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곡은 들리지 않는다
마루야마 마사키 지음, 최은지 옮김 / 황금가지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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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곡은 들리지 않는다>는 법정 수화 통역사 시리즈 중 세 번째 책입니다. 연작소설인 만큼 순서대로 읽어오면 좀더 깨알 재미를 느낄 수 있어요.


들리지 않는 부모에게서 태어난 아이를 코다(CODA)라고 부릅니다. 법정의 수화 통역사 시리즈의 주인공 아라이는 부모와 형이 모두 농인이지만, 아라이만 청인입니다. 


가족 모두가 선천적 농인인 데프 패밀리를 비롯해 중도 실청자, 난청자 등 다양한 농인을 등장시켜 그들 앞에 놓인 편견을 속속들이 드러낸 첫 번째 소설 <데프 보이스>. 그저 들리지 않는 사람들을 농인이라는 테두리 안에 묶어두고 편견 또는 오해한 채 바라보던 것들을 새롭게 배울 수 있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발달 장애 아동의 영역까지 들어가 소통으로서의 언어란 무엇인지 짚어준 <용의 귀를 너에게>. 농인에게도 다양한 사고방식으로 다양한 언어를 사용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농인이라면 구화법을 배워 청인의 말을 잘 알아듣기를 바라는 다수자의 입장을 꼬집기도 합니다. 그리고 신작 <통곡은 들리지 않는다>에서는 네 편의 주요 에피소드가 있지만 특히 주인공 아라이의 가족 성장 스토리가 인상 깊습니다.


전작에서 인연을 맺은 경찰관 미유키와 딸 미와와 새로운 가정을 이룬 아라이. 그 사이에 들리지 않는 아이 히토미의 탄생은 그들에게 또 다른 감정을 겪게 하는 계기가 됩니다. 첫째 딸 미와는 청각장애인 형제자매를 둔 사람을 일컫는 SODA로서 언니의 역할을 하게 되었고, CODA인 아라이 역시 농인의 부모로서 새로운 변화들을 경험합니다.


인공와우 수술을 포기하고 "나는 이 아이를 '농아'로서 키우겠습니다."라고 결심하기까지 아라이 가족의 고민은 무척 깊었습니다. <통곡은 들리지 않는다>는 흥미롭게도 6년의 세월을 담아냈습니다. 긴 세월 동안 첫째 딸은 초등학생에서 중학생이 되었고, 둘째 딸 히토미도 성장해 수화로 재잘거리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전작에 비해 긴 시간 흐름은 아라이 가족을 위해 설정하지 않았을까 싶더라고요. 들리지 않는 아이가 잘 성장하는 모습을 보고 싶은 게 당연하니까요.


<통곡은 들리지 않는다>는 의료, 복지, 노동 현장에서 겪는 농인의 현실을 보여줍니다. 청인 중심 사회에서 들리지 않는 사람들에게 강요된 불편함을 만나는 시간입니다. 청인이라면 평소 생각하지 못했을 것들이라 얼마나 편협하게 살고 있는지 반성하게 되기도 합니다.


범죄 신고 전화도 목소리를 제대로 낼 수 없으니 장난 전화로 판단해버리기 일쑤라고 합니다. 첫 번째 에피소드에서는 임신한 농인이 긴박한 상황에 처했을 때 농인 남편이 119 신고를 하지 못하는 상황을 보여줍니다. 소리 없는 외침만 가득한 절망의 순간을 그려내고 있습니다.


'안심할 수 없는 상황'이라는 말을 통역할 때는 '신중하게 + 필요가 있다'는 수화 표현으로 전달하는 아라이처럼 수화 통역이 단순히 단어를 일대일로 연결해 표현하는 게 아니라 농인의 사고방식으로 정확히 전달하려면 쉬운 일이 아니라는 걸 깨닫게 됩니다.


