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들은 이렇게 시간 전쟁에서 패배한다
아말 엘-모흐타르.맥스 글래드스턴 지음, 장성주 옮김 / 황금가지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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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 팬 모임에서 만난 인연으로 손편지를 주고받으며 우정을 쌓던 캐나다 소설가 아말 엘모프타르와 미국 소설가 맥스 글래드스턴. 그들처럼 소설 속 주인공이 편지를 주고받는다면, 그것도 까마득한 과거와 미래를 오가는 시간여행 속에서?!


이 재미있는 아이디어는 단 6주 만에 하나의 근사한 이야기를 낳았습니다. 작가들이 레드와 블루라는 두 주인공을 각각 맡아 서신을 써 내려갔고, 두 이야기가 합쳐지자 환상적인 SF 소설 <당신들은 이렇게 시간 전쟁에서 패배한다 (This Is How You Lose the Time War)>가 탄생한 겁니다.


피로 번들거리는 머리카락, 증기처럼 이글거리는 숨결. 시간 전쟁 중인 레드의 치명적인 살벌함이 느껴지는 도입부. 그런데 이 전쟁터에 어울리지 않는 물건을 발견합니다. '읽기 전에 태워 버릴 것.'이라고 적힌 크림색 편지지입니다. 불을 붙이자 글씨가 모습을 드러냅니다.


레드를 약 올리는듯한 블루의 편지에 레드 역시 가만있지 않습니다. 친히 「리벗 부인의 사교 예절 및 서신 교환법 안내서」를 참고하며 답장을 보냅니다. 둘은 때로는 감미로운 승리의 맛에 취하기도, 보복해 보라며 도발하기도 합니다. 웃자고 하는 얘기에 정색하고 덤비면 곤란하다며 유머 감각도 펼치기도 하면서 말이죠.


시간여행을 할 수 있는 먼 미래. 기술과 기계가 발달한 레드의 에이전시 세계는 흔히 영화에서 보던 기계 인간의 모습과 닮았습니다. 반면 블루가 속한 가든은 식물계입니다. 식물과 인간의 융합이 어떻게 이뤄졌을지는 상상력의 한계 때문에 이미지가 선명히 떠오르진 않네요.


레드와 블루가 비밀 요원으로 행하는 시간 전쟁은 수많은 시간가닥들을 누가 차지하느냐 하는 에이전시와 가든 간의 영역 전쟁입니다. 한 쪽이 정해진 궤도에서 역사를 탈선시켜 다른 길로 인도하고자 하면, 다른 쪽은 그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유지되도록 전력을 다해 방어하기도 합니다.


레드와 블루가 편지를 주고받는 시간 여행지만 해도 공룡이 있는 아득히 먼 과거에서부터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여러 역사적 사건이 펼쳐지는 시대, 그리고 우주 함대 간의 전투가 벌어지는 먼 미래까지 시간 전쟁의 범위는 한계가 없습니다.


각자의 방식으로 편지를 남기는 레드와 블루. 편지 전달매체가 상상을 초월합니다. 불타고 남은 재, 수십 년 동안 차곡차곡 그려진 나무의 나이테, 이글거리는 용암의 붉은 빛, 찻잔 속의 찻잎, 잉크 자국 등 둘만이 눈치챌 수 있는 무언가에 글을 남깁니다. 서로가 같은 시간에 동시에 있지 않기에 글이라는 아날로그적 형태로 서로의 이야기를 펼치는 방식이 기상천외한 전달매체와 이토록 잘 어울릴 줄은 몰랐습니다.


둘 사이의 관계는 작용, 반작용의 물리법칙처럼 연결됩니다. 편지를 읽으며 온통 신경을 곤두세운 모습을 생각하면 가슴이 다 뿌듯할 지경이라며 '나의 가장 사특한 블루에게', '이빨도 발톱도 피로 물든 레드에게'로 시작한 편지는 점차 '나의 친애하는 무드 인디고에게', '아침의 붉은 하늘에게'와 같은 수식어로 변합니다. 이제는 세상에 붉은 것이, 푸른 것이 얼마나 많았는지 압니다. 편지를 주고받으며 그들은 서로를 알아갑니다.


