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이름 없는 감정들의 사전
이아코포 멜리오 지음, 최보민 옮김 / 서교책방 / 2026년 5월
평점 :

*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았습니다
이상하게도 감정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 경험이 있나요? 고작 “그냥 좀 이상했어”, “말하긴 좀 복잡해”라는 말로 때워버린 그 미묘한 무언가 말입니다.
『이름 없는 감정들의 사전』은 세계 여러 언어 속에 숨어 있는 감정 단어들을 모아, 말해지지 못했던 마음의 지도를 펼쳐 보입니다. 우리 마음의 해상도를 극한으로 끌어올리는 인문학적 여행을 떠나보세요.
이탈리아의 인권·사회권 운동가이자 작가, 논설위원, 정치인 이아코포 멜리오가 칼럼 <말은 오래 남는다(Verba manent)>를 통해 연재하던 글을 묶어낸 책입니다. 사전처럼 딱딱하지 않습니다. 시집과 에세이, 철학 노트와 감정 일기가 한 권 안에서 동시에 숨 쉬는 느낌입니다.
저자는 언어가 붙잡지 못한 감정들의 이름을 잡아챘습니다. 사회적 약자의 권리와 평등 문제를 오래 다뤄온 활동가였던 그는 감정 역시 인간의 존엄과 연결되어 있다고 바라봅니다. 이름 붙일 수 없는 감정은 쉽게 무시되기 때문입니다.
감정을 설명하는 방식 자체가 다릅니다. 행복, 슬픔, 분노와 같은 감정 분류 대신 자주 겪으면서도 쉽게 표현하지 못했던 마음의 잔상들을 포착합니다. 혼자 있고 싶지만 완전히 고립되기는 두려운 상태, 어떤 하루가 이상하게 오래 기억될 것 같은 예감 등 그런 미세한 정서를 세계 각국의 단어를 통해 번역해냅니다.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는 데 서툰 알렉시티미아(감정표현불능증)에 대해 알게 되었습니다. 『이름 없는 감정들의 사전』은 내면의 시끄러운 감정을 말로 뱉지 못해 답답할 때, 명확한 언어적 무기를 쥐여주며 정서적 해방감과 치유를 안겨줍니다.
알바니아어 베사(Besa)는 사랑하는 사람을 향한, 깨뜨릴 수 없는 신성한 약속을 뜻합니다. 단순히 약속을 지킨다는 의미를 넘어섭니다. 한국어로 굳이 옮기자면 의리나 신의에 가깝겠지만, 그것보다 훨씬 신성한 무게를 지닙니다. 일정은 쉽게 취소되고, 말은 맥락 없이 소비되는 요즘, 그래서인지 베사라는 단어는 오히려 그리운 감각으로 다가옵니다.
아랍어 구르파(Gurfa)는 한 손으로 뜰 수 있는 물의 양이라고 합니다.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는, 딱 그만큼. 아랍·이슬람 문화권에서 이 단어는 가진 것의 일부를 기꺼이 건네는 이타적 친절의 상징으로 쓰입니다. 사막에서 목마른 이에게 한 움큼의 물을 내미는 행위 그것이 구르파입니다. 풍족할 때 나누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구르파가 아름다운 이유는, 자신에게도 충분하지 않을 수 있는 상황에서 그 일부를 내어준다는 데 있습니다.
삶을 실제로 지탱하는 것은 지극히 사소하고 감각적인 찰나의 순간들입니다. 매일 반복되는 지루한 일상 속에서 문득 차오르는 해방감 혹은 스치듯 지나가는 삶의 경이로움을 포착하는 단어들이 어이집니다.
‘아, 내 기분이 지금 딱 이래!’라며 가슴을 치면서도 정작 이름 붙이지 못했던 기막힌 상황들에 딱 맞는 단어들이 등장합니다. 하와이어 아키히(Akihi)는 어떤 장소에 어떻게 가야 하는지 누군가가 설명을 해줘서 감사 인사를 전하고는 그 장소를 찾아 나서는데, 곧바로 기억이 나지 않는 어이없는 상황을 나타낸다고 합니다.
우리에게는 너무나 익숙하지만 외국인들에게는 설명하기 고약하리만큼 미묘한 단어, 눈치(Nunchi)도 소개되어 있습니다. 이탈리아인 저자의 시선으로 분석한 눈치는 대단히 세련된 사회적 지능이자 고도의 공감 능력으로 묘사됩니다. “눈치 보인다”라며 억압적인 문화의 산물로 여기기도 하지만, 타인의 맥락을 섬세하게 읽어내어 전체의 조화를 깨뜨리지 않으려는 능력은 인간 관계를 부드럽게 만드는 고차원적인 감정 기술입니다.
시공간을 초월하여 밀려드는 기묘한 그리움과 연대의 감정에 대한 단어들도 예쁩니다. 신비로운 영적인 감각을 담은 그리스어 이오이엔(Ioien)은 자신의 한계를 극복해낼 수 있다는 자각과 희망적인 징조를 담은 단어입니다.
현실의 무거운 벽에 부딪혀 주저앉고 싶을 때, 세상의 냉소적인 시선으로부터 나의 순수한 열정을 지켜내고 더 멀리 도약하고자 하는 인간의 원초적인 갈망. 이오이엔이라는 낯선 고대 어휘를 입안에 머금어봅니다.
당신을 가슴에 안고 갑니다라는 뜻을 가진 피우케네뉴(Piwkenleyu)와 아픔을 달래주는 부드러운 어루만짐이라는 뜻을 가진 나나이(Nanai)는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깊고 진실한 애정을 표현하는 단어들이어서 참 다정하게 느껴집니다.

꿈만 같은 하루라는 뜻의 튀르키예어 휠야(Hülya). 인생이라는 것이 늘 내 뜻대로 되지 않아 불안하고 초조하지만, 일 년 중 단 며칠만이라도 톱니바퀴가 완벽하게 맞아떨어지는 휠야의 순간이 찾아옵니다. 지금은 서툴고 삐걱거릴지라도, 반드시 모든 것이 제자리에 안착하는 완벽한 평화의 하루가 기다리고 있을 거라는 위로의 단어로 다가옵니다.
발음하기조차 힘든 핀란드어 휘프뜨느뜨드뜨스(Hyppytyynytyydytys) 단어도 인상깊었습니다. 긴 하루를 마치고 소파에 몸을 던지는 순간, 혹은 폭신한 침대에 대자로 쓰러지는 그 찰나, 온몸의 긴장이 한꺼번에 빠져나가는 그 기분. 핀란드 사람들은 그것에 이름을 붙였고, 그 이름이 발음하는 것만으로도 이미 혀가 지치도록 길다는 사실이 어쩐지 유쾌합니다. 이완을 표현하는 단어가 이렇게 수고스럽다니. 그 역설 자체가 오히려 재밌습니다.
세상의 모든 슬픔을 탐험하고, 외로움을 번역하며, 그리움을 수집해 놓은 마음의 대피소 『이름 없는 감정들의 사전』. 내면의 미묘한 감정들에 이름을 붙여주지 못하고 방치할 때, 그 감정들은 집을 잃고 내 안에서 유령처럼 떠돌며 우리를 아프게 만듭니다.
전 세계 수십 개 언어권에서 길어 올린 200개의 단어들로 감정에 이름을 붙여보세요. 스스로의 삶을 더 깊이 이해하고 풍요롭게 향유할 수 있게 됩니다. 미처 알지 못했던 그 마음의 이름을 발견하는 경이로운 여행을 시작해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