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시전쟁 잔혹사 - 학벌과 밥줄을 건 한판 승부 인사 갈마들 총서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09년 1월
평점 :
절판


2011.11.23 

  이 시대의 고등학생들은 할 말이 참 많을 것이다. 갓 제대한 ‘아저씨’들의 허풍보다 더 긴 읊조림, 더 거센 성토를 쏟아내지 않을까? 그런데 가끔 말하고 싶어도 하지 못하는 이들이 있다. 어느 때보다도 힘겹게 좁은 문을 통과하고 있는 근래 들어 고통을 견디지 못해 고귀한 목숨을 스스로 버리는 이들이 많아졌다. 해마다 이맘쯤이면 우리는 안타까움을 금치 못한다. “조금만 더 견뎌보지.”라는 생각은 인생사의 각종 풍파를 겪은 어르신들이 늘 하시는 한탄이다. 나고 죽는 것이 신이나 운명, 혹은 사랑의 연으로 이어진 것이 아니라고 판정이 난다고 한들, 한창 내일의 내일을 기대할 꽃다운 생을 자신의 손으로 베어버리는 것은 얼마나 자기중심적이고, 무모한 결단이란 말인가. 나는 얼마 전 <한겨레>의 오피니언 글을 읽었는데, 그 글에는 자살을 구조적 문제라 결론지은 뒤, 문제 극복을 위해서는 어떠한 연대를 만들어야 한다는 한 학생의 주장이 실려 있었다. 지인이 겪은 일을 복기하며 적은 글이라 그런지 유독 상기되어 있던 그 학생은 관심을 넘어선 ‘연대’가 해결방안이라 했다. 연대(連帶)라. 죽음 앞으로 두런두런 학생들이 모인다. 칼 같은 경쟁사회의 첨탑 앞으로 웅성웅성 학생들이 발표를 기다린다.  

  우리 사회는 대체로 여럿이 모이면 특정문제를 효과적으로 풀어나갈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 나는 “기대한다.”고 했지 그것이 실효를 거둔 적들이 현명하게 헤아려진다고 한 적은 없다. 강준만氏도 말한다. 입시전쟁 앞에서 리얼리스트가 되자는 것이다. 전쟁은 끝나지 않을 것이라고 그는 장담한다. 그리고 나 역시 부족하게나마 고찰해보건대 전쟁은 오히려 더욱 심화될 것이다. 내가 거치고 올라온 어떤 지뢰밭을 다음 해에는 또 다른 학생들이 거쳐 갈 것이다. 죽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자가 살아남는다. 이 판에 공생(共生)이란 없다. 100점 받은 이가 50점 받은 이에게 25점을 나눠주진 않는다. 나는 고등학생 시절에 친구들과 점수비교를 하다가 “5점만 꿔줘라.”, “뭐? 옛다. 점당 천 원.”이라며 우스갯소리를 하곤 했다. 정말 돈 받고 1점씩 꿔줬으면 나는 그때 경찰서에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들 중 경찰서에 간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우리는 대체로 대학교에 갔다. 안 간 사람은 다음 해에 갔다. 그 다음 해에 간 사람도 있다. 그래도 안 되면 군대부터 가는 것이다. 

