱하스는 2001년 9.11 테러가 일어났을 때 큰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그의 제안은 거의 실천되지 않았다. 그로부터 다시 10년 뒤의 내가 이 책을 읽었을 때, 한 달에 걸친 깊은 독서를 마치고 리뷰를 쓰려던 지금, 나는 어제 시리아에서 일어난 폭탄테러를 망연자실하게 상기하게 되었다. 일개의 어린 독자가 세계의 문제를 다룬 책을 통해 그 한복판에 뛰어들 수는 없는 노릇이다. 장벽이 느껴진다. 공허해진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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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명 내의 충돌>은, 지난 네 편의 심층독서에서 파헤친 것과 같이 ‘간문화적 철학’을 위한 태도를 소개하는 장이다. 기존의 위대한 철학자들이 그들의 사고를 넓혀갔다면 현대의 철학자들은 사고의 경계에 서서 이론이 아닌 행동과 사건의 앞에 대면해야 한다. ‘간문화(間文化)’라는 문자만 보면 그것은 별로 대단치 않아 보인다. 하지만 적어도 두 문화의 깊은 역사와 현재의 모습, 체제, 특수성을 모두 고려해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방대한 정보량과 학문 간 토론, 심층이해, 현장방문 등을 필요로 한다. 석학들도 그것을 매우 어려워한다. 젱하스가 말한 “무의미한 학술대회”는 지금도 개최되고 있을 것이다. 이 철학은 “나는 누구인가?”와 같은 추상적인 문제를 논하는 것이 아니다. 이해의 길을 여는 학문이며, 따라서 행동과 직결된다. 이 철학은 제도가 될 수 있다. 젱하스는 이 철학을 하기 위한 기본적인 이해가 어떤 것이어야 하는지를 자신의 저서를 통해 간곡하게 소개한다.


  매일 뉴스를 통해서 우리도 접한다. 세계는 갈등의 전쟁터이다. 사소한 것에서부터 시작해 연일 언론이 보도해야 할 정도로 중요한 국제적 문제에 이르기까지, 적어도 우리는 우리가 바라는 평화보다는 갈등을 더 직접적으로 체감한다. 살인, 방화, 성폭력, 테러, 비리 등의 보도가 빠지는 날이 없고, 이것들에 우리는 거의 신체적으로 반응하기도 한다. 혀를 차고, 고개를 좌우로 젓고, 입술을 삐죽 내밀거나, 아니면 한숨을 쉰다. 이렇게 우리를 치떨게 만드는 사건들은 우리가 갈등이 강화될 수밖에 없는 다원적 사회를 살아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우리가 바라는 바는 일치된다. 갈등을 중재해줄 수 있는 사회적 역량의 정착이나, 소통의 중재자 역할을 할 수 있는 능력 있는 지도자의 등장이다. 법은 사소한 모든 것을 다룰 수 없다는 한계가 있다. 그것이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곳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을 목도한 우리는 법을 탓한다. 그러나 그건 법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갖게 되는 한풀이에 지나지 않는다. 법보다 더 중요한 것은 중재하고자 하는 열망이며, 사회적 합의이다. 우리나라는 그런 힘도, 그럴 수 있는 지도자도 부재한 상태이다. 따라서 우리는 젱하스의 이 말에 동의할 수 있고, 동의해야 한다.
  “갈등을 통해 점점 강화되는 다원성을 위한 적절한 표현방식과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는 것 외에는 대안이 없다.


  그렇다면 서로 갈등을 일으키는 여러 집단 사이에는 기본적으로 ‘다원성’이라는 개념을 이해하는 태도가 있어야 한다. 안타깝게도 유일신 종교들은 이 태도에 대해 소극적이며, 다원성을 기초로 하는 종교인 불교와 힌두교에서도 문제를 발견할 수 있다. 이해를 방해하는 요인들은 많다. 종교적 특성을 누구나 먼저 꼽겠으나, 현대사회에 들어 그것의 영향력은 감소(종교최소주의 사회)해 있으니, 다른 요인을 하나 더 들자면 그것은 바로 권력의 문제이다. 한 가지 예로, 내가 강의과제로 제출하기 위해 조사했던 체첸의 내전에서 이 권력의 문제를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었다. 상황이 유독 복잡한 지역이므로 자세한 설명은 하지 않겠으나, 체첸의 대(對)러시아 항쟁의 근간(根幹)에는 상황에 알맞게 사용할 수 있는 종교(이슬람)가 있다. 권력이 종교를 손에 쥐고 있을 때, 그 밑의 사람들은 다원성을 이해하지 못할 가능성이 다른 지역보다 월등히 높다. 여기에 민족주의와 낙후된 경제상황이 더해지면 상황은 극으로까지 치닫게 된다. 이것은 우리의 일반적 이해와도 크게 다르지 않다.