둘은 다른 듯 닮았습니다. 이따금 고립되고 싶은 욕망,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이해하고 싶은 욕망을 갈구하며 생기는 허기, 공허감을 가졌다는 데서 말이죠. 서로가 허를 찌르는 임무를 맡은 정예 요원임에도 레드와 블루의 감정이 변하는 여정을 함께 하다 보면 어느새 독자는 누구의 편이 아닌 둘이 함께 할 수 있기를 바라는 모습을 발견하게 될 겁니다.


시간의 실을 따라 위로 아래로 누비며 역사의 머리카락을 꼬았다가 다시 풀어 헤치며 세상을 만들어가고 유지하는 레드와 블루. 필사의 시간 전쟁에서 레드와 블루의 소통은 반역 행위와도 같습니다. 어느 순간 그들의 뒤를 은밀히 추적하는 자가 있음을 눈치챕니다. 레드와 블루의 끝은 어떻게 될까요.


<당신들은 이렇게 시간 전쟁에서 패배한다>는 서술형 제목을 보자마자 처음엔 결말을 스포일러 하는 제목인 건가 싶어 의아했는데, 다 읽고 나서야 제목에 담긴 의미를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찬사를 보낼 수밖에 없게 한 후반부 편지 한 구절만으로도 가슴이 두근거려 긴 여운을 안겨주네요.


고전문학, 노래 가사, 게임 등 레드와 블루의 편지에 인용된 구절의 빛나는 비유와 패러디도 소설의 맛을 돋우는데 한몫합니다. 유영번역상을 수상한 장성주 역자가 1년여에 이르는 번역 작업을 거친 만큼 번역의 맛이 일품인 소설이기도 합니다.


휴고상, 로커스상, 네뷸러상, BSFA상, 오로라상을 수상하며 전 세계 SF상을 휩쓴 경장편 소설 <당신들은 이렇게 시간 전쟁에서 패배한다>. 할리우드에서 TV 드라마로 준비 중이라는 소식에 놀라기도 했습니다. 추상적으로 다가왔던 이미지들이 어떻게 영상화될지 퀄리티가 기대됩니다. 


"둘은 너무도 오랫동안 서로를 모른 채 살았고, 시간을 누비며 전쟁을 벌였다. 그들은 따로였고 말도 하지 않았지만, 서로의 모습을 빚었고 그러는 동안 서로에 의해 모습이 빚어졌다." - 책 속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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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SR 2030을 만나다 - 위드 코로나시대, 사회공헌에서 ESG 경영까지
윤한득 외 지음 / 제이비크리에이티브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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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30 혁신가들의 젊은 시각으로 안테나를 세워 소셜임팩트를 이끌어가는 2030싱크탱크 안테나살롱의 두 번째 책 <CSR, 2030을 만나다>. 지속가능한 세상을 위한 고민이 담겼습니다.


사회공헌 최전방에서 고군분투하며 체인지 메이킹을 하는 윤한득, 이혜미, 조수빈, 김동하, 원규희, 채진웅, 고민서 7명의 2030 혁신가들. 대기업과 임팩트투자사, 소셜벤처 실무자 및 CEO들이 CSR, CSV, ESG 경영을 이야기합니다. 현재 한국의 CSR 혁신 가치를 고민하고, 2030의 시야로 해결의 실마리를 풀어가는 여정을 통해 지속가능성을 추구하는 CSR 개념의 확장을 도모합니다.


