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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 킷사텐 도감 - 건축가의 눈으로 바라본 도쿄 낭만 레트로 카페
엔야 호나미 지음, 서하나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6년 1월
평점 :

*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았습니다
디지털 기술이 우리의 모든 감각을 가상 세계로 이끄는 시대일수록 우리는 더욱 절실하게 물질성을 갈구합니다. 여기, 평범한 여행자와는 전혀 다른 시선으로 도쿄의 오래된 골목을 누비는 한 인물이 있습니다. 건축가 엔야 호나미입니다.
전작 《목욕탕 도감》으로 공간 기록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던 저자가 이번에는 도쿄의 영혼이라 불리는 킷사텐으로 발길을 옮겼습니다. 엔야 호나미의 『도쿄 킷사텐 도감』이 던지는 건축적 위로를 만나보세요.
이 책은 단순한 킷사텐 가이드북이 아닙니다. 킷사텐이라는 소우주를 관찰하며 기록한 공간의 인류학이자, 잊혀가는 레트로의 가치를 복원하는 보고서입니다.
아이소메트릭(Isometric)이라 불리는 투시도법을 활용해, 지붕을 걷어내고 공간의 오장육부를 들여다보듯 세밀하게 기록합니다. 줄자와 레이저 측정기로 실측한 데이터 위에, 600개가 넘는 커피잔의 배치와 벽면에 남은 손자국까지 수채화로 입혀냅니다.
엔야 호나미가 선정한 18곳의 킷사텐. 킷사텐은 한국의 카페와는 그 결이 다릅니다. 프랜차이즈 카페나 인스타 감성의 세련된 카페를 상상하신다면 킷사텐의 문을 열었을 때 조금 당황하실 수도 있어요.

테이크아웃이나 빠른 회전율을 중시하지 않고 시간을 박제해둔 공간과도 같습니다. 엔야 호나미가 실측한 도면들을 보면 유독 깊게 패인 소파와 낮은 조도가 강조됩니다. 한 번 앉으면 신문을 읽거나 책을 보며 아주 오래 머물러도 눈치 주지 않는 문화를 상징합니다.
게다가 수십 년 전의 인테리어와 소품을 그대로 유지하는 것을 최고의 가치로 여깁니다. 한국의 카페가 새로운 경험을 판다면, 킷사텐은 변하지 않는 안도감을 파는 셈입니다. 힙지로의 힙한 감각과는 또 다른 느낌입니다. 킷사텐은 누군가 기획해서 만든 빈티지가 아니라, 수십 년간 주인이 그 자리를 지키며 자연스럽게 낡아간 곳입니다.
킷사텐은 오래되었기 때문에 가치 있는 것이 아니라, 오랜 시간 사용되며 조정된 결과라는 점에서 의미를 지닙니다. 엔야 호나미는 그 조정의 흔적을 기록합니다. 벽의 두께, 가구의 배치, 카운터 안쪽의 동선까지 공간이 살아온 시간을 해부하듯 펼쳐 보입니다.
먼저 우리는 시간이 멈춘 듯한 혹은 시간이 아주 우아하게 흐르는 장소들을 만납니다. 엔야 호나미는 니시오기쿠보의 '소레이유'나 진보초의 '라도리오' 같은 곳을 조명하며, 이곳들이 어떻게 수십 년의 세월을 견디며 손님들의 아지트가 되었는지 분석합니다.
일본에서 비엔나커피를 처음 소개한 진보초의 '라도리오'. 창업 당시 단골이었던 도쿄대학교의 교수가 오스트리아 빈에서 생크림이 가득 올라간 맛있는 커피를 마셨다는 이야기를 듣고 탄생했습니다.
시부야의 '찻집 하토' 편에서는 공간의 생명력이 사람과 사물의 상호작용에서 나옴을 강조합니다. 찻잔은 계절이나 혹은 방문한 손님의 복장, 분위기에 맞추어 고른다고 합니다. 여럿이서 같이 왔다면 한 테이블에 비슷한 잔이 놓이지 않도록 신경을 쓴다고도 합니다.
엔야 호나미는 이 수많은 잔들을 하나하나 정성껏 그려 넣으며, 킷사텐이 지닌 매력의 핵심은 결국 나를 알아봐 주는 공간이라는 정서적 유대감에 있음을 짚어줍니다.
글을 먼저 읽어도 되고, 그림부터 펼쳐도 됩니다. 공간의 구조와 분위기를 동시에 전달하는 이 시점 덕분에 마치 천장에서 내려다보며 가게 전체를 천천히 훑는 기분을 느끼게 됩니다.
다음으로 킷사텐의 화려함에 주목합니다. 일본의 킷사텐은 때로 귀족의 응접실 같기도 하고, 화려한 연회장 같기도 합니다. 우에노의 '갤랑'이나 '고조'가 그렇습니다.
엔야 호나미는 이 호화찬란함이야말로 전후 일본 사람들이 일상의 고단함을 잊기 위해 갈구했던 꿈의 공간이었음을 꿰뚫어 봅니다. 대리석 벽과 청동 조각은 과시를 위한 수단이 아니라, 커피 한 잔의 가격으로 누구나 잠시나마 귀족이 될 수 있게 배려한 주인의 환대였던 셈입니다.

