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 미래 과학 트렌드 - 한 권으로 따라잡는 오늘의 과학, 내일의 기술
국립과천과학관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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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았습니다


AI부터 블랙홀까지, 국립과천과학관이 던진 2026년의 질문들 『2026 미래 과학 트렌드』. 전망서의 외피를 두르고 있지만, 우리는 이 기술을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지는 책입니다.


전시와 교육, 체험을 통해 과학을 설명해 온 국립과천과학관 소속 생명과학자·천문학자·공학자·과학교육자·과학사 연구자 등 25인이 공동으로 집필했습니다. 연구실과 전시관, 정책 현장과 교육 현장이 한 권의 책 안에서 함께 담겼습니다.


과학을 성과로 요약하지 않고, 과학이 작동하는 맥락을 드러냅니다. 기술의 속도보다 선택의 무게를, 발견의 결과보다 과정의 윤리를 더 자주 이야기하는 과학 트렌드 책입니다.


생명과학 파트는 저속노화라는 키워드를 선보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노화는 미용 산업이 소비해 온 표피적 개념이 아닙니다. 생명체 내부에서 작동하는 시간의 질서, 즉 생체 시계에 대한 근본적인 탐구에 가깝습니다. 식물과 인간의 생체 시계 메커니즘은 매우 유사하게 24시간 주기의 생리 리듬을 조절하며, 수면·성장·노화까지 깊숙이 관련되어 있다고 합니다.





노화를 개인의 생활 습관이나 유전적 운명으로 축소하지 않습니다. 식물 연구에서 출발한 생체 리듬 연구가 인간의 노화 이해를 어떻게 확장시키는지를 보여줍니다. 여기서 과학은 젊음을 유지하는 비법을 제공하지 않습니다. 대신 생명체가 시간을 견디는 방식에 대한 통찰을 짚어줍니다.


이어지는 인공 혈액, 종자 보존, 기생벌 연구 역시 같은 맥락에 놓여 있습니다. 생명과학은 생명을 연장하는 기술이 아니라, 생명이 지속될 조건을 탐색하는 학문이라는 점을 분명히 합니다. 특히 노르웨이 스발바르 시드볼트와 연결되는 종자 보존 이야기는 기후위기 시대에 생명 보존이 곧 정치와 윤리의 문제임을 자연스럽게 환기합니다.


화학 파트는 기후위기 담론에서 자주 간과되는 질문을 다룹니다. 왜 우리는 아무리 분리배출을 해도 한계를 느끼는가라는 질문입니다. 개인의 윤리 대신 기술 시스템의 구조적 전환에 초점을 맞춥니다.


플라스마 전환 공정이라는 생소한 기술이 소개되지만, 중요한 것은 이 기술이 분리배출을 잘하자는 도덕적 구호를 넘어, 산업 구조 자체를 바꾸려는 시도라는 점입니다. 희토류, 수소에너지 이야기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원은 기술의 문제가 아니라 국제 정치, 지역 공동체, 정책 선택과 얽혀 있다는 점을 드러냅니다. 화학이 산업의 언어로만 존재하던 시대는 이미 끝났습니다.


지구과학 장에서 가장 눈에 띄는 키워드는 AI이지만, 이 장의 진짜 주제는 시간입니다. 인공지능은 화석의 형태, 색, 입자 크기, 화학 성분의 패턴을 스스로 분류하며 지층의 시간을 읽어낸다고 합니다. 지질학의 변화를 함축적으로 보여줍니다. 과거의 지질학자가 망치와 루페로 시간을 추적했다면, 이제는 알고리즘이 그 역할을 이어받습니다. 물론 AI가 읽어낸 시간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여전히 인간의 몫임을 강조합니다.


고층 목조 건축, 탄소 순환, 구름 관찰에 이르기까지 지구를 관리 대상이 아닌 해석 대상으로 바라보게 합니다. 기후위기를 둘러싼 진영 논리를 벗어나, 과학적 데이터가 어떻게 사회적 합의로 이어질 수 있는지 고민하는 태도가 인상 깊었습니다.