CSR (Corporate Social Responsibility). 경제적, 법적, 윤리적, 자선적인 차원에서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뜻하는 용어입니다. 기업의 사회적 책임이라는 말은 교과서에도 나올 만큼 익히 들어왔지만, 현실의 CSR은 어떻게 실천되고 있었을까요. 그저 기업 구성원의 봉사활동 참여 정도로 끝나지는 않았던가요. 건설 중이던 대규모 댐 붕괴로 13개 마을이 물에 잠겼던 글로벌 이슈, 오너 일가의 갑질과 부조리, 과시형 이벤트뿐이었던 기업들의 사회공헌 등 기업 신뢰도는 바닥을 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대중이 기업과의 관계가 밀접한 시대입니다. 내 자식은 대기업에 취직하길 바라면서도 대기업을 신뢰하지 않는 사회 터전입니다. 오너 리스크가 생기면 대중이 먼저 외면합니다. 보여주기식 사회공헌은 대중의 비난이 뒤따릅니다. 환경 이슈를 대두하면서 무늬만 사회공헌인 모순을 대중은 용서하지 않습니다. 스마트한 대중들입니다.


반면 진정성 있는 모습에는 찬사를 보내며 기업 신뢰도가 높아집니다. 가시적 성과주의로 수혜적 사회공헌이 CSR의 전부였던 것에서 이제는 지속가능한 사회공헌으로 가치 창출해야 하는 기업. <CSR, 2030을 만나다>는 위기의 CSR의 현재를 살펴보고, 기업이 어떤 전략으로 진정성을 확보할 수 있을지 해법을 제시합니다.


사회의 혁신과 변화를 위해 재무적 수익과 사회적 수익창출을 함께 추구하는 임팩트투자에 대해서도 소개합니다. 아직 해외처럼 활성화되진 않았지만, 기업의 사회적 파급효과를 고려한 임팩트투자가 한국에서는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현 상황을 짚어봅니다.


기업의 ESG 경영이란 용어도 심심찮게 들리는데 기업의 환경, 사회, 거버넌스 측면에서 사회적, 윤리적 가치를 반영해 눈속임이나 평가용이 아닌 진정한 사회 변화를 위한 ESG 실천을 살펴보기도 합니다. 과거 많은 비난을 받았던 기업이 성공적으로 변모한 사례라든지 긍정적 변화를 보인 기업 사례를 소개하며 진정성 있는 ESG 실천이란 어떤 것인지 이해할 수 있습니다.


ESG, 임팩트투자 등의 키워드는 그저 기업만의 이야기를 넘어 사회, 국가적으로 지속가능성을 추구하는 키워드로 부상하고 있기에 알아둘 필요가 있습니다. 용어가 낯선 이들도 쉽게 이해할 수 있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사회 주류로 등장한 MZ세대.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중요시하고, 자신의 생각을 플렉스하고, 언행일치를 요구합니다. 단순히 제품이 아닌, 제품을 만드는 브랜드와 회사 자체를 구매하는 겁니다. 기업과 브랜드는 MZ세대의 생각과 가치관을 대신 표현해 주는 동료와 같다고 생각하기에 기업은 제품뿐만 아니라 가치관과 비전을 MZ세대에게 전달해야 합니다. CSR 패러다임의 전환이 필요한 시점입니다.


도도한콜라보 대표 원규희 저자는 착한 마음을 공유하는 커뮤니케이션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구매할 때 제일 고려하는 1요소인 기업 이미지, 세상과 빠른 소통을 하는 MZ세대와의 착한 소통은 필수입니다. 그리고 '공공의 마음'을 여는 마케팅 방법의 전환에 대해 들려줍니다.


행정기관의 정책 홍보성 PR만이 아니라 기업도 공공커뮤니케이션으로 제품과 활동에 대한 선한 정보를 제공하고, 사회 변화를 일으킬 수 있는 포괄적인 커뮤니케이션 활동을 해야 한다고 합니다. CSR과 공익 연계 마케팅 CRM의 연결성을 이야기하며, 상품 자체에 담긴 스토리에 반응하고 가치소비를 원하는 소비자를 향한 공공커뮤니케이션의 다양한 기업 사례를 소개합니다.


