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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약품 살인사건 - 약이 독이 되는 위험한 화학의 역사
백승만 지음 / 해나무 / 2026년 5월
평점 :

*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았습니다
의약품은 삶을 지탱하는 가장 보편적인 수단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무심코 입안에 털어 넣는 그 정교한 분자 화합물이 아주 미세한 균형의 차이로 생명을 앗아가는 가장 완벽한 흉기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생각해보진 못했습니다.
약화학자 백승만 교수의 신작 『의약품 살인사건』에서는 인류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설계된 의약품이 인간의 끝없는 탐욕, 사소한 안일함 그리고 거대한 자본의 논리와 결탁했을 때 벌어지는 비극적 사건들을 추리소설보다 더 몰입감 넘치는 스토리로 추적합니다. 약학자의 시선으로 바라본 약과 독의 미묘한 경계, 그 치명적인 화학의 역사 속으로 빠져들어봅니다.
전 세계를 충격에 빠뜨렸던 팝의 황제, 마이클 잭슨의 급작스러운 사망 원인은 우유주사로 알려진 프로포폴이었습니다. 마이클 잭슨의 사망진단서에는 급성 프로포폴 중독(Acute propofol intoxication)이라는 문구가 박혀 있었습니다. 프로포폴은 수면을 유도하는 약물이 아니라 중추신경계를 빠르게 억제하는 마취유도제입니다.
한국 사회에서 프로포폴은 이미 의료용 약품이라기보다 연예계 스캔들과 중독 범죄의 이미지가 강합니다. 저자는 편리한 의료 시스템이 도리어 감시망의 사각지대를 만들고, 합법적인 공간인 병원에서 중독자를 양산하는 역설적인 상황을 정조준합니다.
이어서 의료 현장에서 발생하는 치명적인 투약 오류와 이를 밝혀내는 과학 수사의 과정을 다룹니다. 인체는 극도로 정밀한 화학 공장과 같아서 성분이 조금만 달라지거나 엉뚱한 약물이 주입되면 시스템 전체가 순식간에 붕괴합니다.
충격적인 에피소드 중 하나는 안약입니다. 눈이 충혈됐을 때 쓰는 그 안약 말입니다. 우리집에서 있습니다. 눈 주변의 혈관을 수축시키면서 충혈기를 없애는 테트라하이드로졸린(tetrahydrozoline)은 자율신경, 구체적으로는 교감신경을 활성화시켜서 생리적 변화를 가져온다고 합니다. 접근이 쉬운 물질일수록 악용의 문턱도 낮아집니다.
미국 테네시주 반더빌트 대학교 의료원서 발생했던 간호사 라돈다 보트의 실화를 소개하며 시스템의 맹점과 인간의 부주의가 결합했을 때의 공포를 생생하게 증언하기도 합니다. 신경안정제인 베르세드 대신 투여된 베쿠로늄은 온몸의 근육을 마비시키는 강력한 독극물과 같은 기전을 가진 근육이완제였습니다. 과로한 시스템, 습관화된 규정 무시 그리고 단 한 번의 실수가 돌이킬 수 없는 결과로 이어진 구조적 비극입니다.
저자는 의약품이 인체 내에서 신경과 근육의 접합부를 어떻게 무력화하는지 화학적 메커니즘을 짚어줍니다. 19세기 과학자들이 당나귀 실험 등을 통해 독극물의 치명적 원인을 규명해 나간 역사부터 현대 법의학이 몸속 깊은 곳에 숨겨진 미량의 살해 도구를 추적해 내는 과정을 보여줍니다.
문학과 역사를 관통하는 독극물의 잔혹사에 대한 이야기들도 흥미롭습니다. 셰익스피어의 비극 《햄릿》에서 클라디우스가 잠든 왕의 귀에 떨어뜨려 살해했던 전설적인 독약, 헤보나(Juice of cursed hebona)의 정체는 무엇이었을까요? 약학자의 안목으로 추적한 결과 이는 가지과 식물인 사리풀 추출물로 추정되며 그 안에는 강력한 부교감신경 차단제인 스코폴라민(scopolamine)이 함유되어 있었습니다.