우주과학 파트는 감탄과 압도감으로 가득합니다. 루빈 천문대는 날마다 우주를 관측하며 20테라바이트의 데이터를 생성한다고 합니다. 우주는 읽히고, 분류되고, 예측됩니다. 중간질량블랙홀, 제임스웹 우주망원경의 최신 성과들은 인간 인식의 경계를 어디까지 확장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이 방대한 데이터 속에서 우리는 무엇을 찾고 싶은가를 묻습니다. 질문 없는 관측은 의미를 잃는다는 사실을, 우주과학이라는 가장 거대한 학문을 통해 역설적으로 드러냅니다.


과학기술 파트에서는 챗GPT를 비롯해 초지능, 피지컬 AI, 휴머노이드 이야기에 관한 이야기가 흥미롭습니다. 인공지능이 왜 지금의 위치에 이르렀는지, 과거의 실패와 컴퓨팅 자원의 한계까지 짚으며 설명합니다. 핵심은 기술의 속도가 아니라, 기술과 인간의 관계 설정이라는 것을 일깨워 줍니다.


AI가 물리학 연구자들에게 선택이 아닌 필수가 되었음을 역설하기도 합니다. AI를 통해 연구 설계와 복잡한 모델링이 자동화되면서, 물리학 연구는 비로소 근본적인 혁신을 이루고 있습니다. 이러한 변화에 맞춰 물리학과 AI를 능숙하게 다룰 융합 연구자의 필요성을 강조하며, 과학을 꿈꾸는 학생들에게 새로운 학문적 길을 보여줍니다.





매년 큰 기대를 모으는 2025 노벨상 특강 해설도 수록되어 있습니다. 물리학상, 생리의학상, 화학상의 수상 업적에 대한 배경 지식을 쉽게 풀어주는 것은 물론, 특별히 이번 편에서는 과학이 산업 현장과 맞닿아 경제 성장을 이끌어내는 과정을 담은 노벨경제학상 해설을 추가했습니다. 과학과 산업, 시장의 연결 지점을 보여줍니다. 


『2026 미래 과학 트렌드』는 과학사의 큰 흐름을 훑으며 우리가 선택해온 과학기술의 진화 양상을 들려주고, 심지어 일제강점기 과학기술자들의 독립운동과 같은 역사적 사실까지 꼼꼼하게 조명하고 있어 매력적입니다. 과학이 사회와 어떻게 공진화해왔는지 다채로운 방식으로 만나게 됩니다.


미래 과학을 안다는 건, 기술이 아니라 선택을 읽는 일이라는 것을 일깨워 줍니다. 국립과천과학관 연구진이 그려낸 과학의 풍경을 만나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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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지능의 역사 - 유레카부터 인공지능까지, 지성사를 통해 인간을 다시 묻다
이은수 지음 / 문학동네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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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았습니다


이은수 교수의 『인간지능의 역사』는 AI가 인간을 대체할 것인가라는 인공지능을 둘러싼 불안에서 출발하지 않습니다. 대신 질문의 방향을 비틀어 보여줍니다. 우리는 과연 인간지능(Human Intelligence)을 제대로 이해해온 적이 있는가라는 질문으로요. 이 책은 고대 그리스에서 현대 인공지능에 이르기까지 인간이 지식을 발견하고, 수집하고, 읽고 쓰며, 소통해온 방식을 지성사적으로 추적하며 인간지능의 정체를 다시 묻습니다.


저자 이은수 교수는 서울대학교 철학과 조교수이자 서울대 AI연구원 인공지능 디지털인문학센터장으로, 수학·고전학·과학사·디지털인문학을 가로지르는 이력을 지닌 연구자입니다. 이 책은 그 학문적 궤적이 집약된 결과물입니다. 고전을 읽는 눈과 최첨단 기술을 해석하는 감각이 긴밀하게 엮여 촘촘한 지성 지도로 완성되었습니다.


1부에서는 인간지능의 출발점을 '발견'이라는 행위에 둡니다. 아르키메데스의 유레카!가 상징하듯, 발견은 계산의 결과가 아니라 직관과 감동 그리고 의미 부여가 결합된 사건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의미를 부여하는 주체입니다. AI 역시 방대한 데이터를 분석해 인간이 예측하지 못한 패턴을 발견합니다. 그러나 그 패턴이 왜 중요한지, 어떤 세계관을 흔드는지, 윤리적 책임은 어디에 있는지 묻지는 않습니다.





갈릴레오가 망원경으로 달의 표면을 보았을 때, 훅이 현미경 속 코르크 구조에 세포라는 이름을 붙였을 때, 발견은 비로소 인간의 이야기가 되었습니다. 저자는 이 지점에서 발견의 핵심은 속도가 아니라 해석이며, 기술은 발견의 도구일 뿐 서사의 주체가 될 수 없음을 분명히 합니다.