  굳이 의도한 바는 아니지만 헬레나 노르베리-호지의 <오래된 미래>에서 평화로운 라다크 전통사회를 보며 행복해하다가 오늘 강준만氏의 책을 접했다. 극명한 비교는 문제의식을 각성시키는 주동력 중 하나이다. 잇몸에서 피가 많이 난다고 진료를 부탁하면 치과의사는 “피가 나는 곳을 더 많이 닦으세요. 피가 나도 계속 닦으세요.”라고 말한다. 우리 사회에도 피를 많이 흘리는 부위들이 있다. 하지만 사람들은 소위 ‘피비린내’가 진동한다며 그곳에 가려고 하지 않는다. 차라리 서울 이곳저곳에 뚫려 있는 하수구 구멍에서 솔솔 피어나는 ‘환상적인’ 악취가 나은 모양이다. 이러한 방기(放棄)가 옳지 못하다는 것은 늘 지적되어 왔지만 진중권氏류의, 강준만氏류의, 혹은 박노자氏, 아니면 홍세화氏류의 따끔한 충고들이 매번 ‘재탕’되는 것을 보면 우리는 여전히 방기하고 있는 모양이다. 행동하는 지성들에게는 일명 ‘좌파’라는 딱지가 붙기도 하고, 아낌없이 주는 나무들에게는 “뭐 하러 저래?”라든지 “뭘 바라는 거 아니야?”와 같은 소시민적 망언들이 붙는다. 이 사회가 왜 이렇게 됐는가? 나는 교육의 ‘부위’에서 해괴망측한 픽션들의 발단을 찾아봤다. 강준만氏의 책 <입시전쟁잔혹사>가 많은 도움이 됐다. 

  EBS는 교육을 ‘백년대계(百年大計)’라 소개한다. 여기서 ‘백년’은 “장구한 세월”과 같은 말이다. 어떤 일이든, 그리고 어떤 업적이든 단기간에 쌓아 올린 것이라면 쉽게 무너지기 십상이다. 다른 것들도 마찬가지이나, 특히 교육은 한 나라의 미래를 대비하는 일이기 때문에 늘 신중하게 쌓아올린 탑이 되어야 한다. 낮은 탑이어도 괜찮다. 건강한 모토를 가지고 착실하게 하나하나 쌓아 올린 것이면 된다. 사상의 압제와 잘못된 제도로 만든 탑은 그 누구도 우러르지 않는다. 정말 아쉽게도 우리나라는 후자의 경우라 할 수 있다. 강준만氏는 조선시대부터 시작해 각 시대별로 교육의 변천사를 설명해주는데, 큰 맥락을 놓고 본다면 작금의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다. 아니, 악화되고 있다. 그런데 더 심각한 것은 기초가 부실한 탑임을 아는 사람들마저도 그 탑을 우러르고 있다는 것이다. 돈 때문이다. 

  박정희 정권으로부터 시작된 군부의 통치 시대. 사상과 표현의 자유를 억압한 사례들은 무수히 많았고, 나의 부모님 세대가 그 시절에 공부를 하셨다. 당시보다 지금이 교육적 취지들이 좋아진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모양새가 영 좋지 않다. 얼마 전에도 5.18 민주화항쟁과 6월 민주항쟁의 역사 교과서 누락문제를 놓고 교육계와 역사학계가 발칵 뒤집어진 적이 있었다. 다행이도 교육부에서 재차 수정을 했는데, 이와 같은 ‘국민의 눈’은 우리 스스로 우리가 무엇을 배워야 하는지를 대체로 잘 알고 있는, 쉽게 말해 ‘경찰노릇’할 수 있는 능력이 있음을 입증하는 듯하다. 그러나 근래의 문제는 뭘 배우느냐가 아니다. “배우는 것” 자체가 문제이다. 

  세계 교육의 변천사는 교육의 방법이 획일적이지만은 않다는 것을 시사한다. 그런데 우리는 대개 비슷하게 배운다. 조금 더 많이 배우고, 배움을 ‘속성(速成)’으로 처리하려면 과외를 받곤 하는데, 지금은 법적으로 금지되어 있으나 사교육은 역대 대통령들이 모두 근절하겠다고 하면서도 단 한 번도 뿌리 자르지 못한 악습이다. 원하는 이들이 많으니 과외를 일컬어 ‘악습’이라 부르면 ‘이상한 사람’으로 취급받는 사회가 된 것이다. 우골탑, 소위 “소 팔아 대학 보내기”가 최선의 ‘자식사랑’처럼 비춰지던 세태가 이어져 지금은 “집 팔아 대학 보내는” 것이 거부할 수 없는 유행이 되었다. 학생들은 “죽더라도 대학 가서 죽자.”라고 하다가 때론 정말 신입생 때 만취상태로 교정 연못에 빠져 죽기도 한다. 이게 대체 무슨 꼴이란 말인가. 