일본에서는 일본수화와 일본어대응수화로 구분해 사용하고, 상대의 입을 읽는 청각구화법도 있지만 이 모두가 교육을 제대로 받아야만 사용할 수 있습니다. 농인으로 연예인이 된 HAL의 이야기를 다룬 두 번째 에피소드에서는 이 사회가 바라는 모습으로만 있길 바라는 이기적인 현실을 이야기합니다. 구화법을 사용해 청인의 말을 척척 알아듣고, 수화를 할 때도 우아하게 표현하길 바라는 식으로 말이죠. HAL의 고민은 전작 <용의 귀를 너에게>에서 짚어준 소통의 의미를 다시 한번 깨닫게 합니다.


폐업한 여인숙에서 변사체로 발견된 신원불명 농인의 사연을 그린 세 번째 에피소드는 수화를 사용할 때 쾌활했던 사람이 사회에 나오고 나서 어떻게 변하는지 가슴 아픈 사연을 만나게 됩니다. 마지막 에피소드에서는 고용 차별로 회사를 고소한 농인의 민사재판을 다루며 흔히 약자를 위한 지원만으로 생각했던 장애인 고용에 대한 청인의 사고방식에 일침을 놓기도 합니다.


농인 세계를 알리려는 목소리는 세 권의 소설로 이야기해도 여전히 할 말이 많아 보입니다. 첫 책 <데프 보이스>를 쓸 때는 단 한 명의 농인 지인 없이 탄생했던 작품이었다는데 (사실 다들 깜짝 놀라는 게 작가가 농인도 코다도 아닌 청인이라는 것이지요) <통곡은 들리지 않는다>를 쓰면서는 수많은 도움을 받았다며 감사의 마음을 전하는 작가. 농인이 아니면서도 농인문화를 알리는데 탁월한 감수성과 능력을 가진 멋진 작가입니다. 


배려심을 가진다는 것과는 달리 실제 농인들의 불편함을 인지하는 수준은 낮다는 걸 소설을 읽을 때마다 깨닫게 됩니다. 들리지 않는 사람들의 인권에 대해 목소리를 높인 <통곡은 들리지 않는다>. 법정의 수화 통역사 시리즈가 앞으로도 나오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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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정의 수화 통역사 세트 - 전3권 - 데프 보이스 + 용의 귀를 너에게 + 통곡은 들리지 않는다
마루야마 마사키 지음, 최은지 옮김 / 황금가지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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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설지만 우리 주변의 삶이기도 한, 농인문화를 접할 수 있는 법정의 수화 통역사 시리즈. 2017년 마루야마 마사키 작가의 데뷔작 <데프 보이스>를 읽으며 청각장애인의 세계를 새롭게 바라본 계기가 되었습니다. 가슴 따스한 스토리 속에 사회 고발 주제를 담아 전개하는 방식이 큰 울림을 줍니다. 


들리지 않는 부모에게서 태어난 아이, 코다(CODA). 주인공 아라이는 부모와 형이 모두 농인이지만, 아라이만 청인입니다. 어린 시절 그는 가족의 통역사 역할을 하며 자랐습니다. 태어나자마자 자연스럽게 배운 수화를 사회생활에 사용하는 것이 뭐가 그렇게 불편할까 싶어 처음엔 이해가 되지 않았는데, 속 사정을 알게 되면 이쪽도 저쪽도 아닌 코다의 체성에 방황하는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데프 보이스>는 가족 모두가 선천적 농인인 데프 패밀리를 비롯해 중도 실청자, 난청자 등 다양한 농인을 등장시켜 그들 앞에 놓인 편견을 속속들이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저 들리지 않는 사람들을 농인이라는 테두리 안에 묶어두고 편견 또는 오해한 채 바라보던 것들을 새롭게 배울 수 있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용의 귀를 너에게>는 발달 장애 아동의 영역까지 들어가 소통으로서의 언어란 무엇인지 짚어줍니다. 이 소설을 통해서는 농인에게도 다양한 사고방식으로 다양한 언어를 사용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농인이라면 구화법을 배워 청인의 말을 잘 알아듣기를 바라는 다수자의 입장을 꼬집기도 합니다. 