2부는 '수집'이라는 행위를 통해 인간지능의 생존 본능을 조명합니다. 지식의 수집 역사는 인류 문명 발전의 핵심 동력이었습니다.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에서 근대의 백과사전 그리고 오늘날의 위키피디아와 AI 큐레이션까지 인간은 늘 세상을 이해하기 위해 지식을 모아왔습니다.


디지털 시대에 들어 지식은 더 이상 부족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넘쳐흐릅니다. 문제는 무엇을 모을 것인가가 아니라 어떻게 가려낼 것인가로 이동했습니다. 저자는 이 혼돈 속에서 지식 큐레이션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방대한 정보 속에서 가치를 가려내고 지식의 미래를 설계하는 능력이 바로 AI 시대의 핵심 인간지능입니다.


이 맥락에서 개인 주도적 큐레이션 활동을 잘 보여주는 '디지털 정원' 개념이 인상 깊었습니다. 디지털 정원은 아이디어가 씨앗처럼 뿌려지고, 시간이 흐르면서 자라나며, 자연스럽게 가지를 뻗어 다른 생각들과 연결되는 유기적인 과정을 중시한다고 합니다.


이는 완성된 결과물 중심의 지식관을 뒤흔듭니다. 완벽한 결과물보다 지속적인 배움과 생각의 변화 과정을 기록하는 디지털 정원사의 자세를 짚어줍니다. 지식을 소유물이 아니라 돌봄의 대상으로 바라보는 관점입니다. AI가 자동으로 추천해 주는 정보에 의존하기보다, 인간은 스스로의 지적 정원을 가꾸는 설계자가 되어야 한다는 메시지가 묵직하게 다가옵니다.


3부는 AI가 글을 쓰는 시대에 읽기와 쓰기는 여전히 인간의 고유한 영역일 수 있는가에 대해 풀어갑니다. 쐐기문자에서 인쇄술 그리고 디지털 텍스트로 이어지는 역사를 통해, 읽기와 쓰기의 본질은 기술이 아니라 맥락을 체화하는 능력에 있음을 짚어줍니다.





AI는 글쓰기, 요약, 번역, 심층 분석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지적 활동을 보조하고 때로는 주도하며 읽기와 쓰기의 풍경의 바꾸고 있지만, 인간이 문학을 읽으며 느끼는 아이러니, 시간의 겹, 실존적 불안은 통계적 언어 모델로 환원되지 않습니다. 코덱스가 여백을 만들어 지식 생산을 공동체적 행위로 바꾸었듯, AI는 오히려 인간 읽기의 깊이를 더 분명히 드러내는 거울이 됩니다.


4부는 소통의 문제를 다룹니다. 고대 아고라의 토론, 중세 수도사의 필사, 근대 지식인의 편지공화국을 거쳐 오늘날의 디지털 플랫폼까지 소통은 언제나 인간지능의 확장이었습니다. 그러나 AI와의 대화는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AI에게는 우리 인간처럼 말을 이끌어내는 진정한 속마음, 즉 의도나 목적의식이 없다는 점을 짚어줍니다. AI는 이해하지 않고, 의도하지 않습니다. 그 매끄러운 문장 뒤에는 책임도, 공감도 없습니다.


저자는 이 점을 강조하며 AI와의 소통이 인간적 관계를 대체할 수 없음을 이야기합니다. 동시에, 그렇기 때문에 인간의 공감 능력과 윤리적 판단은 더욱 중요해진다고 말합니다.


마지막 5부는 『인간지능의 역사』의 사상적 핵심입니다. 앞선 네 가지 행위를 통해 살펴본 인간지능의 본질을 바탕으로 AI 시대의 지성, 지식, 인간의 개념을 새롭게 정립합니다. 목격을 넘어서 설계자로, AI와 적극적으로 협력하는 창발적인 역동적 지성으로, 인간과 기술은 경쟁 관계가 아니라 공진화 관계라는 것을 일깨워 줍니다.


『인간지능의 역사』는 인간지능은 고정된 능력이 아니라, 설계하고 연결하고 협력하는 과정적 현상이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인간의 강점은 완전함이 아니라 불완전함 속에서 질문을 멈추지 않는 데 있습니다. AI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필요한 건 인간지능의 긴 역사를 돌아보며 우리가 무엇을 잃고 얻어왔는지, 무엇을 지키고 버려야 하는지 성찰하는 것입니다. 