  다원성의 개념은 유럽이 백 년은 넘는 오랜 시간동안 온갖 시행착오와 피, 고통, 부정적인 역사를 감수해가며 얻게 된 근대화의 결론으로, 그것은 곧 ‘민주(民主)’라는 개념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이것을 ‘서구화’라고 칭했을 때, 동아시아는 서구화를 가장 성공적으로 이룩한 곳으로 손꼽힌다. 젱하스는 이 성공의 배경에는 바로 경제적 발전이 있었다고 주장했다. 정치적으로 성장한 국민이 경제적인 혜택을 보장받지 못한다거나, 혹은 경제적으로 성장한 국민이 정치적 참여를 보장받지 못한다면 동구권의 실존사회주의, 이슬람 세계, 다원적 인도 사회 등에서 발생했던 문제를 결코 피할 수 없다. 이것은 역사가 증명한 사실이다. 이 모든 실패의 사례들은 다원성을 어떻게든 막아보려고 했던 ‘대항 프로젝트’의 토양에서 자라난 쓰디쓴 열매였다. 젱하스는 ‘아시아적 가치’도 그 프로젝트 중 하나였다고 분명하게 분류한다. 하지만 동아시아의 역사는 보수적 가치를 버리고 과감한 혁신을 통해 수준급의 민주화를 이룩하는데 성공했다. 우리나라와 대만, 그리고 싱가포르가 유럽보다도 놀라운 정도의 역사를 쓴 것은 그도 인정한다.


  문제는 여전히 문화 간 대화가 시도될 여지가 없는 사례들이다. 우리는 그것이 어떤 사례들인지 충분히 알고 있다. 하지만 그 사례를 바라보는 눈은 거의 일괄적으로 서구의 것인데, 젱하스는 이것에 문제가 있다고 주장한다. 서구 사람들은 (헌팅턴의 용어를 쓰자면) ‘문화 간 충돌’을 바라보기에 앞서 이미 서구의 우월을 가정한다. 이에 젱하스는 이렇게 말한다. “유럽의 발전 경로가 근대화주의자들의 지속적인 승리였고, 전통주의자들은 항상 전망이 없이 후퇴하는 싸움만 했다는 가정은 잘못된 것이다.” 그 근거로 제 2차 세계대전 후 보통선거권을 가진 나라는 겨우 3개국이었고, 여성선거권은 20세기에 소극적으로 부여되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든다. 오늘날 서구가 자랑하는 그들의 근대화가 마치 오래전부터 항구적으로 누려온 것이라는 환상은 태어날 때부터 이미 근대화의 산물을 영양분 삼을 수 있었던 후손의 자만이라는 것이다.


  이런 사고를 물리고 그들의 역사를 되돌아본 다음, 타문화를 대할 때, 적어도 이슬람을 대할 때에 그들(과 우리)이 가져야 하는 태도는 “실제 모습에 주목하는 것”이다. 매우 새삼스러운 말처럼도 들린다. “시리아에서 폭탄테러가 발생한 것이 실제 모습이 아니라는 것인가?”라고 주장하고픈 이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젱하스는 단호하게 말한다. 근본주의에 대한 유사한 비판이 계속되는 세태는 비생산적이라고. 이슬람의 민주적 대표자들과 열린 대화가 필요하다고. 공산주의 붕괴 이후 ‘적’의 이미지가 이슬람에게 전가되었다는 항간의 ‘괴담’은 정치적 목적에 따라 만들어진 것일 뿐이라고. 관심의 편향이 ‘서구 대 이슬람’의, 마치 십자군 전쟁 이전부터 시작된 것처럼 가공된 기나긴 피의 역사에 대해 숱한 환상을 만들어냈다. 사실 이와 같은 편견은 두 세력 사이에 공존의 역사가 있었던 장에 직접 들어가 본다면 억측에 지나지 않다는 것이 금방 들통 나고 말 것이다. 가령, 영화 <킹덤 오브 헤븐>에서처럼 성지 예루살렘에서 공존하는 각 종교 세력과 교파들의 암묵적 합의가 오늘날이라고 해서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불가능하게 만드는 것이 과연 두 세력의 역사 때문일까? 아니면 단순한 편견 때문일까?