신작 <통곡은 들리지 않는다>에서는 네 편의 주요 에피소드가 있지만 특히 주인공 아라이의 가족 성장 스토리가 인상 깊습니다. 전작에서 인연을 맺은 경찰관 미유키와 딸 미와와 새로운 가정을 이룬 아라이. 그 사이에 들리지 않는 아이 히토미의 탄생은 그들에게 또 다른 감정을 겪게 하는 계기가 됩니다. 첫째 딸 미와는 청각장애인 형제자매를 둔 사람을 일컫는 SODA로서 언니의 역할을 하게 되었고, CODA인 아라이 역시 농인의 부모로서 새로운 변화들을 경험합니다.


흥미롭게도 6년의 세월을 담아냈습니다. 긴 세월 동안 첫째 딸은 초등학생에서 중학생이 되었고, 둘째 딸 히토미도 성장해 수화로 재잘거리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전작에 비해 긴 시간 흐름은 아라이 가족을 위해 설정하지 않았을까 싶더라고요. 들리지 않는 아이가 잘 성장하는 모습을 보고 싶은 게 당연하니까요.


현실에선 코다의 위치가 농인 사회에서든 청인 사회에서든 경계에 걸친 모습을 볼 수 있었던 <데프 보이스>에서 우리 편이냐 적이냐 묻던 소녀의 물음에 아라이는 이제 답을 할 수 있을까요.


농인 세계를 알리려는 목소리는 세 권의 소설로 이야기해도 여전히 할 말이 많아 보입니다. 첫 책 <데프 보이스>를 쓸 때는 단 한 명의 농인 지인 없이 탄생했던 작품이었다는데 (사실 다들 깜짝 놀라는 게 작가가 농인도 코다도 아닌 청인이라는 것이지요) <통곡은 들리지 않는다>를 쓰면서는 수많은 도움을 받았다며 감사의 마음을 전하는 작가. 농인이 아니면서도 농인문화를 알리는데 탁월한 감수성과 능력을 가진 멋진 작가입니다. 


배려심을 가진다는 것과는 달리 실제 농인들의 불편함을 인지하는 수준은 낮다는 걸 소설을 읽을 때마다 깨닫게 됩니다. 들리지 않는 사람들의 인권에 대해 목소리를 높인 <통곡은 들리지 않는다>. 법정의 수화 통역사 시리즈가 앞으로도 나오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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뼈의 방 - 법의인류학자가 마주한 죽음 너머의 진실
리옌첸 지음, 정세경 옮김 / 현대지성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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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해외 현장에서 유골과 시체를 마주하고 신원을 찾는 일에 앞장서는 리옌첸 법의인류학자가 뼈에 새겨진 기억을 읽고 그들의 이야기를 전하는 <뼈의 방>. 


관계맺음엔 약하지만 전문분야에서의 능력은 뛰어났던 브레넌 박사가 등장하는 미드 <본즈>의 최애청자였던 저는 <뼈의 방>이 무척 흥미진진하게 다가왔습니다. <본즈>를 보면서 뼈에 대한 이야기에 푹 빠져들었던 기억이 납니다.


실제로 법의인류학자들에겐 특별한 보물 공간인 '뼈의 방'이 있다고 합니다. 기증받은 유골을 모아둔 곳입니다. 신원을 알 수 없거나 가족이 인수하지 않으려 하는 시신 혹은 단체에서 연구 용도로 기증한 시체의 유골들입니다.