책 중간중간 삽입된 칼럼들도 놓칠 수 없습니다. 킷사텐 인테리어 즐기기는 공간을 관찰하는 법을 알려주는 일종의 감상 가이드입니다. 조명의 높이, 의자의 깊이, 테이블 간 거리 같은 요소들이 어떻게 공간의 분위기를 결정하는지 설명합니다.
건축가의 눈으로 재구성한 시간의 지층, 도쿄 킷사텐에서 공간 독해법을 배우게 됩니다. 공간을 소비가 아닌 이해의 대상으로 바라보는 시선, 일상의 장소를 새롭게 읽는 감각을 기를 수 있습니다.
공간은 시각적인 요소로만 완성되지 않습니다. 엔야 호나미는 청각이 공간의 구조를 어떻게 규정하는지 탐구합니다. 시부야의 전설적인 공간 '명곡 킷사 라이온'이나 아사가야의 '비올론' 같은 곳은 커피를 파는 곳이라기보다, 소리를 감상하기 위한 거대한 울림통에 가깝습니다.
소리가 공간 전체를 어떻게 휘감고 도는지 구현합니다. 음악을 듣기 위해 배치된 좌석들의 방향, 소리의 회절을 고려한 천장의 높이 등은 건축학적 지식 없이는 포착하기 힘든 디테일입니다. 커피 향기만큼이나 짙은 소리의 질감을 엿볼 수 있는 묘사가 압권입니다. 공간이 곧 악기가 되는 순간입니다.
마지막으로 운영자의 고집과 철학이 응축된, 그야말로 유일무이한 공간들을 다룹니다. 진보초의 '사보우루'나 아사가야의 '기온'은 주인의 독특한 취향이 공간의 물리적 한계를 어떻게 뛰어넘는지를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책을 느긋하게 읽을 수 있는 킷사텐을 만들고 싶다는 마음으로 탄생한 '기온'. 300곳의 킷사텐을 탐방한 주인의 노력이 깃든 의자의 각도, 독서에 최적화된 조도의 설정 등을 분석하며, 좋은 공간은 결코 우연히 만들어지지 않는다는 진리를 전합니다.
『도쿄 킷사텐 도감』은 도쿄라는 거대 도시가 품어온 기억의 보관소이며, 관찰자가 남긴 사랑의 기록입니다. 사라져가는 것들에 대한 경의의 표시이기도 합니다. 덕분에 공간이 들려주는 수많은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법을 배웁니다. 결코 변하지 않는 가치가 무엇인지 엔야 호나미의 따뜻한 도면이 말해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