  고3은 개도 안 건드린다고 하더라. ‘학력 우생학’에 따라 서울의 주요대학에 입성하기 위해 온갖 신경을 곤두선 탓이다. 나는 일산 백석고 출신이다. 공부를 잘 해서 들어간 것은 아니다. 예전에, 소위 경기도 4대 명문이라 불리던 세대의 바로 뒤를 이어 ‘뺑뺑이’ 1세대로 입학한 것이다. 하지만 명문의 분위기는 이어졌다. 선생님들은 대학과 관련된 모든 정보들을 최대한으로 상기시켜주는데 엄청난 노력을 쏟으셨다. 한 영어선생님은 “여러분. 여러분은 1000번 버스를 타야 합니다. 우리 모두 1000번 버스를 탑시다.”라고 자주 격려하셨다. 1000번 버스는 일산에서 신촌, 광화문, 그리고 서울역으로 이어지는 광역버스이다. 신촌에서 내리자는 것이었다. 그곳에는 Y대가 있다. 중하위권을 제외한 대부분의 친구들은 SKY의 입성을 꿈꿨다. 다른 학교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때문에 Sonata의 S자를 떼면 S대에 갈 수 있다는 괴담이 돌면서 각 학교의 선생님들 중 Sonata를 타고 다니는 분들이 피해자(?)가 되는 웃을 수 없는 상황이 연출되곤 했다. 학생들의 러쉬는 간절했다. 이러니 사교육이 근절될 수가 없다. 강준만氏의 말이다.
  “과연 공교육의 경쟁력이 사교육의 경쟁력을 능가하는 게 가능할까? 이는 공기업의 경쟁력이 사기업의 경쟁력을 능가하는 게 가능하냐는 물음과도 통하는 것이다. 그건 원초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다. 공교육의 본질이자 장점은 경쟁력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공교육의 경쟁력을 아무리 높인다 해도 사교육에 대한 수요는 여전히 줄지 않을 것이다. 대학입시 경쟁은 ‘제로섬 게임’이기 때문이다.” 

  교육의 경쟁은 자본주의 시대가 엮어놓은 당연한 순리이지만 그 역사는 자본주의보다 더 오래되었고, “앎으로써 경쟁”하는 것은 비단 개인의 차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었다. 더 많이 아는 국가가 한 발자국 더 먼저 상대방을 제압할 수 있었고, 그건 영주, 군주, 혹은 장군들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소위 ‘병법(兵法)식’ 생존을 위한 공부만이 있는 것은 아니다. 한편으로 공부는 자기의 계발이다. 모름지기 이것만이 정도(正道)라곤 할 순 없어도 자기를 계발하는 것은 자기와 타인을 아는 것이고, 나아가 도덕에 입각해 사회의 정의를 실현할 지적 용기를 닦는 것이다. 이러한 공부의 스펙트럼은 굉장히 다양하다. 그러나 학교교육에 있어서 학생들이 자기계발을 할 수 있는 여건은 실질적으로도, 그리고 학생들이 흔히 체감하는 면에서도 부족하다. 이러니 학생들은 선생님들이 시험범위 내에서만 설명해주기를 원하고, 그보다 더 중요한 인생교육을 하려고 하면 귀를 닫아버린다. 최근 들어 학생들의 무례가 인권위의 ‘보호’ 하에 확장되고, 교사와 학생 사이의 ‘다툼’이 만천하에 공개된 일도 소위 ‘문제아’를 보듬지 못하는 학교제도의 결함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의지와 능력을 가진 교사는 ‘시험’과 각종 잡무에 얽매이고, 학생은 긴밀한 사제관계가 주는 정서적 안정이나 인생 공부 등 소중한 경험들을 잃어버린 채 오로지 공부에만 매달리게 된다. 교사가 학생을 폭행하던 시절이 있었기 때문에 인권위는 그것을 방지하는 차원에서 학생인권조례를 발표했으나, 학생이 교사를 폭행하는 것에 대한 조례는 발표하지 않은 것은 대단한 유감이라 하겠다. 