미국 국경을 넘다가 사막에서 실종된 이들을 찾아나서는 이들의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불법으로 국경을 넘던 사람들 대부분의 죽음 원인이 급격한 탈수라고 합니다. 미국의 비밀 묘지라 불리는 곳에서 2017년에만 412명이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이곳에서 찾은 No. 170422145 유골. 유류품과 뼈의 DNA 검사를 통해 유골의 신원을 밝혀냅니다. 실종된 고메즈는 번호로 불리던 것에서 이름을 되찾아 가족의 품으로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법의인류학은 뼈를 분석하여 유골의 정확한 신원을 확인하는 역할을 합니다. 사망 원인을 찾는 법의학자와는 그 역할이 조금 다릅니다. 의류를 전문으로 하는 법의학의류분석가도 있습니다. 상황의 배후 사건을 알아내는 법의고고학자도 있습니다. 수많은 이들의 협업으로 죽은 이의 신원, 다잉 메시지를 읽어냅니다.


인류학이란 단어가 붙은 것처럼 법의인류학은 생활방식, 음식 환경 모두 연구한다고 합니다. 전쟁 범죄, 대량 사망 사건의 조사에 참여하며 번호를 붙였던 뼈에게 이름을 되찾아줍니다. 집단 무덤을 발견할 때의 끔찍한 감정을 드러내기도 합니다. 전쟁, 전란이 있었던 곳엔 어김없이 처참한 유골 상태의 집단 무덤이 발견된다고 해요. 


죽은 자를 위해 목소리를 내는 것이 법의인류학자의 마지막 목표입니다. 실종자의 유족들도 시체의 신원이 밝혀지고나면 비로소 회복을 시작할 수 있다고 합니다. 죽은 자들이 어떤 일을 겪었는지 밝히고, 다시 힘을 낼 수 있도록 기운을 북돋는 역할을 하는 법의인류학자는 과거와 미래를 연결하는 사람입니다.


요즘은 최신 기술을 이용해 기후변화, 환경변화, 음식문화 등의 정보를 파악할 수 있고, 머리카락에서 성별, 체형, 식습관, 운동습관을 알아낼 수 있다고 합니다. 그만큼 뼈는 그 사람이 한때나마 이 세상에 살았다는 증거라는 걸 보여줍니다. 뼈는 살아 있을 때와 세상을 떠난 뒤에 겪은 일을 모두 담고 있다는 걸 알려줍니다.


리옌첸 법의인류학자는 2014년 세월호 참사도 사례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여전히 5명의 실종자가 있는 세월호 참사. 인양 과정에서 발생한 추문도 정확히 알고 있고, 유골 추가 발견을 은폐하다 2017년에 적발된 사건 때문에 특히 주목하고 있었습니다.


아름다움을 추구하기 위해 인위적으로 외모를 바꾼 문화가 고스란히 담긴 뼈에 대한 이야기도 들려줍니다. 중국 전족, 19세기 코르셋, 태국 카렌족 사례에서는 유골을 통해 여성들에게 강요된 사회적 표준과 당대의 사회 및 정치 구조를 밝혀내기도 합니다.


산업혁명 초기 영국 성냥 제조 공장의 여성 노동자들 사건도 있습니다. 2015년에 인 중독이라는 것을 밝혀냈다고 합니다. 청소년 유골에서 아래턱 괴사 흔적을 발견했고 인의 독성을 증명한 첫 사례라고 합니다. 유골 덕분에 그들의 이야기를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도시화 과정에서 사람들이 치른 대가, 사회의 성불평등을 이해할 수 있는 뼈에 새겨진 흔적들입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연합군이었던 미국의 잔인성을 보여준 사건도 있습니다. 미국 마리아나 제도에서 전사한 일본군 유해 중 절반 이상이 머리가 없었다고 합니다. 전리품으로 두개골만 남겨 기념품화한 사례처럼 유골의 존엄성을 해친 사례가 역사상 부지기수입니다.