『인간지능의 역사』는 AI 담론에서 흔히 보이는 공포 마케팅도, 낙관적 기술 예찬도 택하지 않습니다. 대신 긴 호흡의 역사 속으로 우리를 데려가, 인간이 늘 기술 앞에서 어떻게 자신을 재정의해왔는지를 보여줍니다. 읽다 보면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오래된 질문이 AI 앞에서 어떻게 새로워지는지, 그리고 우리가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 명확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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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을 읽는 그림 - 수천 년 세계사를 담은 기록의 그림들
김선지 지음 / 블랙피쉬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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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협찬 


그림은 감상의 대상이 아니라

시간을 저장한 기록입니다.


『시간을 읽는 그림』은

역사와 미술을 하나의 창으로 겹쳐 보여주는 책입니다.


그림을 통해 수천 년 세계사의 결정적 순간을

직접 읽는 경험을 선사합니다.





그림은 정보이며,

당대의 제도·욕망·공포·권력을 압축한

시각적 사료라는 태도가 책 전반을 관통합니다.


거장의 명화뿐 아니라

신문 삽화, 벽화, 포스터, 풍자만화까지

당대의 진실에 가까운 이미지들이 중심입니다.


흑사병 시대의 채찍질 고행단,

르네상스 뒤편의 세속적 욕망,

프랑스 혁명의 격랑,

대항해 시대의 약탈과 폭력.

정사(正史)가 말하지 않던 장면들이

이미지 속에서 또렷해집니다.





근대로 오면

자본주의와 제국주의,

전쟁과 빈곤,

과학의 진보와 윤리의 균열이

한 점의 그림 안에서 충돌합니다.

그리고 현대에 이르러

획일화된 대중 사회와 존재론적 위기까지

사유하게 만듭니다.


열 마디 설명보다 강력한 한 이미지가

시대를 어떻게 증언하는지 보여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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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지유신 - 일본의 퀀텀점프 이야기
박경민 지음 / 밥북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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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서를 제공받았습니다


한국과 일본의 근대사가 현대까지 미치는 영향을 제대로 알고자 오랜 시간 연구를 거듭하며 <한일 근대인물 기행> 등 다수의 저서를 펴낸 한일 근대사 전문가 박경민 저자의 신작 『메이지 유신』.


1853년 미국의 페리 함대가 에도만(현 도쿄만)에 출현한 순간부터 약 40년간 일본을 휘몰아친 전 분야에 걸친 대변혁, 즉 메이지 유신의 전모를 알파부터 오메가까지 해부한 역작입니다.


메이지 유신을 둘러싼 정치, 외교, 군사, 경제, 교육, 사회 등 모든 영역에서의 급격한 근대화 과정을 입체적이고 시각적으로 조명합니다. 메이지유신을 알려면 이 책만 읽으면 된다는 평가를 목표로 쓴 책이라고 고백합니다.


일본인들의 이름을 최소화하여 스토리 전개의 가독성을 높여 술술 읽어내려갈 수 있습니다. 전문서 같은 깊이와 대중서의 가독성을 겸비한 이 책은 270년간 평화롭게 유지되던 에도 막부가 어떻게 종말을 고하고, 일본이 단기간에 신흥 패권국으로 퀀텀점프하게 된 배경과 이유를 추적합니다.





메이지 유신의 성공 요인을 제대로 파악하려면 전 시대인 에도 막부의 통치 체제와 모순을 이해하는 것이 필수적입니다. 저자는 서장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세운 에도 막부(1603~1867)가 앞선 두 번의 막부(가마쿠라 막부, 무로마치 막부)와 달리 어떻게 260여 년간 안정된 평화를 누릴 수 있었는지에 집중합니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고 시대가 바뀌면서 이 완벽하게 설계되었던 봉건 체제는 오히려 현실에 맞지 않는 불합리성과 모순을 노출하게 됩니다. 저자는 에도 막부의 통치 체제가 태생적으로 안고 있던 구조적 취약성에 주목합니다. 수백 년간 지속된 평화는 역설적으로 서양 세력이라는 외부 충격에 매우 취약한 구조를 만들었고, 이 허점을 메이지 유신 주도 세력이 파고들게 됩니다.