  자만과 편견을 물리고, 눈을 돌릴 수 있게 된다면 젱하스는 이런 것들을 바라보라고 조언한다. 먼저, ‘서구 대 이슬람’ 이외의 문제 중 가장, 아니 ‘서구 대 이슬람’보다 훨씬 심각하다고 그가 진단한 인도 내부의 문제이다. 인도의 이슬람교, 불교, 힌두교는 여러 종족, 종교와 정치적 갈등을 일으키며 거의 모든 갈등의 근본을 양산하고 있다. 파키스탄과의 대외적 문제뿐만 아니라, 인도 내부의 문제도 시한폭탄과 같다. 이를 통해 젱하스는 ‘문화 내부’의 문제 역시 간과하면 안 된다고 본다. 이는 미국도, 아랍도 마찬가지이다. 두 세력을 상징하는 두 종교는 비폭력을 원칙으로 하지 않기에 폭력에 대해 상대적으로 관대할 수 있다(이와 관련해서는 <위도 10도>의 선교 내용과 이슬람의 ‘지하드’를 참조하거나, 르네 지라르의 저서들을 읽어보면 좋다.)고 하지만 비폭력을 원칙으로 하는 힌두교와 불교 사이의 갈등(스리랑카)은 얼핏 이해할 수 없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막상 내부의 문제는 부패한 엘리트들의 권력쟁탈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갈등은 종교의 여부를 떠나 어디에서든 존재할 수 있다. 갈등을 양산할 수 있는 조건만 충족되면 된다.


  이러한 갈등은 동아시아에서는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있더라도 그 사례들은 주요 사건이 일어나는 지역보다 현저히 적고, 사회적 위력도 작다. 우리나라를 비롯해 동아시아의 국가들이 비교적 평화로운 상황(막상 들여다보면 젱하스의 설명처럼 평화롭지만은 않다. 우리나라의 분단 상황도 그러하고, 한중일과 대만의 첨예한 갈등, 러시아의 개입, 남중국해 관련 문제 등도 우리가 자주 접하는 긴장이다.)을 유지하는 까닭은, 거듭 설명하지만 경제성장과 민주화의 상관관계 때문이다. 젱하스는 이슬람 사회가 동아시아를 본받아야한다고까지 말한다. 반대로 실존사회주의의 실패로부터도 얻을 수 있는 교훈을 얻어가야 한다고 말한다.


  이 모든 주장들은 젱하스가 ‘근대화’라는 것에 대해 기대하는 바가 크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그는 말한다. “근대의 역동성과 매력은 바로 운동과 반대운동, 그리고 그것의 확산을 통해 볼 수 있는 다양성에 있다.” 이 다양성은 “잘 쓰면” 건설적 합의를 통해 광범위한 평화상태를 유지하게 해주고, “잘못 쓰면” 내전의 씨앗이 된다. 서구는 “잘 쓰게” 되기까지 숱한 내전을 겪어왔다. 대신 그 상처는 다원성에 대한 이해, 성찰적 태도, 제도적 고찰 등의 여러 해결책을 발제할 수 있는 문화적 역량을 키워줬다. 진지하게 세계 문제를 다루는 서구의 학자들은 그들의 역사를 교훈 삼아 다른 곳의 근대화도 이뤄지길 간절히 소망하는데, 이 점에서 젱하스는 요한 갈퉁과 만난다. 그리고 그가 비판한 헌팅턴과도 조우한다.


  평화는 중재의 능력에서 비롯되는 현실적 상태이다. “평화를 바랍니다.”라는 추상적 말로 끝날 개념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은 운동이며, 이동이다. 그 밑바탕에는 언제나 갈등이 있다. 따라서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이 갈등을 해결할 수 있는 제도와 체제, 그리고 이해이다. 행동에 앞서 이해가 있어야 한다. 문제는 이 이해가 어떻게 갈등의 지역에 단비처럼 내릴 수 있느냐이다. 이 점에 있어서 <문명 내의 충돌>의 독서는 공허하게 남는다. 내일 당장 9.11 테러와 비견될 만한 참사가 벌어져 세계가 냉각된다고 해도, 안타깝지만 별로 이상하지 않은 현실이다. 이 책은 나에게 “나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와 같은 질문을 애당초 하지 못하게 했다. 이럴 때 독자는 압도당한다. 독서가 늦어진 까닭도, 핑계대보자면 그 때문이다. 문득 세계 저 어딘가의 미래를 소망해본다. ‘아랍의 봄’이 정말 봄이 되어 평화에 대한 열망과 중재의 힘이 실현될 수 있다는 것이 증명되었으면, 하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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