유행성이 아닌 공공, 공익적으로 사회에 긍정적인 커뮤니케이션으로 선한 영향력을 주기 위해 지속적으로 노력하는 방향으로 성장하기 위한 공공커뮤니케이션의 미래를 고민해 본 시간입니다. 결국 핵심은 진정성이라는 것을요.


영끌해야만 하는 부동산 시장에 대한 이슈도 등장합니다. 단순히 공급만의 문제로 해결되지 않는 부동산 문제. 명확하고 체계적인 도시개발 정책과 적극적인 정부 참여로 효율적인 토지 사용 계획을 하는데 필요한 디벨로퍼의 중요성이 대두됩니다.


땅을 디자인하는 사람, 디벨로퍼. 치명상을 입은 LH 사건을 통해 더욱 디펠로퍼의 역량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는 시점입니다. 조선 최초의 공공디벨로퍼 정세권의 스토리를 들려주며 한국형 디벨로퍼의 미래를 제시합니다.


위드 코로나시대, 사회공헌에서 ESG 경영까지 <CSR, 2030을 만나다>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2030 청년들의 고민이 담긴 책입니다. 더 나은 세상을 위한 생각의 확장을 통해 우리 사회와 기업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함께 생각해 보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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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던걸 수필집 : 내 머릿속에 푸른 사슴 - 현대어로 쉽게 풀어 쓴 근대 여성 문학 모던걸
강경애 외 지음 / 텍스트칼로리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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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의 세월이 흘러도 공감할 수 있는 여성 작가들의 주옥같은 글을 만나는 시간 <모던걸 수필집 : 내 머릿속에 푸른 사슴>. 대전에서 독립서점을 운영하며 단행본을 기획하는 텍스트칼로리에서 근대 여성 문학 시리즈를 내놓았습니다. 남성 중심 문단에서 비주류였지만 목소리를 내려고 애쓴 여성 작가들의 소설, 수필, 시 작품을 선정해 현대의 시선으로 큐레이션하고 현대의 언어로 담아 선보인 모던걸 시리즈.


<모던걸 수필집 : 내 머릿속에 푸른 사슴>은 1890년대~1910년대에 출생해 20세기 초반 작품 활동을 펼친 백신애, 노천명, 나혜석, 강경애 네 명의 작가들의 수필 21편을 담았습니다. 가부장제 사회 속에서 여성의 목소리를 내기 힘들었던 시기에 근대적 사고방식을 갖춘 신여성을 일컫던 모던걸. 오늘날까지 관통하는 여성들의 이야기를 만나보세요.


보통학교 교원으로 근무하다 여성 동우회, 여자 청년 동맹 등에 가입한 것 때문에 해임 당한 백신애 작가는 1929년 조선일보 「나의 어머니」로 등단합니다. 백신애 작가의 글을 읽어보진 못해서 작가의 문체 스타일은 알 수 없지만 수필은 꽤 재미있네요.


<모던걸 수필집 : 내 머릿속에 푸른 사슴>에는 5편의 수필이 실렸는데, 신혼여행을 주제로 기고한 <슈크림> 글은 특히 유머 감각이 돋보였습니다. 당시 신혼여행지를 결정하는 과정에서 아버지는 공장, 회사를 견학하라며(?!) 오사카행을 권유하셨고, 아버지 말씀에 차마 반대 못하고 오사카로 떠나는 상황을 보니 아찔해집니다. 그래도 남편이 꽤 센스 있는 행동을 하네요. 둘은 다른 지역으로 새어버립니다. 그런데 막상 다른 곳에 도착해 둘러봐도 풍경은 거기나 여기나 크게 감흥은 없고, 오히려 슈크림에 대한 에피소드만 시간이 지나도 기억에 남았다고 합니다.


슈크림을 좋아한다는 말에 남편이 한 상자를 안겨줬는데, 열 개를 한자리에서 먹게 된 사연은 배꼽 잡습니다. 나중에야 "나야 체면으로 권했지만 당신의 위 주머니도 상당히 야만적이던데."라는 남편의 말에 빵 터질 수밖에 없었어요.