결국 구체제의 단단한 껍데기를 깨고 근대화를 성취하는 데는 서양 세력의 충격에도 땅속 깊이 뿌리내린 조선의 왕조 체제보다 쇼군이 천황에게 권력을 잠시 맡겨두었다는 인식이 지배적인 막부 체제가 훨씬 유리했다는 분석이 흥미로웠습니다.


1853년 페리 함대의 내항과 개항은 270년 평화 체제의 방파제를 무너뜨린 파국적 사건이었습니다. 책 초반에는 소용돌이 속의 막부와 웅번들의 서구 따라잡기 경쟁에 대해 짚어줍니다. 막부와 반막부 세력 모두가 서구 문물과 정보에 대한 갈증이 컸고, 경쟁적으로 사절단과 유학생을 파견하며 근대화 시간을 단축했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특히 서구 사절단에 참여해 충격을 받은 후 일본 최고의 계몽사상가로 우뚝 선 후쿠자와 유키치와 그의 저서 <서양사정(西洋事情)>을 다룹니다. 1866년에 발간한 이 책에서 유럽과 미국의 정치, 조세, 국채, 회사, 외교, 군사, 교육, 신문 등 서양의 문물과 제도를 소개하여 지식층에게 폭발적인 영향을 미쳤습니다. 일본이 나아가야 할 근대국가의 청사진을 제시하며 유신의 사상적 토대를 제공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유신을 주도한 삿초도히(사쓰마, 조슈, 도사, 히젠) 네 웅번들의 경쟁과 연합 과정은 역동적입니다. 조슈번이 고난을 겪다가 기사회생하는 극적인 이야기와, 사카모토 료마 등의 활약으로 삿초동맹이 성사되고 마침내 막부의 시대가 종언을 고하는 과정은 마치 한 편의 영화처럼 전개됩니다. 복잡한 과정이 저자의 설명 덕분에 흐름이 또렷해집니다.





메이지 유신의 성공은 봉건 체제의 해체와 근대국가 건설이라는 두 가지 임무를 동시에 완수한 위로부터의 혁명이었습니다. 왕정복고 쿠데타를 통해 신정부를 수립한 유신 주도 세력은 근대국가의 방향타를 제시하는 5개조 서문을 대내외에 천명합니다.


이 5개조 서문을 바탕으로 신정부는 정치 체제의 대변혁을 시작했고, 수백 년간 이어진 다이묘의 세습 직위와 영지 통치권을 천황에게 귀속시킴으로써 봉건제를 최종적으로 해체했습니다. 이는 중앙 정부에 직속 군대가 없는 상황에서 강력한 군사력을 가진 번(藩)들을 해체하는 매우 위험하고도 혁명적인 결단이었습니다.


또한, 저자는 이와쿠라 사절단의 파견과 그들이 귀국 후 각 분야에서 일본 근대화에 중요한 역할을 했던 사례를 통해 일본의 학습 능력을 보여줍니다. 사절단 파견은 서구 문물 견학을 넘어, 학제·징병제와 태양력 실시를 비롯해 핵심 근대화 정책의 기초를 닦았습니다.


1871년 단발령과 양복의 보급, 천황이 직접 육식을 권장하여 식생활을 바꾼 사례, 서양식 건물로 조성된 도쿄 긴자 거리, 그리고 1877년 전화 개통 등 구체적인 예시들은 일본 사회가 얼마나 급진적으로 서구화되었는지를 생생하게 보여줍니다.


마지막으로, 정한론(征韓論)에 대한 분석은 한국인에게 중요한 통찰을 안겨줍니다. 정한론 논쟁이 '메이지 6년의 정변'으로 불리는 정치사의 대변혁으로 귀결되어 강경파가 실각하게 된 과정을 다루며, 메이지 신정부의 외교가 단순한 정복욕을 넘어 근대적 외교관계를 수립하고자 했다는 맥락을 짚어줍니다.


메이지 유신은 피를 보지 않은 명예혁명이라고 불리기도 하지만, 실제로는 사족들의 반란과 저항이 격렬했던 시기를 거쳤다고 합니다. 보신전쟁(戊辰戦争), 세이난 전쟁(西南戦争) 등 신정부에 대한 반동과 저항의 역사가 이어집니다.