'인체의 신비전'을 관람한 분 계신가요. 비위 약한 사람은 절대 관람못하는 그 전시를 저는 2009년에 봤었는데 정말 신기하면서도 충격적이었거든요. 공포 영화 <아나토미>를 본 탓에 끔찍한 생체실험에 대한 상상력이 가미되어 혼이 이탈되는 듯한 기분이었어요. <뼈의 방>에서는 '인체의 신비전' 주최측이 서류 공개는 하지 않으면서 자발적 기증이라고 주장하는 부분에 의문을 표합니다. 동의 없이 시신이 양도된 것이라면 윤리적 문제에 부딪힙니다. 유골도 한때 '사람'이었음을 끊임없이 일깨우는 <뼈의 방>. 전시 관람 과정이 죽은 이와 함께하는 시간이라는 사실을, 그 속에서 그들의 이야기를 배우는 시간이 되어야 한다는 걸 가르쳐줍니다.


몸 안의 인생 기록이라 불리는 뼈. 이 책은 고인의 생전 경험을 바탕으로 뼈에 담긴 문화와 역사, 생명을 통해 뼈가 들려주는 삶과 죽음을 이야기합니다. 의학, 법의학, 역사, 사회학, 풍속문화, 철학 등 다양한 학문 분야가 연계되어 생명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여야할지 가르쳐주는 뼈의 목소리를 들려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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챔피언의 마인드 : 결정적 순간에 차이를 만드는 힘 - 자신과의 싸움에서 무조건 이기는 멘탈 트레이닝
짐 아프레모 지음, 홍유숙 옮김 / 갤리온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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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승리 이면에 담긴 진짜 의미를 배울 수 있는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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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기를 생각하는 걷기 - 함부르크에서 로마까지, 산책하듯 내 몸과 여행하다
울리 하우저 지음, 박지희 옮김 / 두시의나무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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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유명 언론지 <슈테른> 30년 경력 저널리스트 울리 하우저의 걷기 단상 <걷기를 생각하는 걷기>. 함부르크에서 로마까지 독일, 스위스, 이탈리아 3개국을 100일 동안 걸어서 이동했습니다. 특별한 계획도 없이 작은 배낭을 멘 채!


언젠가 여든다섯 살 노인이 "만약 인생을 다시 살 수 있다면 더 자주 맨발로 땅을 밟고 다닐 거라고, 더 많이 아름다운 풍경을 눈에 담겠다고" 한 말 때문에 이런 용기를 내어 걸어보기로 결심한 울리 하우저. 무거운 등산화를 신고 걷기도, 맨발에 샌들까지. 빠른 걸음으로 걷다가도 어슬렁어슬렁 걸어보기도 하면서 어쨌든 두 발로 약 2,000 킬로미터를 걷는 여정을 펼쳐 보입니다.


"나 자신의 변화를 위해, 새로운 것을 경험하기 위해 익숙한 것을 버리는 중이었다." - 책 속에서


걷다 보면 평소 자주 지나다니던 도로가 보이기도 합니다. 저 길로 갔으면 벌써 도착했을 텐데 싶은 생각도 들지만 부럽지는 않습니다. 이번 여정은 오롯이 두 발이 이끄는 대로 가는 거니까요. 이 위대한 여정은 시작되었고 첫날밤부터 숲속에서 잠을 자야 했습니다. 오랜만에 꺼낸 등산화를 신고 간단한 옷과 휴대폰, 충전기만 챙긴 작은 배낭에 그래도 침낭은 잘 챙겨갔나 봅니다.


숲속의 아침은 서늘하고 맑은 공기로 가득 차있습니다. 저도 아침의 숲을 사랑합니다. 휴양림에 가면 그 누구보다 일찍 일어나 고요한 숲을 만끽하는 걸 좋아합니다. 어느 정도 숲의 냄새를 맡고 난 후엔 끊을 수 없는 믹스커피를 손에 들고, 또 한참을 숲이 내는 소리에 귀 기울입니다. 울리 하우저 저자가 숲에서 느끼는 감정에 공감하게 됩니다. 고요한 숲속 적막을 깨뜨리며 신나게 달리기도 하면서 숲의 악동이 된 것 마냥 순수한 즐거움을 누리는 저자의 모습이 상상됩니다. 유럽 대륙의 모든 길은 로마로 향한다고 하듯 순례자들의 길의 역사를 따라가보기도 하고, 발길 닿는 대로 오솔길을 숲길을 논길을 강가를 따라 걷습니다.