신혼여행을 마치고 온 후, 슈크림은 쳐다보기도 싫어진 백신애 작가의 이야기 외에 그 시대의 풍경을 엿볼 수 있는 수필도 인상 깊었습니다. 종달새에 관한 이야기가 두 편이나 실렸는데, 요즘은 농약 피해로 보기 힘들어진 종달새(노고지리)가 집 근처에서 흔하게 지저귄 시절이었다니 향수를 자아내게 합니다.


<사슴>으로 유명해진 시인으로 잘 알려진 기자 출신 작가 노천명. 권력에 휘둘린 전적 때문에 작품의 가치가 묻히는 아쉬움도 있습니다. 모던걸 수필집에는 7편의 글이 수록되었는데, 직장 생활을 하는 독신 여성으로서의 삶에 대한 고군분투가 담겨 있어 의미 있습니다. 신문기자 생활을 10년간 하며 여성에게 한해 이것은 화려한 직업이 아님을 고백하기도 합니다. 졸업하자마자 취업한 신문사에서 정신 바짝 차리다 보니 오히려 '찬바람 분다'는 소리를 이성 기자들에게 듣습니다.


"작가란, 작품 활동에 있어서 놀고 있는 것같이 보여도 머릿속에서는 늘 바쁘게 일을 하고 있다."며 작가 생활을 하려면 최소한의 생활 보장이 되어야 가능하다고 말합니다. 일정한 수입을 갖기 위해서는 정신적으로는 고역이지만 일을 해야만 한다고 말이지요. 최저 생활의 확보를 위해 언제나 '짬'을 가질 각오를 한 노천명 작가의 생각이 드러납니다.


어느 날은 시골 오두막에서 참외를 먹다가, 시골에서 이렇게 먹는 걱정 외에는 별 걱정 없이 한가로이 지내는 것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기도 합니다. 그러자 참외밭 노인이 한 말이 명언입니다. "먹는 걱정이 그게 작은 걱정 아니죠."


한국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 나혜석. 최근 가장 관심 있게 눈여겨본 근대 여성작가 중 한 명입니다. <모던걸 수필집>에 실린 네 편의 수필은 기존에 읽어보지 않았던 글들이어서 반가웠어요. 


유학 시절 일본인 N군과의 질긴 인연의 에피소드는 섬뜩해 뜻밖의 놀라움을 안겨주었고, <젊은 부부> 글은 신혼시절에 발표한 글인 줄 착각할 정도로 이상적인 결혼관을 엿볼 수 있었는데, 알고 보니 이혼을 앞둔 시기에 내놓은 글이어서 놀랐습니다. 여성의 권리에 대해 목소리를 높인 나혜석의 삶과 닮은 글을 만날 수 있기도 합니다. 주부의 권위에 주목해 쓴 프랑스 가정을 소개하는 글이 인상 깊습니다.


여성의 지위와 권리 향상을 위한 운동에 참여한 강경애 작가는 1931년 단편소설 「파금」으로 데뷔합니다. 이전 세 작가의 글이 지금 일상의 소소한 행복을 그려냈다면, 강경애 작가의 글은 문학적 감수성이 담긴 글이어서 또 다른 읽는 맛을 안겨줍니다. 황해도 출신 작가인 만큼 몽금포, 섬몽금이, 장산곶 주변 가난한 어촌 생활을 그려낸 글은 낯설면서도 그 시대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매력이 있습니다.


한국 근대 수필을 읽으며 그 시대의 생활상과 의식 수준을 엿볼 수 있습니다. 백신애의 글에서는 재래의 인습을 타파하려는 개명꾼을 향한 존경과 비난의 이중성을, 노천명의 글에서는 지금은 사라진 참외 재래종의 종류를 한껏 만날 수 있었고, 나혜석의 글에서는 유교적 억압을 무릅쓰고 표현의 자유와 권리를 찾으려 하는 용기를, 강경애의 글에서는 그 시대 가난하지만 억척같이 꾸려간 민중의 삶을 만날 수 있습니다.


