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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절사회 - 손익계산이 되어버린 인간관계, 연결 불가능성의 시대에 관한 탐구
이승연 지음 / 어크로스 / 2026년 4월
평점 :

*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았습니다
감정적 흑자 아니면 가차 없이 언팔? 사회학자가 해부한 2026년식 인간관계의 민낯 『손절사회』. 우리 시대의 가장 아픈 구석을 가장 세련된 언어로 파헤친 화제의 신간입니다.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 외로움을 호소하면서도, 동시에 관계를 끊는 데는 그 어느 때보다 능숙해졌습니다. 이승연 저자는 중앙대학교 심리학과를 수석 졸업하고 사회학적 연구를 이어온 젊은 연구자로, 여성 우울증과 치료요법 문화에 대한 탐구를 바탕으로 오늘날 인간관계의 변화를 입체적으로 분석합니다.
『손절사회』는 개인의 감정 문제가 아닌, 구조적 변화 속에서 인간관계가 어떻게 재편되었는지를 추적하는 작업에 가깝습니다. 우리는 관계를 통해 위로받기보다, 관계로부터 상처받지 않기 위해 전략을 세우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 전략은 '손절'입니다. 과거의 관계가 운명이나 공동체적 의무였다면, 오늘날의 관계는 선택과 투자의 영역으로 이동했습니다. 나에게 정서적 이득을 주지 않거나, 피곤함을 유발하는 관계는 수익률 낮은 주식을 정리하듯 손절의 대상이 됩니다.

저자는 우리가 우정마저 기회비용의 관점에서 바라보기 시작했음을 짚어주며, 신자유주의적 경쟁 논리가 어떻게 우리의 가장 사적인 영역인 마음까지 침투했는지 이야기합니다.
영상 콘텐츠를 보면 관계 멘토들이 넘쳐납니다. 백종원 대표가 식당 위생을 점검했듯, 오은영 박사나 강형욱 훈련사처럼 전문가들이 인간의 행동을 진단하고 처방을 내리는 모습에 우리는 열광합니다.
저자는 이 현상이 단순한 정보 습득을 넘어, 타인을 잠재적 가해자나 유해물질로 분류하는 낙인찍기로 변질되고 있음을 우려합니다. 나르시시스트, 소시오패스, 가스라이팅 같은 전문 용어들이 일상화되면서, 우리는 입체적인 인간을 만나는 대신 빌런 리스트를 체크하며 관계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인간관계의 지고지순한 가치는 무해함이 되었습니다. 나에게 조금이라도 부정적인 감정을 유발하거나 스트레스를 주는 존재는 에너지 뱀파이어로 규정됩니다.
저자는 고통을 삶의 필수적인 성장통이 아닌, 제거해야 할 암세포처럼 취급하는 문화를 짚어줍니다. 타인의 고통을 들어주는 행위가 나를 감정 쓰레기통으로 만드는 행위로 치부될 때, 타인과 깊게 연대할 가능성은 원천 봉쇄됩니다.
자기계발에 온 에너지를 쏟아야 하는 개인에게 갈등이 따르는 관계는 사치이자 장애물입니다. 결국 많은 이들이 에너지를 아끼기 위해 잠수나 손절을 택합니다. 저자는 이것이 개인의 비정함 때문이 아니라, 관계를 맺을 여유조차 허용하지 않는 노동 환경과 사회 구조의 산물임을 일깨워줍니다.
MBTI 열풍의 이면에는 실패 없는 관계를 향한 욕망이 숨어 있습니다. 저자는 인간을 16가지 유형으로 박제화하는 행위가 인간 관계의 역동성을 거세한다고 말합니다. 나는 원래 이런 사람이야라는 독백적 자아에 갇힐 때, 우리는 타인과의 대화를 통해 변화하고 성장할 기회를 잃어버립니다.
심지어 이별조차 더 나은 나를 위한 경험치로 소비됩니다. 아픈 상처를 응시하기보다 이번 연애를 통해 내 자존감을 지키는 법을 배웠다며 매끄럽게 포장하는 문화, 저자는 이것을 영혼의 능력주의라고 명명합니다.
자기 돌봄이 산업이 된 현실도 다룹니다. 우울함은 치료해야 할 질병이 되고, 행복은 연습해서 얻어야 할 성과가 되었습니다.
갈등도, 반대도 없는 AI와의 대화나 사주팔자에 의존하는 심리는 무엇일까요? 저자는 우리가 상호성이 제거된, 통제 가능한 관계만을 갈구하고 있다고 진단합니다. AI는 나를 공격하지 않는 완벽한 거울이지만, 그 거울 속에는 오직 나만 존재할 뿐 타인은 없습니다.
저자는 사회적 약자인 여성이 겪는 구조적 고통(가사 노동, 경력 단절, 성폭력 등)이 치료요법 문화를 만나면 "네 마음이 약해서 그래", "너의 자존감을 높여야 해"라는 개인적 차원의 처방으로 변질되는 과정을 비판하기도 합니다.

더불어 마음의 감기라는 달콤한 수사법은 우울증을 둘러싼 사회적 환경을 지워버립니다. 자존감이 여성을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존감조차 관리하지 못하는 무능한 개인이라는 새로운 굴레를 씌울 수 있다고 경고합니다.
손절이 지혜로 추앙받는 시대에, 저자는 무엇을 말하고 싶은 걸까요? 연결될 용기를 제안합니다. 손절은 우리가 서로를 사랑할 능력을 잃어버렸다는 슬픈 증거라는 것을 일깨워주며 타인은 지옥이 아니라, 내가 존재하기 위한 유일한 통로라고 말합니다.
『손절사회』는 손절을 무조건 비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손절이 왜 매력적인 선택이 되었는지를 설명합니다. 다만 그 선택이 반복될 때 우리가 어떤 사회로 향하게 되는지를 묻습니다.
조금의 상처도 없는 매끈한 방 안에서 AI와 대화하며 고립될 것인가, 아니면 거칠고 투박하더라도 살아있는 타인의 손을 잡고 세상으로 나갈 것인가. 나를 지키기 위해 했던 선택들이 오히려 나를 가두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진정한 해방이 시작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