여기서 저자가 짚어주는 핵심은 유신 주도 세력의 포용성입니다. 신정부는 보신전쟁에서 패배한 막부 측 인재들을 숙청하는 대신, 능력이 뛰어난 인재들에게는 중요 직책을 맡겨 신정부 건설에 동참하게 했습니다. 메이지 정부 발전의 결정적인 동력이었습니다.


포용성을 바탕으로 메이지 정부가 근대국가로서 완성되어 가는 과정을 보여줍니다. 자유민권운동의 발전이 헌법 준비와 내각제 창설이라는 결실을 맺고, 마침내 대일본제국 헌법 제정과 국회 개원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과정은 서구 근대국가의 틀을 단기간에 구축했음을 의미합니다.


또한 메이지 정부의 숙원이었던 불평등조약 개정과 교육제도 및 징병제의 정착은 일본이 서구 열강과 대등한 위치에 서기 위한 마지막 단계를 완성했음을 보여줍니다.


이 책은 메이지 유신을 다룬 기존의 역사서가 정치·행정적인 제도 개혁을 나열하는 데 그쳤던 한계를 뛰어넘습니다. 박경민 저자는 유신 정책을 추진하는 주도 세력의 입장은 물론, 이에 반발하고 동참하는 국민(사무라이 포함)의 시각에서 이 거대한 역사의 회오리를 입체적으로 재구성했습니다.


『메이지유신』은 변화에 실패한 체제의 조건과 변화에 성공한 사회의 내부 논리를 대비합니다. 특히 한일 근대사를 비교하는 통찰과 인재에 대한 유신 정부의 과감한 포용성을 부각한 관점은 메이지 유신의 성공을 특정 집단의 영웅 놀이가 아닌 국가 시스템의 혁신으로 바라보게 합니다. 봉건에서 근대로 40년, 일본의 모든 혁신 DNA가 이 한 권에 담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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꽁꽁 얼어붙은 한강 위로 고양이가 걸어갑니다 - 김주하 앵커가 단단한 목소리로 전하는 위로
김주하 지음 / 매일경제신문사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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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시간 메인 뉴스를 책임지며 공적 언어의 기준을 보여주었던 김주하 앵커. 『꽁꽁 얼어붙은 한강 위로 고양이가 걸어갑니다』에서는 우리가 알던 김주하의 바깥이 아니라, 그 안쪽에서 울려 나온 기록입니다. 차분하고 정확한 발성 이면에 흔들렸던 숨의 리듬을 글자로 옮긴 에세이입니다.


이 책의 출발점은 목소리입니다. 목소리는 김주하에게 재능이기 이전에 질문이었고, 가능성이기 이전에 결핍이었습니다.


“아니 김주하 씨는 자기 목소리를 모르는 겁니까?”라는 말은 면접 탈락의 이유를 넘어섭니다. 자신의 핵심 자질이 부정당하는 순간의 충격, 그리고 그 충격이 이후 삶 전체를 관통하는 방식이 묘사됩니다.





김주하 앵커는 이 경험을 극복 서사로 소비하지 않습니다. 목소리는 훈련으로 다듬을 수 있었지만, 내가 나를 모른다는 질문은 오랫동안 남았기 때문입니다. 꿈을 향한 직선 코스가 아니라, 자신에 대한 오해를 하나씩 해체해가는 과정이 돋보입니다.


최초의 여성 앵커 서사는 성취의 하이라이트로 그려지지만, 김주하 앵커의 이야기에서는 유리 천장은 깨지는 대상이기보다, 매일 부딪히며 자신의 자세를 점검해야 하는 벽에 가깝게 묘사됩니다.


여자 아나운서라는 이름이 기대와 제한을 동시에 부여하던 시절, 저자는 기술보다 태도를 선택합니다. 뉴스의 형식을 바꾸고, 편집자의 관점을 익히며, 줏대라는 원칙을 스스로에게 엄격하게 적용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줏대는 고집이 아니라, 흔들림 속에서도 선을 넘지 않는 직업윤리입니다. 알고리즘보다 양심을 앞세운 선택이었습니다.


찬란한 행복의 정점에서 세상은 송두리째 무너져 내렸고…라는 문장은 완벽한 삶의 신기루를 보여줍니다. 가장 읽기 힘들지만, 동시에 가장 멈출 수 없는 부분입니다. 사회적으로 완성된 삶처럼 보였던 결혼과 가정이 실은 거대한 기만 위에 세워져 있었다는 고백은, 개인사를 넘어서 성공한 여성이라는 이미지가 얼마나 허약한 균형 위에 놓여 있는지를 드러냅니다.