놀랍게도 이 치명적인 독소는 오랜 시간 동안 가장 흔하게 쓰인 멀미약, 키미테의 주성분이기도 합니다. 2024년 방글라데시에서는 범죄자들이 피해자의 얼굴에 스코폴라민 가루를 뿌려 의식을 몽롱하게 만든 뒤 금품을 갈취하는 사건이 보도되기도 했습니다. 참고로 요즘 어린이 멀미약은 주로 항히스타민제를 사용해 비교적 안전하게 멀미를 막을 수 있다고 합니다.
이 스코폴라민과 아트로핀 같은 성분들이 어떻게 군사적 목적의 화학무기로 발전했는지, 히틀러의 선택과 세계대전 당시 정보기관들이 비밀리에 자행한 생체 실험의 역사까지 확장합니다. 인류를 고통에서 구원하려던 신경전달물질 조절 기술이 국가적 광기와 결합했을 때 어떻게 대량 학살의 무기가 되는지 보여줍니다.

『의약품 살인사건』은 우리가 가장 맹신하는 영양소이자 아무리 먹어도 안전할 것이라 착각하는 비타민의 배신을 폭로합니다. 비타민A는 수용성 비타민과 달리 체외로 쉽게 배출되지 않고 간에 축적됩니다. 배질 브라운은 건강해지겠다는 맹목적인 집착 속에서 매일 권장량의 수천 배에 달하는 비타민A를 들이부었고 결국 간이 파괴되어 사망했습니다. 몸에 좋은 비타민도 인체의 허용치를 넘어서면 무서운 독소로 돌변합니다.
의약품 시장을 지배하는 거대 제약 자본과 인간의 탐욕이 빚어낸 현대판 약물 잔혹사는 호러 그자체입니다. 저자는 교도소 임상시험의 흑역사와 이 독성을 역이용해 현대의 항암제를 개발해 낸 반전의 과학, 약이 기업의 이윤을 극대화하기 위한 상품으로 전락했을 때 벌어지는 사회적 살인을 고발합니다.
더불어 성형외과와 피부과를 지배하는 보톡스가 원래 안과에서 안검경련을 치료하기 위한 극도의 희석 주사제였다가 어떻게 미용 시장의 황금알을 낳는 거대 자본이 되었는지, 그리고 특허권을 방어해 막대한 이익을 유지하려는 제약사들의 치열한 법정 소송전과 이를 깨부수려는 복제약 시장의 암투를 흥미진진하게 풀어냅니다.
마지막으로 법의 테두리를 벗어나 사설 실험실에서 불법으로 마약을 제조하고 오남용하는 범죄자들과 그 속에 숨겨진 화학적 메커니즘을 다룹니다. 체내에서 분해되기 쉬운 살충제를 만들어 회사에 수익을 안겨준 뒤 독자적인 연구 권한을 얻었던 비운의 괴짜 과학자, 알렉산더 슐긴의 이야기로 문을 엽니다.
그가 세상에 널리 알린 대표적인 물질은 바로 환각제 MDMA(엑스터시)입니다. 바이엘의 지혈제 화합물, 아드레날린과 구조적으로 매우 유사한 이 물질들은 뇌의 신경망을 교란하여 일시적인 희열을 주지만, 결국 인간의 이성을 마비시키고 영혼을 파괴하는 덫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안전하다고 믿는 일상적인 약물조차 인체라는 복잡한 계 안에서는 언제든 칼날을 거꾸로 돌릴 수 있습니다. 『의약품 살인사건』은 이 미묘한 한계와 원칙을 직시하는 것이야말로 현대 사회에서 스스로의 생명을 지키는 진짜 과학 지식임을 일깨워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