<모던걸 수필집 : 내 머릿속에 푸른 사슴>은 100년 전 모던걸이 이 시대를 사는 모던걸에게 들려주는 일상의 이야기입니다. 굴곡 많은 작가들의 삶 때문에 수필집을 펼치기 전에는 거창한 주제의식이 담긴 목적 있는 강한 글을 예상했는데, 의외로 소박한 일상의 이야기였기에 색다른 즐거움이 가득했습니다. 우리는 100년 후 모던걸에게 어떤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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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완성 심플한 가죽 소품 만들기
오하마 요시에 지음, 박재영 옮김 / 스트로베리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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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으로 조물딱 만드는 취미 하나쯤 갖고 계시나요. 저는 한때 퀼트에 빠져 가방, 커튼, 작은 이불까지 만들며 일상의 곳곳을 함께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바느질 취미에 빠졌던 전적이 있는데도 당시엔 가죽 원단으로 뭔가를 만들 생각은 못 했었어요.


요즘은 아예 조물딱 만드는 취미를 잃어버리고 살다 보니 가죽 공예에도 관심 없었는데, <하루 완성 심플한 가죽 소품 만들기> 책을 보면서 다시 도전 의욕이 솟습니다. 하루 만에 완성할 수 있는 소품이라니 결과물이 후딱 나와야 직성이 풀리는 제 성격에도 딱 좋은 수준입니다.


가죽 가방 장인이자 손바느질로 만드는 가방 교실을 운영하는 오하마 요시에 저자는 이 책에서 초보자도 독학으로 가죽 소품 작품을 완성할 수 있는 방법을 알려줍니다. 가죽 원단에 대한 핵심 설명과 함께 간단한 손바느질로 소품을 만드는 방법, 사용 중 손질법 등을 소개합니다.


뭔가를 취미 생활로 시작하다 보면 이것저것 준비물 비용만 해도 상당합니다. 초보자는 뭘 사야 할지도 고민입니다. <하루 완성 심플한 가죽 소품 만들기>는 최소한의 도구로 심플하고 튼튼한 가죽 소품을 만들 수 있게 소개하고 있어, 과한 비용이 들어가지 않아서 마음에 들더라고요. 만들고 싶은 소품을 선택해 필요한 재료만 먼저 준비하고 도전해서 완성해보는 작은 성취감을 안겨주는 책입니다.


저는 바늘을 잡아야 하는 손이 고질병이 있어 관리에 신경을 써야 하는지라 바느질을 그만뒀는데, 그래서 두껍고 질긴 가죽 원단을 손바느질한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 싶었거든요. 그런데 가죽 원단에 바느질 구멍을 뚫어주는 기구가 있다는 걸 이번에 알게 되었어요. 치즐이라고 부른대요. 포크처럼 생긴 기구인데 나무망치로 톡톡 쳐 (목타를 친다고 표현한다고 합니다) 구멍을 내면 바늘을 넣기 쉬워지는 겁니다. 치즐 덕분에 이번 생애 저도 가죽 소품 만들기 도전할 수 있게 되었어요 :)


<하루 완성 심플한 가죽 소품 만들기>는 모든 작품의 공통된 기본 작업부터 꼼꼼히 익힐 수 있게 도와줍니다. 실 꼬임이 풀리지 않게 하는 왁싱 방법, 매듭 없이 마감하는 바느질 비법, 가죽에 따라 알맞은 기본 스티치 방법 등 찬찬히 따라 하기 좋게 사진으로 과정을 보여줍니다.


천연가죽 중에서 저는 보들보들한 감촉을 좋아하는데 직접 가죽 원단을 손으로 만져보고 고르고 싶어지더라고요. 이 책에 소개된 가죽 가공 중 개성 넘치는 주름이 만들어지는 세척 가공법도 독특해서 직접 경험해보고 싶어졌어요.가죽은 평소 다루기 까다로운 원단이라 생각했는데 의외로 자주 사용해야 매력이라는 말에 저도 고이 보관된 가죽 가방을 열심히 들고 다녀야겠다 싶습니다. 멋이 더해지는 에이징이 가죽의 매력이니까요.


