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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사들의 문법 - 르네상스의 천재 피코 델라 미란돌라, 그리고 언어의 숭고한 힘에 대하여
에드워드 윌슨-리 지음, 김수진 옮김 / 까치 / 2026년 4월
평점 :

*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았습니다
매일 언어를 사용하지만, 과연 우리가 언어를 지배하고 있는 걸까요? 아니면 언어라는 정교한 시스템에 지배당하고 있는 걸까요? 500년 전 르네상스 이탈리아에서 이 질문의 끝판왕을 보려 했던 한 청년이 있습니다. 바로 조반니 피코 델라 미란돌라입니다.
『천사들의 문법』은 천재의 일대기를 넘어서, 인류가 잃어버린 언어의 야성과 초월적 힘을 추적하는 인문학적 스릴러에 가깝습니다. 저자 에드워드 윌슨-리는 케임브리지 대학교에서 중세와 르네상스 문학을 가르치는 베테랑 연구자입니다. 스물네 살의 앙팡 테리블 피코가 던진 900개의 논제 속으로, 그리고 그가 발견한 천사의 문법 속으로 들어가 봅니다.
1486년 가을, 로마는 들끓었습니다. 스물네 살의 청년 피코가 입성하며 전 세계의 학자들에게 선전포고를 날렸기 때문입니다. 그는 종교, 철학, 마법을 아우르는 900가지 논제를 제시하며 "누구든 나와 토론하자. 비용은 내가 댄다"라는 파격적인 제안을 합니다.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와 플라톤을 넘어 히브리어 카발라, 아랍의 철학자 이븐 시나의 사상까지 하나로 엮으려 했습니다. 파편화된 지식들을 모아 하나의 보편적 진리를 구축하려 했던 겁니다.

피코의 대담한 시도는 당시 교회의 심기를 건드리기 충분했습니다. 모든 지식이 그리스도교라는 깔때기를 통과해야 했던 시대에, 그는 지식의 민주화 혹은 융합을 꿈꿨던 셈이니까요. 요즘으로 치면 구글과 위키피디아의 철학적 전신을 혼자서 설계하려 했던 것과 같습니다.
피코는 언어를 단순히 정보를 전달하는 매개체로 보지 않았습니다. 그는 특정 언어의 조합, 즉 운율과 하모니가 인간의 신경계를 직접 타격하는 물리적 에너지라고 믿었습니다. 저자는 피코가 주목한 운율과 소리의 힘을 다룹니다.
브라질 아마존의 샤먼들이 사용하는 마라카 소리나, 의미를 알 수 없는 흥얼거림이 어떻게 인간을 황홀경으로 인도하는지를 분석합니다. ASMR이나 수능 금지곡의 중독성을 500년 전에 이미 간파한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피코는 이를 천사들의 문법이라 명명했습니다. 개별적인 자아를 무너뜨리고, 인간을 집단적인 황홀경이나 신적인 차원으로 고양시키는 언어의 알고리즘을 찾아낸 것입니다.
저자는 라블레의 소설 속 인물 파뉘르주를 등장시킵니다. 파뉘르주가 말 대신 기괴한 몸짓과 알 수 없는 소리로 논쟁에서 승리하는 장면은 피코가 추구했던 논리를 초월한 언어의 힘에 대한 해학적 오마주입니다.
또한 피코가 사랑했던 오르페우스 신화는 언어가 죽음마저 되돌릴 수 있는 숭고한 도구임을 상징합니다. 하지만 이 숭고함은 위험한 이면을 지니고 있습니다. 만약 언어가 인간의 의지를 조종할 수 있다면, 인간에게 자유의지란 존재하는 것일까요?
"강력한 말의 운율과 하모니 때문에 듣는 사람이 선이나 악으로 인도될 수 있다면, 죄의 의미는 무엇이며 자유의지의 의미는 무엇인가?"라는 문장에서 우리는 소름 돋는 깨달음을 얻게 됩니다. 히틀러의 선동 연설부터 현대의 알고리즘 정치가까지 우리가 '선택'했다고 믿는 것들이 사실은 정교하게 설계된 '언어의 덫'일 수 있다는 경고 말입니다.

피코의 삶은 그 자체로 한 편의 비극적인 오페라였습니다. 메디치 가문의 여인과 야반도주를 감행했다가 붙잡히고, 교황청의 청문회에서 이단으로 몰려 도망자가 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결국 1494년 서른한 살이라는 이른 나이에 독살설을 뒤로하고 세상을 떠납니다. 그의 죽음은 단순히 한 천재의 소멸이 아니라, 모든 지식을 통합하려 했던 르네상스적 낙관주의의 종말을 의미했습니다.
우리는 지금 개인이 파편화된 시대에 살고 있지만, 동시에 SNS와 네트워크를 통해 초유기체처럼 연결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흐르는 수많은 텍스트와 밈들은 현대판 천사들의 문법입니다.
누군가의 말 한마디에 집단적으로 분노하고, 정체 모를 유행어에 매료됩니다. 피코가 경고하고 동경했던 '홀리는 힘'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다만 그 형태가 디지털 비트로 바뀌었을 뿐입니다.
『천사들의 문법』은 우리에게 묻습니다. 당신은 당신의 언어를 직접 쓰고 있습니까, 아니면 타인이 짜놓은 문법 안에서 춤추고 있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