특히 헛똑똑이라는 자기 규정입니다. 세상의 진실을 전하던 앵커가 자신의 삶에서 가장 치명적인 거짓을 알아채지 못했다는 자책은, 지성과 통찰이 사적 영역에서는 왜 무력해질 수 있는지를 질문하게 만듭니다.


가정폭력, 배신, 법정 투쟁이라는 소재는 자극적으로 흐르기 쉽지만, 김주하의 문장은 절제되어 있습니다. 아빠가 엄마도 못 때리고? 아빠랑 같이 안 살아도 되는 거야? 라고 말한 아이의 말은 어떤 판결보다 무겁습니다. 참는 것이 반드시 보호가 되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다시 배우게 됩니다. 침묵의 비용은 아이에게 전가된다는 것을 감정 과잉 없이 짚어냅니다.


고통은 사라지지 않았지만, 방향을 바꿉니다. 개인의 생존 투쟁이 사회적 공감의 감각으로 전화되는 순간입니다. 김주하는 더 이상 피해자의 자리에 머물지 않습니다. 대신 자신이 겪은 결핍을 해석할 언어를 획득합니다. 상처가 경력이 되고, 고립이 연결의 자원이 되는 과정이 펼쳐집니다.





제목 『꽁꽁 얼어붙은 한강 위로 고양이가 걸어갑니다』는 인터넷 밈에서 출발합니다. 2021년 MBN 뉴스7에서 한강 물도 곳곳이 꽁꽁 얼어붙었다는 김주하 앵커의 말로 시작했던 한파 관련 사고 뉴스 속에 이시열 기자의 꽁꽁 얼어붙은 한강 위로 고양이가 걸어다닙니다라는 장면이 들어가며 꽁냥이 밈이 탄생했습니다.


어찌보면 유쾌하게 소비된 밈이 이 책에서는 가장 무거운 은유가 됩니다. 위태롭게 보이는 얼음 위를 당당하게 걷는 고양이처럼 나아갔던 김주하 앵커. 자신의 고립 경험이 자립준비청년들을 이해하는 통로가 되었음을 고백합니다. 미끄러운 사회 위를 홀로 건너야 하는 그들에게 공감합니다. 밈은 웃고 지나갈 수 있지만, 현실은 책임을 요구합니다.


완벽이 아닌 온전함, AI 시대의 저널리즘, 공감의 윤리까지. 추상적이지 않습니다. 모두 한 사람의 몸을 통과해 나온 문장들이기 때문입니다. 앵커(Anchor)는 직업이 아니라 태도라는 것을 일깨워 줍니다. 누군가의 삶이 휩쓸리지 않도록 잠시 붙잡아주는 존재. 김주하는 이제 뉴스를 넘어, 그 역할을 확장합니다.


국민권익위원회 자립준비청년 명예멘토로 활동하며 실제로 그 약속을 지키고 있는 저자의 모습에서 우리는 개인의 아픔이 어떻게 사회적 실천으로 이어질 수 있는지 목격하게 됩니다.


'국민 앵커'라는 수식어 뒤에 가려진 김주하라는 개인의 삶에 대해 깊이 알지 못했습니다. MBC 아나운서로 입사해 여성 최초로 메이저 방송사의 메인 뉴스인 〈뉴스데스크〉를 단독 진행하며 한국 대표 앵커로 자리매김했고, 이후 MBN으로 이직해 10년간 메인 뉴스를 이끌어온 그녀의 커리어는 그야말로 성공의 상징처럼 보였습니다.


기자 시험 합격 후 보도국 기자로 활동하는 등 남성 중심의 언론계에서 최초와 최고의 타이틀을 스스로 쟁취해낸 노력은 수많은 직장인과 언론인의 귀감이 되기에 충분합니다. 하지만 이 책은 그 화려한 조명 뒤편에 숨겨져 있던,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했던 가장 깊고 어두운 고통의 기록을 펼쳐 보입니다.


자기 연민도, 영웅 서사도 없습니다. 상처를 해석하고 의미로 전환하는 지적 성실함이 있습니다. 그렇기에 이 책은 읽고 나서도 조용히 남습니다. 얼음 위를 걸었던 발자국처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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