"나는 이 길 위에서 충분한 행복을 차곡차곡 모으기로 했다. 불행한 시간이 오더라도 견뎌낼 수 있는 기쁨의 창고를 만들 생각이었다." - 책 속에서


자신이 어떻게 걷는지 유심히 관찰해본 적 있나요. 태어나 걷는 법을 배운 후 50년이 넘는 기간 동안 당연한 듯 자연스럽게 걸어 다녔지만, 정작 '어떻게' 걷고 있는지 깊이 생각해 본 적이 없다는 걸 깨닫습니다. 걷기 여행을 통해 비로소 자신의 움직임을 자세히 느껴보게 됩니다. 현대인은 서 있기 위해 필요한 근육을 가장 덜 쓰고 있다고 합니다. '글루테우스 막시무스'라는 공룡 이름처럼 불리는 엉덩이 근육은 자신의 역할을 할 겨를이 없을 지경입니다.


"내 무릎은 이제야 앉아있는 것 말고도 다른 일을 할 수 있게 되었다."며 이제는 내딛는 발에 온전히 내 몸을 맡깁니다. 그러고 보니 인생도 마찬가지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모든 결정의 순간, 인생에 나를 맡겨야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겠구나 하는 깨달음을 얻습니다.


걷다가 조금 지치면 쉬면서 회복하면 된다는 느긋한 마음으로, 보행 전문가의 조언도 받아 가며 걷는 여정. 하지만 의족 제작 회사를 방문했다가 양말 지적 당하고, 신발도 수선해야 하고, 걸음걸이도 오른쪽 발에 문제가 있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치료용 신발 제작 장인과의 만남에서는 좋은 신발이란 무엇인지에 대한 철학적인 이야기도 듣습니다. 뼈 26개, 관절 30개, 근육 60개, 100개가 넘는 인대와 200개 이상의 힘줄로 이루어진 발. 평생 앉아만 있던 사람이 걷는다는 것에 대해 진중히 생각해 보게 됩니다.


걸어서 여행하다 보면 역사가 달리 보인다고 합니다. 길에서 만난 사람들은 저마다의 이야기를 가지고 있었기에 다채로운 이야기가 펼쳐지기도 합니다. 나 홀로 사색은 물론이지요. <걷기를 위한 걷기>에서는 수많은 갈래로 뻗어나가는 생각의 가지를 만날 수 있습니다. 어린 시절 추억부터 신변잡기를 포함해 역사, 환경, 사회 문제 등 알쓸신잡 같은 정보가 쏟아집니다. 걷기는 꽤 효율이 좋은 활동이라 다른 신체 활동에 비해 거의 에너지를 쓰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래서 에너지가 머리로 전해지고 뇌가 그것을 고맙게 받아서 사용한다고 말이죠. 산책, 걷기의 효용을 아무리 설토한들 직접 해보지 않고서는 그 감각을 느낄 수 없을 겁니다.


위기의 순간도 간간이 있었지만 큰 탈 없이 여정을 끝마친 저자의 마지막 말은 "아아, 이번 여행은 정말 최고였어."입니다. 걷기를 하는 동안 그는 혼자였으면서 혼자가 아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의 여정에 도움을 줬습니다. 사실 그의 인맥 수준이 놀라울 정도라 부럽더라고요. 그가 간 장소와 만난 사람들을 정리한 마지막 페이지는 그가 걸은 길에 동참하고픈 이들을 위한 소중한 리스트입니다.


오랜 세월 제대로 걷는 법을 잊어버린 몸이 다시 되살아나는 여정을 그린 <걷기를 생각하는 걷기>. 저자처럼 100일간의 도보 여행은 힘들지라도 지금 당장은 평소보다 더 걸어보고 싶다는 의욕을 불러일으킵니다. 앉아서 일하고 차를 타며 이동하는 현대인들에게 걷기의 설렘을 선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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