  더 큰 문제는 입시전쟁 이후의 대학생활도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에 있다. 심도 있게 배운다는 점에서는 차이가 있을지 몰라도 결국 대부분의 길은 ‘취업전쟁’으로 이어지며, 얼마 전 김어준氏가 인터뷰 중에 말했던 것처럼 “청춘만 힘든 것은 아닌” 치열한 삶이 또 기다리고 있다. 이 모든 것의 발로는 공존의 삶이 아닌, 경쟁의 삶에 있다. 대다수의 아기들은 첫 울음과 함께 ‘예비 경쟁자’라는 호칭을 받는다. 

  해결책은 없을까? 이상적 대안은 많으나, 마땅한 대안이 드물다. 강준만氏의 진단처럼 우선 “기존 학벌주의 체제의 수혜자들”이 요지부동이다. 다른 하나는 아마 체감하기 훨씬 쉬운 진단일 것인데, 평등주의의 함정에 대다수의 사람들이 빠지고 싶어 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무슨 말인가 하면, 일단 ‘학벌’이라는 것이 점진적으로 완화된다고 하더라도 독점적 이익이 다수에게 골고루 뿌려지면 이익은 적어 보인다. 더군다나 (이 점은 매우 예리한데) 사실상 ‘하향평준화’이니 ‘포퓰리즘’이니 하고 말하는 사람들은 대부분이 다 엘리트이다. 현실적 대안이 없는데도 “타도”, “타파”를 외치는 것은 결과적으로 학벌을 강화시키는, 즉 선전하는 결과를 낳는다. 

  EBS는 지식e 다큐멘터리 시리즈를 통해 주요 선진국들의 교육정책과 교육에 임하는 태도를 인상 깊게 소개한 적이 있고, <세계의 아이들>이라는 프로그램을 방영하면서 교육의 참모습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지속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영국에서는 그림 한 장으로 각종 분야를 통합해서 가르치는 시범학교가 운영된 적이 있는데 국제적으로 평판이 아주 좋았고, 핀란드, 덴마크 등 북유럽 국가들은 우리와 사뭇 다른 ‘성공’에 대한 관념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극심한 학벌 경쟁에 시달리지 않는다. 그들이 새로운 교육 대안을 찾고자 주장하는 바는 일단 우리나라의 것들과 비교했을 때 그 실효성 부분에 있어서도 월등히 뛰어나다. 출세의 길로써 교육의 경쟁 코스를 부단히 따라가야 하는 이 나라의 토양은 벌써 반세기의 역사를 지녔고, 관념 역시 서구와 판이하기 때문에 우리나라가 상기 국가들의 이상적인 교육 대안을 모방하려고 시도하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로 들릴지도 모르겠다. 부분적인 대안들은 분명 있어 왔고, 대부분은 틀렸으며, 대통령들의 공약들은 수포로 돌아가곤 했다. 근본부터 바꾸자는 말 역시 이 사회에서는 “뭣도 모르고 하는 소리”로 통한다. 

  이 나라의 고등학생들은 할 말이 참 많다. 그러나 대학생들도 할 말은 많고, 그런 대학생들에게 “아니다. 우리도 할 말이 많다.”는 사회인들은 더 많다. 그간 달려온 거리, 넘어져 까진 상처와 그것이 아문 자리에 남은 영광의 흔적들. 많은 이들이 지쳤기 때문에 내일도 누군가가 역경 속에서 뛰어갈 것이나, 자신은 상관이 없다고들 말한다. 사람들은 예전보다 더 많은 것을 알려고 하고, 접하고 있지만 이상하게도 더 불행하다고들 한다. 배움이 우리를 불행에 빠뜨린다는 소식을 고대의 철학자들이 사후세계에서 듣는다면 얼마나 슬퍼할까. 나는 부끄러운 세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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