<하루 완성 심플한 가죽 소품 만들기>에서는 크기가 작은 가방 정도까지의 소품이 소개되어 있습니다. 쓰고 남은 자투리 원단으로 작은 소품까지 알차게 만들 수 있어 좋아요. 손재주 좋은 분들이라면 선물용이나 소소하게 부업용으로도 좋은 가죽 소품 만들기입니다.


간단한 직사각형 티코스터, 고품스러운 펜 케이스, 지갑, 가방 같은 가죽 원단으로 만들 수 있는 일반적인 작품들 외에도 냉장고 자석 소품이나 앙증맞은 머리끈처럼 색다른 분위기를 낼 수 있는 소품 작품도 있어 하나하나 만들어보는 재미가 쏠쏠할 것 같습니다. 친정엄마는 신발 뒤축이 꺾이지 않도록 가방에 휴대용 구두주걱을 항상 넣고 다니시는데 가죽 원단을 덧댄 구두주걱 아이템도 있어 눈길을 사로잡았습니다.


의외로 번잡한 방법이 아닌 쉽게 만들 수 있는 가죽 소품 작품. 간단하지만 오래 사용할 수 있는 소품을 만들 수 있게 도와주는 <하루 완성 심플한 가죽 소품 만들기>로 가죽과 친해지는 기회를 만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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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엔 알고 싶은 건축물이 너무도 많아 - 역사와 문화가 보이는 서양 건축 여행
스기모토 다쓰히코나가오키 미쓰루.가부라기 다카노리 외 지음, 고시이 다카시 그림, 노경아 / 어크로스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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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집트 피라미드부터 루브르 유리 피라미드까지, 고대에서 현대에 이르는 서양 대표 건축물 69곳과 그에 얽힌 이야기를 들려주는 <세상엔 알고 싶은 건축물이 너무도 많아>. 평소 건축에 관심 있는 독자뿐만 아니라 여행 중 마주하는 수많은 건축물들을 폭넓게 이해하며 더 의미 있는 여행을 할 수 있도록 여행자들을 위해서도 꼭 필요한 책입니다.


건축 용어는 낯설지만 일반인을 대상으로 한 교양도서인 만큼 재미와 지식 둘 다 잡은 매력적인 책이에요. 핵심 포인트를 표현한 일러스트가 곳곳에 배치되어 있어 이해도가 쑥 높아집니다. 69곳의 건축물 중 사실 별로 관심 없는 건축물도 있기 마련이잖아요. 그런데 '꼭 알아두길 바랍니다.'라는 멘트가 있어요. 그럴 땐 대충 넘겼을법한 페이지도 어쩔 수 없이(?) 읽게 되는데 그 부분을 놓쳤더라면 뒤에 나오는 이야기와 연결되지 않아 큰일 날 뻔했겠더라고요.


<세상엔 알고 싶은 건축물이 너무도 많아>는 '쌓기'의 최고봉 피라미드에서 시작합니다. 아이들이 블록으로 '쌓기'로 무언가를 만들기 시작하듯 건축은 '쌓기'에서부터 시작되었을 거라고 합니다. 피라미드는 도르래 방식이 발명되기 전의 시대여서 여전히 어떻게 쌓았는지 미스터리한 건축물입니다.


3000년에 걸친 고대 이집트 역사에 등장하는 이집트 신전 이야기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방위를 중시하고 미궁 속을 나아가는 축선과 깊이감을 가진 이집트 신전. 신전 하면 그리스 신전이 좀 더 낯익은 우리에게 시대별로 신전을 비교해 설명하는 방식으로 들려주니 빠져들지 않을 수 없습니다. 


궁극의 건축미를 보여주는 명쾌한 구조의 그리스 신전이 이집트 신전에서 이어받은 요소는 무엇인지, 다른 점은 무엇인지, 이후 로마 시대 건축의 변화로 연결되는 여정을 정리해 줍니다. 여행하다 보면 무슨 무슨 양식이라느니 해도 성당은 다 비슷해 보이고 헷갈리기 마련입니다. 이 책을 읽고 나니 흐름도 정리되고, 양식의 차이를 이해할 수 있어 건축물을 봤을 때 어디를 중점으로 봐야 할지 이제는 알게 되었어요.


그리스 시대 신전은 사람이 안에 들어갈 수 없어 외관을 중시했다면, 로마 시대 기독교 건축물은 예술적인 내부 공간을 갖춰나간 게 특징입니다. 동방교회와 서구 기독교 교회의 건축물이 왜 차이 나는지, 같은 양식이어도 지역별로 특징이 왜 달라지는지 알 수 있습니다.


일반 민중을 위한 도시교회가 많이 생기자 빛 속에 떠다니는 듯한 느낌을 주는 구조가 가벼워 보이는 고딕 양식과 높이 경쟁이 생깁니다. 고대 로마 건축을 검증하려는 노력에서 시작한 르네상스 건축, 그 식상함에 일탈한 건축물 등 로마 시대 이후 변화와 발전을 거듭해온 고전 요소를 콕 짚어주기도 합니다. 정치, 종교적으로 적합한 공간을 실현하기 위해 만들어진 건축물의 비하인드스토리를 이해하면 그제서야 제대로 보이기 시작합니다.


프랑스 바로크 대표 건축물 보르비콩트 성은 루이 14세가 반해 그 성을 지었던 예술가들을 그대로 등용해 베르사유 궁전을 지었다고 합니다. 화려함의 극치를 누렸던 그 시대상에 빼놓을 수 없는 악녀로 왜곡된 인물인 마리 앙투아네트와 관련한 건축물도 있었는데요. 답답하고 피곤한 궁전에 지친 마리 앙투아네트는 오히려 농가 형태로 소박한 외양을 가진 픽처레스크를 지었다고 합니다. 자연스러움을 강조하는 이 양식은 도시 계획의 기본 원리로 후대에 영향을 끼칩니다.


회화, 조각, 건축이 혼연일체 된 종합 예술이라 불리는 바로크 양식, 호화로움과 허세를 벗어나 사적 공간의 즐거움을 추구한 로코코 양식, 단순히 과거 회귀가 아닌 새로운 미학에 기초해 장식적 요소를 줄이고 새로운 양식을 지향한 신고전주의, 고딕 열풍의 부활 빅토리안 고딕 등 새로운 양식이 유행했다가 쇠퇴하는 역사가 반복되는 과정을 보여준 <세상엔 알고 싶은 건축물이 너무도 많아>.


르랑시 노트르담 성당에서 현재의 안도 다다오에 이르는 철근 콘크리트 노출 건물, 흰 상자 모양의 건물에 연속 창을 낸 건물 형식의 원형인 데사우의 바우하우스를 통해 현대 세계의 공통 언어가 된 모더니즘 건축을, 크라이슬러 빌딩처럼 이 시대 마천루의 아르데코 양식 등 산업혁명 이후 근현대 건축의 역사가 이어집니다.


고대 이집트 피라미드에서 시작한 글은 파리 유리 피라미드에서 끝납니다. 왜 이집트 피라미드가 루브르 박물관 앞에 떡하니 서있는지 제가 짐작했던 이유와는 전혀 다른 이유더라고요. 지하 공간에 자연광을 끌어들이기 위해 설계된 형태가 유리 피라미드라고 합니다.


시대와 함께 변화하며 새로운 건축과 양식을 선보인 건축의 역사를 이토록 쉽게 설명하다니 반할 수밖에 없는 책 <세상엔 알고 싶은 건축물이 너무도 많아>. 서양사 연표와 서양 건축 지도로 서양사와 건축의 역사를 정리한 특별한 부록까지, 건축물 순례 여행에 있어 훌륭한 가이드가 되는 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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